2023년 게임 산업의 핵심 키워드는 무엇일까? 몇 가지 단어 조합만으로 다사다난했던 2023년 K-게임 산업의 트렌드 변화를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장르적 측면으로 범위를 줄이면,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바로 ‘탈 MMORPG에 따른 다양성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탈 MMORPG’는 말 그대로, MMORPG 장르에 대한 의존도와 집중도를 벗어나 장르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MMORPG는 지난 1998년 엔씨소프트의 ‘리니지’가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는 스테디 장르로 자리매김하며 K-게임의 전성기를 견인해왔다. 리니지 IP를 앞세운 엔씨소프트는 ‘리니지2’, ‘아이온’, ‘블레이드앤소울’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MMORPG 명가’로 우뚝 섰고, 이에 자극받은 경쟁사들도 앞다퉈 각 사의 간판으로 내세울 MMORPG를 갖기 위해 엄청난 물량 공세를 퍼부으며 생존을 위한 혈투를 펼쳤다. 실제로 MMORPG를 성공시킨 국내 주요 게임사들은 잇달아 기업공개에 나서며 몸집을 키워갔고, 이를 바탕으로 원작의 정통성을 잇는 속편격 MMORPG를 내놓으며 치열한 경쟁을 이어가게 된다. MMORPG의 성공 DNA는 해외 시장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국내 이용자와 성향이 비슷한 중화권 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일찌감치 K-게임의 한류 돌풍을 주도했다.
‘리니지’ 시작 화면 출처_엔씨소프트 홈페이지
하지만 밝은 빛은 항상 검은 그림자를 만드는 법. MMORPG에 대한 장르 편식이 심화되면서 유사한 게임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세계관, 직업군, 타격감, 비즈니스모델, 커뮤니티까지 ‘리니지’의 성공 문법만을 답습한 신작들이 게임사 간 바통만 이어가며 릴레이식으로 출시된 것이다. 이들은 외형적으로 ‘리니지 라이크’라는 하나의 장르화에만 성공했을 뿐, 대다수는 출시일 전후에만 반짝했다 사라지는 별똥별 신세가 되었다.
MMORPG 편중에 대해 이용자들이 호소한 피로감은 서서히 게임사들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중세 판타지 배경의 검사와 법사, 확률형 아이템을 통한 강화와 합성, 피라미드식 정치 경제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리니지식 문법으로는 더 이상 매력 어필이 힘들다고 판단한 게임사들이 ‘리니지 라이크’ 찍어내기에 쏟았던 리소스를 ‘다양성’이란 포인트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MMORPG의 주요 공급망이었던 중국 시장이 한한령 속에 신규 판호 발행이 중단되고, 이에 따라 대규모로 투입된 개발비 회수가 어려워진 부분도 ‘탈 MMORPG’를 가속시킨 주된 배경이 되었다.
‘우마무스메 프리티더비’ 출처_카카오게임즈
‘승리의 여신: 니케’ 출처_니케 페이스북
‘데이브더다이버’ 출처_넥슨 홈페이지
‘탈 MMORPG’의 선봉에 선 장르는 서브컬처. 일찌감치 일본과 중국 시장에서 인기 장르로 자리 잡았던 서브컬처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게임 구조, 스토리 중심의 팬덤 형성, MZ세대 중심의 문화 창출 등의 장르적 매력을 앞세워 메인컬처로 급성장했다. 넥슨의 ‘블루아카이브’ 카카오게임즈의 ‘우마무스메’ 시프트업의 ‘승리의여신: 니케’ 등이 각기 차별화된 게임성을 앞세워 ‘탈 MMORPG‘ 트렌드 변화에 앞장섰다. 서브컬처 외에도 2023년 대한민국게임대상 6관왕에 오른 네오위즈의 ‘P의 거짓’을 필두로 한 소울라이크, 국내 최초 200만 싱글 패키지 판매를 기록한 넥슨의 ‘데이브 더 다이버’가 창조한 해양어드벤처 등이 창의성과 독창성, 그리고 대중성을 가미한 하이브리드 장르로 MMORPG 일색이던 국내 게임 시장에 유의미한 변곡점을 만들고 있다.
‘P의 거짓’ ©네오위즈
이 같은 장르 다변화 흐름은 2024년 이후에도 더욱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가까운 미래 트렌드를 엿볼 수 있는 무대인 ‘지스타 2023’ 부스는 MMORPG를 대신한 다양한 장르의 신작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동안 MMORPG에 집중했던 웹젠은 ‘테르비스’를 비롯해 3종의 서브컬처를 선보였고, 그라비티와 쿠로게임즈 등도 서브컬처 신작을 내놓고 참전을 예고했다. ‘배틀그라운드’로 MMORPG를 저격했던 크래프톤은 인생시뮬레이션 ‘인조이’를 통해 지스타 기간 내내 관람객들의 눈과 손을 기쁘게 했다.
특히 MMORPG 외길을 걷던 엔씨소프트의 행보를 통해 확연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8년 만에 지스타를 다시 찾은 엔씨소프트는 출시가 임박한 MMORPG ‘TL’을 제외하고 6종의 신작을 MMO슈팅, 배틀로얄, 어드벤처, 퍼즐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해 새로운 변화와 도전을 알렸다.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는 “MMORPG가 아닌 다양하고 캐주얼한 장르로 유저들을 만나러 왔다. 새로운 게임 세대가 자라나면서 그동안 소외되었던 장르가 메인 장르로 바뀌는 모습를 보고 있다”라며 ‘탈 MMORPG’ 트렌드에 올라탄 배경을 설명했다.
2023 지스타 개막식 출처_지스타 TV
‘탈 MMORPG’가 단순히 MMORPG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팬덤의 다양성이 증가함에 따라 포트폴리오를 풍성하게 꾸민다는 의도에 무게가 실린다. 중장기적으로 장르 간 밸런스를 높이고 경쟁력과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크다. ‘나이트크로우’를 앞세워 MMORPG의 자존심을 지켜낸 위메이드 장현국 대표가 “다양한 장르의 게임이 산업 전체 생태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면서도 “K-MMORPG의 문법은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혁신시켜 가야 할 자산이다”라고 힘주어 말한 부분도, ‘탈 MMORPG’를 넘어 여러 장르간 균형 있는 상생과 경쟁을 통해 K-게임이 나가야 할 길을 제언한 것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