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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사가 엔터테인먼트로 간 까닭은
글. 매일경제 디지털테크부 황순민 기자

게임사들의 행보가 수상하다. 넥슨은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의 최대 주주에 오르고, 크래프톤은 미국의 엔터 기술 기업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다. 게임사들은 왜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 진출하는 걸까?

‘킬러 IP(지식재산권)’의 확보가 글로벌 확장과 수익화의 관건으로 떠오르면서 게임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게임과 콘텐츠 업계는 ‘시간의 점유’ 측면에서 경쟁 관계에 있지만 최근 ‘미디어 믹스’가 새로운 전략으로 떠오르면서 합종연횡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 믹스’란 핵심 IP를 소설, 영화, 만화, 게임, 캐릭터 제품 등 여러 미디어로 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게임을 드라마·애니메이션으로 만들거나, 인기 웹툰을 게임으로 제작하는 것.

‘던전앤파이터’ 등 많은 게임 IP를 보유한 넥슨은 글로벌 엔터테인먼트사로 도약 중이다.
©넥슨

기존 IP를 활용한 수익 모델 창출이 한계에 봉착하면서 최근 국내 주요 게임사들은 게임은 물론 영화, 드라마, 웹툰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슈퍼 IP’ 확보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콘텐츠 산업 경계가 무너져버린 시대엔 게임만 만드는 게임사는 생존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업계 관계자는 “디즈니 사례에서 볼 수 있듯 IP 하나만으로 캐릭터, 브랜드, 콘텐츠 등 무한한 확장이 가능한 ‘원 소스 멀티 유즈’는 불확실한 경기 상황 속에서 수익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게임사들에게 매력적인 전략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슈퍼 IP 확보 위해 엔터테인먼트로 진출하는 게임사들

크래프톤은 ‘배틀그라운드’ 세계관을 여러 미디어로 확장하고 있다. ©크래프톤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회사는 넥슨이다. 넥슨은 지난해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인 AGBO에 5억 달러를 투자해 단일 투자자 기준 최대 주주에 올랐다. AGBO는 마블 영화를 연출한 앤서니·조 루소 형제 주도로 설립된 영화 제작사다. 루소 형제는 <어벤져스>, <캡틴 아메리카> 등 마블 최고 흥행작을 연출한 할리우드의 거물이다. 양사는 넥슨의 IP를 영화·TV 시리즈로 제작하고 외부 IP를 게임으로 이식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논의 중이다. AGBO가 넥슨의 게임 타이틀을 활용해 시작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영화나 TV 시리즈 제작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또 넥슨은 ‘던전앤파이터’, ‘바람의나라’, ‘카트라이더’, ‘메이플스토리’ 등 게임 IP를 다수 보유하고 있어 AGBO 작품을 기반으로 게임과 메타버스 사업을 확장하는 길도 열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2020년부터 넥슨은 ‘글로벌 엔터테인먼트사’로의 체질 전환에 나섰다. ‘필름&텔레비전’이라는 조직을 미국에 신설했고 디즈니 출신 최고 전문가들도 영입했다. ‘킬러 IP’ 확보를 위해선 미국 완구 회사 해즈브로와 ‘건담’, ‘파워레인저’, ‘드래곤볼’ IP를 보유한 일본 반다이남코홀딩스 등에 1조 원을 투자했다.

크래프톤은 작년 말 미국 엔터 기술 기업 ‘트리오스코프’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다. 트리오스코프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더 리버레이터> 제작사로 할리우드에 널리 알려져 있다. 업계에서는 크래프톤의 대표 게임 ‘배틀그라운드’의 확장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2017년 출시된 배틀로열 장르 게임 배틀그라운드는 크래프톤의 가장 강력한 IP다. 배틀그라운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게임 중 하나로, PC·콘솔 누적 판매량이 7500만 장에 달한다.

‘리그오브레전드’ IP 기반 애니메이션 <아케인>은 넷플릭스를 통해 크게 히트했다.
©라이엇게임즈

‘배틀그라운드 모바일’은 누적 가입자 10억 명 이상을 끌어모았고, 인도 등지에서는 스마트폰 이용자의 40%가 내려받아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크래프톤이 배틀그라운드의 ‘원 히트 원더’ 염려를 씻어내기 위해 꺼내든 카드는 ‘IP 확장’이다. 이미 전 세계에 팬덤을 확보한 배틀그라운드 세계관을 웹툰, 웹소설, 숏필름,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미디어로 확장한다는 구상이다. 크래프톤은 2021년 기업공개를 앞두고 제출한 증권신고서에 비교 대상 기업으로 ‘월트디즈니’, ‘워너뮤직’ 등 세계적인 콘텐츠 기업을 제시했다.

게임 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이전까지 게임사들이 해외 유명 스튜디오에 거액을 투자하고 전 세계 인재를 영입하며 IP 확장을 준비해왔다면, 앞으로는 게임사의 엔터 회사의 전략적 협업과 대형 인수합병이 일어날 가능성이 보인다”고 말했다.

IP 확장에 속도를 높이는 게임사들

이 밖에 라이엇게임즈, 스마일게이트, 컴투스 등도 자체 IP를 활용한 영화, 웹툰, 애니메이션 등 IP 확장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컴투스는 2021년부터 다양한 콘텐츠 제작사를 인수해 자회사로 편입하며 게임을 넘어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변신을 도모하고 있다. 컴투스는 모바일게임 ‘서머너즈 워’ IP 기반 코믹스 시리즈를 미국 시장에 내놨다. 실제로 게임 IP가 2차 콘텐츠로 제작돼 흥행에 성공한 사례도 여럿 나왔다. 최근 슈퍼 마리오 IP를 활용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초반 흥행에 성공했다.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의 플레이스테이션 IP인 ‘더 라스트 오브 어스’를 활용해 제작된 드라마는 올해 1월 HBO 맥스에 공개돼 1000만 시청자를 돌파하며 메가 히트에 성공했다.

이에 앞서 라이엇게임즈는 2021년 리그오브레전드 IP 기반 장편 애니메이션 ‘아케인’을 내놨는데, 넷플릭스 인기 콘텐츠 세계 1위에 오를 정도로 흥행했다. 스마일게이트는 2020년 슈팅게임 크로스파이어를 기반으로 한 중국 드라마
<촨웨훠셴>을 제작해 웨이보 드라마 인기 순위 1위에 오르는 등 ‘대박’을 쳤다.

일부 게임사들은 일본 애니메이션과 협업을 통해 새로운 게임 팬덤 창출에 나섰다. 상대적으로 충성도가 높은 애니메이션 팬층을 신규 게임 이용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다. 국내 게임사 시프트업은 회사의 인기 서브컬처 게임 ‘니케’를 활용해 일본 애니메이션 <체인소맨>과 협업을 진행했다. 이를 위해 맵을 새롭게 만들고, 체인소맨 인기 캐릭터인 ‘마카마’의 신규 스킨을 업데이트하는 등 콘텐츠를 추가한 것이다. 컴투스는 ‘원펀맨’과의 협업 업데이트를 실시하면서 이용자들이 게임 속에서 애니메이션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하이브는 자사의 IP 파워와 게임 사업의 시너지를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Shutterstock

엔터 회사가 게임 산업에 진출하는 이유 역시 IP

반대로 대형 엔터 회사가 게임 산업에 진출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게임시장 참전’을 선언한 하이브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지난해 지스타에서 “종합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영위하는 회사의 의장 관점에서 게임은 엔터테인먼트와 관련한 모든 요소들이 함축된, 대단히 매력적인 콘텐츠”라고 설명했다. 세계적인 종합 엔터 회사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핵심 수익 모델과 IP 창출원으로 게임 사업이 필수적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방 의장은 “고객의 시간을 가치 있게 점유하는 것이 플랫폼 기업의 숙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게임 사업을 통해 고객들에게 더욱 새롭고 즐거우며, 다채로운 시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하이브의 게임 사업 진출은 게임사들에게도 자극제가 됐다. 게임 사업이 엔터테인먼트 사업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하이브가 가진 IP 파워와 게임 사업이 창출할 수 있는 시너지가 충분하다는 평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게임, 엔터 등 한국 토종 콘텐츠 기업들이 킬러 IP를 적극 발굴해 글로벌 시장 진출을 타진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체적이다. 이 같은 전략이 성공한다면, 경기 침체가 우려되는 한국 경제에도 상당한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온다. 기업들의 ‘슈퍼 IP’ 선점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IP를 활용한 커머스 시장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강력한 IP 하나만으로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출판, 캐릭터 상품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수익 창출을 극대화할 수 있고, 별도의 마케팅 비용 지불 없이도 브랜드 광고 효과까지 얻을 수 있어 ‘IP 커머스’에 콘텐츠 회사들이 주목하는 모양새다. 결국 게임-콘텐츠-커머스로 연결되는 강력한 IP 밸류체인을 먼저 만드는 회사가 ‘시간 점유’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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