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은 이제 ‘빌보드 차트 인’도 익숙해진 K-팝의 성공 요인 중 하나다. K-팝에서는 장르, 작곡가, 마케팅, 시각 요소, 팬이 한 데 모여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융합의 힘으로 세계를 사로잡은 K-팝은 이제 그 용광로에 ‘윤리’까지 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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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걸그룹 피프티피프티가 빌보드 ‘핫100’에서 기록적인 성적을 보이고 있다. 흥미로운 일이다. 어느새 우리는 K-팝 아티스트가 빌보드의 주요 차트에 몇 위까지 올랐는지, 몇 주 연속 올라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같은 성적을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며 의미를 찾는 게 당연한 세계이긴 하지만, 웬만큼 규모 있는 K-팝 아티스트라면 빌보드 진입 정도는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시대다. 빌보드가 그 자체로 꿈의 이름이었던 시대도 불과 몇 년 전인데 말이다.
“이 중에 네 취향이 한 명은 있겠지”라는 말이 있다. 2000년대 후반, 한동안 드물었던 아이돌이 대거 데뷔하고 인원수도 많아지는 현상을 비꼬기 위해 쓰이던 표현이다. 실은 K-팝만이 아니라 앞선 시대 영미권 보이밴드, 걸그룹 시대부터 이런 개념은 존재했다. 아이돌 그룹은 누구든 멤버 한 명쯤은 좋아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다만 인원이 많을수록 시선도 분산되기에, 무턱대고 늘릴 수는 없다. 다양한 취향에 소구하는 멤버들을 적정 인원으로 구성해 조합하는 일. 그것은 K-팝이 오랜 시간 집단적으로 실험하며 얻어낸 ‘원천 기술’의 하나라고 해도 좋겠다.
비슷한 말로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도 있다. K-팝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K-팝이 지금처럼 큰 파급력을 갖게 된 데는, 흔히 음악 외적 요소로 간주하는 다양한 작업이 큰 역할을 했다. 멤버들의 준수한 외모는 물론, 의상과 메이크업, 안무, 뮤직비디오 등 주로 시각적인 요소들이다. 음원보다는 영상 포맷으로 감상할 때 더 큰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 K-팝의 마법이다. K-팝의 급격한 성장이 2006년 구글이 인수한 유튜브의 성공과 겹치는 타임라인을 그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높은 유튜브 조회수에 이은 빌보드 진입. 싸이는 ‘강남스타일’로 K-팝 성공 공식을 세웠다. ©officialpsy
그러나 K-팝을 영상 콘텐츠로 규정해 ‘보는 음악’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건 조금 성급한 일이다. K-팝은 그보다 더 큰 용광로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 K-팝에는 ‘서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로 대두됐다. 흔히 ‘세계관’이라고 하면 특이한 캐릭터 설정 등을 떠올리지만, 이 전략의 핵심은 일정한 스토리를 설정하고 신곡을 낼 때마다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는 데 있다. 서사에 의해 음악과 뮤직비디오의 내용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세계관은 K-팝 콘텐츠의 부차적인 요소나 마케팅 수단에 머물지 않는다. 음악과 시각요소를 아우르는 종합예술로서의 K-팝에 더해진 또 하나의 차원이다.
거기에, K-팝 콘텐츠를 완성하는 마지막 한 겹은 바로 팬덤이다. 팬덤은 소비자이자 서포터이며 공개방송에서 ‘응원법’을 함께 외치며 K-팝 콘텐츠를 완성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세계 시장에서 K-팝이 성장하면서 해외 팬들도 한국의 팬 문화를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BTS 이후 K-팝에 관한 세계인의 관심 중 일부는 ‘K-팝이 무엇이기에 팬들이 이토록 활발하게 움직이는가’ 하는 호기심이기도 하다. K-팝을 처음 접한 이들에게 기존 팬들이 투표나 스트리밍 등 일련의 ‘총공’ 행위에 동참하기를 권하고, 이를 통해 그가 K-팝에 빠져들고 팬덤의 일원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지금 K-팝은, 적어도 ‘K-팝 현상’은 음원으로 압축되는 음악 콘텐츠를 넘어서 팬덤 활동을 하는 것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하나의 ‘종합적 경험’이 되었다.
팬덤은 K-팝 콘텐츠를 완성하는 요인이다. ©Shutterstock
음악적으로도 K-팝은 용광로 그 자체다. 힙합, 록, 일렉트로닉, R&B, 발라드는 물론이고 1990년대 레트로에서 최신 하위 장르까지 닥치는 대로 가져와 때론 매끄럽게, 때론 과격하게 이어 붙인다. 그것에 최적화된 작법은 이른바 ‘송캠프’다. 여러 명의 작곡가가 모여 하나의 곡을 작업하는 이 방식은, 서로 다른 배경과 스타일을 가진 작곡가들이 예상치 못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게 했다. 송캠프 자체는 1960년대 모타운 레코드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있는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K-팝과의 만남이 더 각별한 것은, K-팝이 장르의 벽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 대중음악 시장의 변방에 위치해, 영미권에서 발아한 장르 음악을 수입하고 변형하는 입장에 있었다. ‘쓸 만하다’ 싶으면 맥락을 해체하고 끌어와 자유롭게 활용해버리는 혼종이다. 그리고 송캠프는 ‘더 좋은’, ‘더 신선한’ 곡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가져오는 여러 장르의 맥락과 규칙을 저버리고 조합하며 융화하는 데 특별한 힘을 발휘한다.
앨범을 만들 때도 환경을 염두에 두는 등 이제 K-팝은 윤리에도 진심이다. ©Shutterstock
일각에서는 K-팝의 미학을 ‘근본 없음’이라 말하기도 한다. 공격적인 어감이지만 정확히 짚어내는 부분도 있는 표현이다. 팔린다면, 좋은 것이라면, 써먹을 만하다면 뭐든 가져온다. ‘음악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명분은 거의 작용하지 않는다. 매우 많은 요소를 혼종적으로 융합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한국 시장이 아이돌에 쏠리면서 발생한 과도하게 치열한 경쟁 역시, 이 모든 요소에 더욱 완벽을 기하게 했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완벽하게 ‘준비해 보는’ 식이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결실을 거두기 시작한 것이 2010년 전후 K-팝의 확연한 질적 성장과 세계시장에서의 본격적 반응이었고, 빌보드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오늘의 K-팝의 밑바탕이었다.
이제는 그다음 단계다. 지난 몇 년, K-팝에는 타자의 문화적 요소를 함부로 사용하는 데 따른 이른바 문화적 전유 논란이 수없이 일어났다. 세계시장에 K-팝의 노출이 어마어마하게 커지면서다. 그리고 K-팝도 과거에 비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제 K-팝은 더 이상 이국적 요소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 ‘윤리’는 K-팝에서 중요한 화두임이 분명하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는 팬들의 활발한 피드백 대상이자, 기획사들도 뒤에서 혹은 공공연하게 아티스트에게 ‘교육’하는 내용이다. 환경재앙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앨범 패키징도 플라스틱 배출이 적은 ‘플랫폼 앨범’ 등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K-팝의 음악 작법이 어느 정도 양식화되면서 한 명의 한국인 작곡가도 여러 외국인 작곡가가 송캠프를 통해 만들어내는 곡과 유사하거나 때로 더 나은 효과를 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안 되는 건 없다.’ 이건 K-팝의 무섭고도 멋진 점이다. 그렇다면 명분 없는 용광로의 매력을, 윤리성을 담보하면서 지키고 발전시키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