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은 음악의 생산 시스템이 아니라 콘텐츠 산업의 대안 비즈니스 모델로 진화할 가능성을 보인다. 지속 가능한 사업 모델을 찾는 콘텐츠산업에 영감을 주는 K-팝은 콘텐츠 비즈니스 모델로서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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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초, 걸그룹 르세라핌은 성수동에서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K-팝 그룹이 팝업스토어를 오픈하는 일은 자주 있지만 그 규모나 내용은 조금 달랐다. 기존의 K-팝 그룹 팝업 스토어는 관련 굿즈와 앨범을 파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르세라핌은 ‘브랜드’로서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것 같았다. 특히 패션 액세서리와 피트니스 패션이 도드라졌다. 이 팝업스토어에서 르세라핌은 일종의 패션 브랜드였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작년에 여의도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뉴진스의 팝업스토어였다. 뉴진스는 아주 작은 문구류로 아이템을 채웠다. 파일 홀더, 머그잔, 책갈피와 사진엽서 등 좀 더 학생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 제품들이 많았다. 르세라핌과 뉴진스의 팝업은 그 두 그룹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비교될 만하다.
이런 팝업스토어에 대해 K-팝이 엔터테인먼트에서 커머스로 진화한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앨범이 아니라 굿즈를 판매함으로써 매출을 높이려는 시도라고 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팝업스토어는 이벤트 성격이 강하고, 매출을 높이려면 그 제품들이 지속적으로 판매되어야 한다. 그러나 K-팝 그룹의 팝업스토어는 단기적인 행사에 머문다. 나는 이것을 ‘케이팝 그룹의 브랜드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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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케이팝은 종종 시스템으로 정의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성된 형태의 아티스트를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이것은 1910년대 할리우드에서 고안된 ‘스타 시스템’의 변형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타 시스템은 1910년, 일명 ‘바이오그래프 걸’로 알려진 배우 플로렌스 로렌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영화 산업 초기에 제작자들은 출연료를 아끼려고 배우의 이름을 크레디트에 넣지 않았다. 당시 배우들은 배역이나 애칭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바이오그래프 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칼 래믈이란 제작자는 1910년, 자신의 영화에 플로렌스 로렌스의 이름을 공표하며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이런 식으로 ‘스타’가 탄생했고, 이후 할리우드는 스타를 발굴하고 그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K-팝의 스타 시스템은 스타를 발굴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이미지와 실력을 가진 스타를 만들어낸다. 연습생, 오디션 같은 말들은 케이팝을 대표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음악 산업의 생산-유통-판매 구조에서 ‘생산’에 국한된다. 음악 산업의 핵심인 아티스트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것이 K-팝의 연습생과 오디션 시스템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향력이 얼마나 압도적이냐에 따라 유통과 판매 단계를 장악할 수 있다.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기 시작한 90년대 말, 아이돌은 ‘문화 현상’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음반 시장이 붕괴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아이돌 그룹은 경제적 관점으로 주목받았다. 인터넷, MP3, P2P 서비스 등의 이유로 절대다수의 음반이 팔리지 않던 시절에 동방신기와 같은 아이돌 그룹은 백만 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사례로 여겨졌다. 이 구조의 핵심은 팬덤이다. 아티스트의 영향력은 팬덤의 규모와 직결되고, 기획사는 이 둘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인터넷, 테크, 커뮤니티 운영 등의 노하우를 키웠다. 그 목적은 음반의 대량 판매였다. 음반을 대량으로 판매하기 위해 아티스트의 매력을 키우고, 그 매력을 팬미팅으로 제품화하는 과정에 포토카드와 응모권을 음반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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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20년대가 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K-팝은 일본과 동남아에 이어 미국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RIAA(미국레코드산업협회)에 따르면 2021년 미국의 음악 시장은 연간 약 150억 달러 규모로 세계 최대의 음악 시장이다. BTS는 이렇게 거대한 시장에서 K-팝의 방식으로 성공을 거뒀다. 미국 음악 시장은 스트리밍이 주도하고 있다. 미국 음악 시장 규모 150억 달러 중 83%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발생했다.
음반 시장이 붕괴되다시피 한 미국 시장에서 BTS를 비롯해 K-팝 그룹의 음반 판매량은 매우 특이한 사례로 여겨지지만, 그 한계도 명확하다. 미국에서의 음반 판매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전통적으로 미국 음악 시장은 음반 판매와 투어로 작동하는데, 현실적으로 팬미팅과 음반 판매의 연결을 강화하는 것보다 미국 투어를 통해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또한, K-팝의 핵심은 강력한 팬덤이기도 하다. 이런 팬덤이야말로 K-팝이 여느 음악 비즈니스와 가장 크게 구별되는 지점이다. K-팝 기획사는 아티스트의 매력을 극대화하면서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콘셉트로 데뷔한다. 그 과정에서 팬덤이 발생하고, 그 팬덤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 기획사의 마케팅 역량이 집중된다. 이런 팬덤의 구매력을 반복적인 소비로 전환하기 위해 팬미팅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이것이 바로 K-팝의 지속 가능한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음반의 기능이 사실상 사라진 지금, 굿즈나 응모권으로서 음반을 대량으로 판매하고, 그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팬덤을 관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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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구조가 논란이 되고 있다. 시장의 확대, 개인 미디어 환경 등으로 팬들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또한 2021년 UN기후회의에서 205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제로로 줄이기로 합의하면서 환경 이슈가 중요해지고 있다. 2025년 이후에는 국제사회에서 플라스틱에 대한 규제가 점점 강화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K-팝은 대량의 음반 판매를 대체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시 르세라핌과 뉴진스의 팝업스토어를 살펴보자. 이들은 단지 음악가라기보다는 패션과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서의 방향성을 틈틈이 드러내고 있다. 브랜드로서의 아티스트라는 방향성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서의 K-팝과 연결된다. 물론 르세라핌도 뉴진스도 기존 K-팝 그룹과 같은 방식으로 랜덤 앨범과 팬미팅 응모권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음악 그룹이 아닌 브랜드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실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실험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것 또한 팬을 기반으로 삼기 때문이다. 팬은 누가 뭐래도 음악 비즈니스의 토대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현재, K-팝은 음악의 생산 시스템이 아니라 콘텐츠 산업의 대안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진화할 가능성을 가진다. 음반 판매를 벗어나 다른 수익 모델을 찾으려는 K-팝 기업들의 시도는 결국 디지털 콘텐츠의 지속 가능한 사업 모델을 고민하는 영화, 출판, 방송, 패션, 캐릭터 등 거의 모든 업계에 영감을 줄 수 있다. 과연, K-팝은 콘텐츠 비즈니스 모델로서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을까? 2023년 이후의 K-팝을 고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