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의 세대 공감, 따로 또 같이
세대 융합 콘텐츠가 많아지는 이유
글.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예능 프로그램이 세대 공감을 추구한 건 꽤 오래 전부터다. 그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젊은 출연자들이 옛 노래를 리메이크했던 건 단적인 사례. 하지만 최근 들어 시니어 세대 출연자들이 오히려 메인으로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늘고 있는 건 새로운 현상이다.
칠순의 김용건이 게임방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컴퓨터 자체가 생소하다는 김용건에게 게임방은 별천지나 다름없다. 그래서 그 곳에 들어간 김용건은 말 그대로 ‘멘붕’에 빠진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곳에서 게임을 하던 젊은 세대들에게도 김용건의 등장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 처음엔 서로 낯설어 하지만 젊은 세대와 김용건은 의외로 게임을 통해 친해진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젊은 세대들이 나서 가르쳐주고 그게 고마운 김용건은 그들에게 음식을 사준다. 결국 게임방에 가서 우동 한 그릇 먹고 나와 “거기 음식 괜찮네”라고 한 것이 그 날의 체험이 되었지만, 그래도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젊은 세대들과 그렇게 어우러질 수 있었고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MBN <오늘도 배우다>
출처 : MBN Entertainment이 게임방 풍경은 MBN <오늘도 배우다>의 첫 회가 보여준 장면이다. <오늘도 배우다>라는 프로그램은 제목에 중의적 의미가 담겨있다. 여기 출연하는 이들이 배우들이라는 것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무언가를 배운다는 의미다. 그런데 배우들은 도대체 뭘 배운다는 것일까. 그건 여기 등장하는 배우들의 면면을 보면 이해가 된다. 김용건을 위시해 박정수, 이미숙 같은 시니어 세대가 중심이고 이들과 젊은 세대의 중간지대를 엮어주는 정영주, 남상미가 출연한다. 즉 이들은 지금 젊은 세대들이 하는 것들을 체험하고 배우는 과정을 보여준다. 박정수는 첫 회에 VR게임장을 체험하고 이미숙은 젊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종로 익선동 골목을 찾아간다. 정영주는 젊은 세대들이 갖는 영어 모임에 참여하고, 남상미는 코인 노래방이라는 걸 처음 찾아가 혼자 부르는 노래에 심취한다.
<오늘도 배우다>의 관전 포인트는 시니어 세대의 젊은 세대 체험이다. 본래 예능 프로그램이 종종 시도하던 미션이나 역할 바꾸기 같은 방식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대 체험이 갖는 프로그램에서의 중요한 포인트는 폭넓은 세대의 시청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익숙한 일상 속으로 시니어 세대가 들어와 낯설어하는 그 광경 자체가 웃음을 주고, 시니어 세대에게는 일종의 대리 체험의 기회가 되어준다. 그러니 두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예능 프로그램의 세대 공감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방송 프로그램들이 시도했던 것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디션 형식의 음악 프로그램이다. Mnet <슈퍼스타K>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20대의 젊은 출연자가 이문세나 조용필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중요한 관전 포인트로 제공한 바 있다. KBS <불후의 명곡>이나 MBC <나는 가수다> 같은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레전드 음악을 소환해 젊은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하는 과정에서 젊은 세대와 시니어 세대의 공유지점이 만들어진다.
<남자의 자격> 같은 프로그램은 중년 아저씨들을 출연시켜 그들의 감성과 일상을 전하면서 동시에 젊은 세대의 일상에 도전하는 아이템들을 자주 선보인 바 있다. 중년 세대와 젊은 세대를 아우르려는 의도였다. tvN <꽃보다 할배>는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으로 시작해 시즌을 거듭했고 최근에는 김용건을 막내로 들이면서 역시 신구 세대를 통합하는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은 칠순을 넘긴 실버 세대지만 이들의 경륜이 더해진 배낭여행은 젊은 세대에게도 재미와 의미를 줄만큼 흥미진진했다. 몸은 나이 들었지만 여행지에서 발견하는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라는 그 지점은 시니어 세대와 청춘을 이어주는 중요한 고리가 됐다.
최근 정규편성되어 방영됐던 tvN <나이거참> 같은 경우는 여러 어르신들이 출연해 10대 어린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변희봉이 어린이와 함께 영어 수업을 듣고, 전원책이 어린이에게 역사 교육의 현장을 함께 여행하며 나누는 교감은 그 큰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통하는 지점의 흥미로움을 전했다. 아이들과 게임을 하며 아이 같아지는 어르신들과, 의외로 의젓한 모습을 보여 어르신들도 놀라게 되는 아이들의 세계의 교차점이 이 프로그램의 매력이었던 것. 역시 중의적 의미를 담은 제목처럼 나이차가 주는 당혹감과 더불어 나이가 무색해지는 순간을 동시에 포착한 예능 프로그램이다.
KBS <해피선데이 - 남자의 자격>
출처 : YouTubetvN <나이거참>
출처 : tvN YouTubetvN <꽃보다 할배>
출처 : TVING예능 프로그램들이 이렇게 최근 20여 년에 걸쳐 세대 공감을 추구하게 됐는가는 미디어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즉 80년대까지만 해도 주력 미디어로 자리했던 TV가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점점 인터넷으로 그 자리를 내주고 최근 들어서는 모바일로 넘어가고 있는 이 과정 속에서 TV 본방송은 시니어 세대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렸다. 젊은 세대들이 TV 본방송이 아닌 IPTV이나 인터넷 다운로드 같은 방식으로 방송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하면서 이 서로 다른 세대를 아우르는 아이템만이 경쟁력을 갖게 됐다. 즉 예능의 미래는 주 시청층을 이룰 젊은 세대가 그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당장의 예능 프로그램의 성패는 본방송 시청률을 좌지우지하는 시니어 세대가 쥐고 있기 때문에 이 과도기에 양 세대를 끌어안는 아이템만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인터넷을 90년대부터 경험한 중년 세대들이 과거의 시니어 세대들과는 달리 젊은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경향도 세대 통합 콘텐츠가 많아지게 된 중요한 이유다. 예를 들어 <꽃보다 할배>의 막내로 출연한 김용건의 경우, 칠순이지만 다른 형님들과 함께 할 때 귀여운 막내 역할을 하는 모습을 통해 그 세대에서도 충분히 젊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또 시니어 세대라면 먼저 트로트만 떠올리지만 그것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JTBC <힙합의 민족>이라는 예능 프로그램도 시도되었다. 김영옥이나 양희경, 이용녀 같은 어르신들이 하는 힙합은 젊은 세대들도 빠져들게 만드는 놀라운 매력을 선사한 바 있다. 이런 젊은 실버 세대의 출연은 나이를 그저 수치에 불과한 어떤 것으로 여기게 해주며, 이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즉 젊어도 훨씬 더 나이 많은 이들처럼 살아갈 수도 있고, 나이 들었어도 훨씬 젊게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
JTBC <힙합의 민족>
출처 : JTBC JOINS 페이지최근 실버 세대 유튜버들이 스타로 등극하고 있는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대 통합적 콘텐츠 시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세계적인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된 박막례 할머니는 그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코리아 그랜마(Korea Grandma)로 알려진 박막례 할머니는 50년 이상 다양한 일을 하며 2남 1녀를 키운 그 경륜에서 나오는 유쾌함을 유튜브를 통해 담으면서 화제를 모았다. 손녀딸이 치매 예방을 목적으로 시작한 유튜브였지만, 그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2017년에는 잡지 <보그>에도 소개되었고, 2018년, 2019년에는 구글의 초청을 받아 구글 I/O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2019년에는 유튜브 CEO인 수전 워치츠키(Susan Wojcicki)가 그녀를 만나러 내한하기도 했다. 박막례 할머니의 영상은 온전히 손녀딸이 기획, 촬영, 편집해내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은 그 특성상 늘 새로운 출연자와 새로운 상황을 찾으려는 욕망이 있다. 그래서 일상의 변화를 한 발 빨리 포착해내 미션으로 실험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남성육아나 tvN <집밥 백선생>의 요리하는 남자 같은 시도가 이제 성 역할 고정관념을 탈피하려는 현재보다 훨씬 이전에 시도된 건 그래서다. 마찬가지로 세대 통합 콘텐츠들은 나이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미리 보여주는 면이 있다. 젊음을 추구하려는 실버 세대의 면면이나, 젊은 세대와 소통하려는 실버 세대의 노력을 보여주는 콘텐츠들, 나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이 만드는 영상에 담아 전하려는 실버 세대 유튜버들의 도전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사회의 나이 풍경을 가늠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