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프로그램 편성 변화의 특징과 배경
글. 김유정 (MBC 전문연구위원)
사회의 트렌드를 반영한 새롭고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장르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의 편성에도 변화가 시도되는데, 방송사들의 예능 프로그램의 편성 전략에는 어떤 뜻이 숨어있을까?
가히 예능의 전성시대라 부를 만하다. 시대의 흐름, 세대별 관심과 취향을 꿰뚫는 새로운 소재와 포맷을 통해 사람들에게 신선하면서도 익숙한 재미를 주는 예능 프로그램이 쏟아지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시청자들의 예능에 대한 선호도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집이 필요한 시청자에게 꼭 맞는 집을 찾아주는 MBC <구해줘! 홈즈>, 전통 트로트에 서버이벌 포맷을 접목시킨 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 조직 내부의 상하관계와 소통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KBS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나 tvN <문제적 보스>, 유튜브 크리에이터에 도전하는 왕년의 인기 배우 모습을 그린 KBS <덕화TV>, 칠순의 할머니들과 손주뻘 아이돌이 ‘배움’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소통하는 모습을 담은 MBC <가시나들>, 그리고 새로운 장소에서 음식과 요리라는 익숙한 소재로 다양한 사람들의 그리고 새로운 음식과의 조우가 빚어내는 다양한 색깔을 다룬 tvN <커피프렌즈>, <스페인하숙> 외에도 우리 사회의 주요 트렌드를 새로운 키워드와 지속적으로 접합시키고 변주함으로써 낯섦과 익숙함이 조화된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키는 예능의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MBC <구해줘! 홈즈>
출처 : MBC 홈페이지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
출처 : TV조선 홈페이지KBS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출처 : KBS 홈페이지tvN <문제적 보스>
출처 : tvN 홈페이지예능 프로그램의 진화는 비단 소재와 스토리, 포맷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상반기, 프로그램의 기획, 배치, 그리고 구성이라는 의미의 편성 실험도 계속되었다. 시즌제가 대표적인데 역사라는 아이템으로 여행 프로그램을 매력을 새로이 발굴해낸 MBC <선을 넘는 녀석들>, 인터넷 방송과 TV 방송을 접목시킨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사회 유명 인사들과의 대담을 예능으로 풀어낸 KBS <대화의 희열> 모두 시즌제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이 밖에도 tvN <강식당>, <대탈출>, Mnet <프로듀스 101>, <고등래퍼>, TV조선 <우리가 잊고 지냈던 두 번째: 연애의 맛> 등 시즌제 예능 프로그램은 익숙한 제목과 포맷으로 시청자들에게 예측 가능한 수준의 재미를 예고하고 출연진이나 소재, 스토리의 변화로 새로움을 선사한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
출처 : MBC 홈페이지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출처 : MBC 홈페이지KBS <대화의 희열>
출처 : KBS 홈페이지tvN <강식당>
출처 : tvN 홈페이지한편, 본방송 위주의 편성 전략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재방송이 예능 편성에서의 중요한 전략적 장치로 부상하는 것인데, 이른바 ‘재방의 재발견’이다. 방송사에게 재방송 편성은 추가 광고 수익 확보를 위해 다음 유통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인기 프로그램의 일부를 일정한 (재방송용) 슬롯에 배치하는 행위를 의미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규 프로그램 라인업에 문제가 생긴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핵심 시간대에 재방송 프로그램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주말 저녁 시간대는 예로부터 방송사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들이 격전을 벌이는 시간으로 유명했지만 이 시간대조차도 재방송 편성이 ‘가능한’ 시간대로 분류된 지 오래다. 주중에 방송된 인기 예능을 다시 편성해도 시청률이나 시청자들의 반응도 과히 나쁘지 않은 것을 보면 ‘새로 제작된 본방송 프로그램인지’보다는 ‘정말 확실하게 재미를 보장하는지’가 시청 여부를, 프로그램 선택을 결정하는 보다 중요한 기준임을 알 수 있다.
재방송 프로그램의 범주도 넓어지고 있다. MBC는 자회사인 MBC every1에서 제작한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정규 편성했는데, 케이블인 MBC every1 채널에서 목요일 밤 10시 10분 본방송을 내보낸 후 이튿날 금요일 밤 8시 30분에 지상파 채널에서 재방송을 내보내는 것이다. 지상파 본방송, 자사 계열 케이블 채널 재방송 순으로 이어지는 유통의 단계가 뒤바뀐 사례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역전이 처음은 아니다. 2017년에도 MBC every1에서 제작한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를 지상파에서 재방송 편성한 적이 있지만 당시는 파업으로 프로그램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시기였던 반면, 이번 재방송 편성은 보다 적극적인 재방송 활용전략의 의미가 크다. 경쟁력 있는 핵심 콘텐츠의 확보를 위해서라면 지상파-케이블 채널의 구분도, 순서도 개의치 않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MBC every1 <세빌리아의 이발사>
출처 : MBC PLUS 홈페이지마지막으로 예능 프로그램의 분할 편성 전략이다. SBS는 지난 4월부터 그동안 1부와 2부로 나누어 방송하던 <미운 우리 새끼>를 40분씩 3부로 나누어 방송하는 실험을 시작하였다. 전체 120분 길이의 프로그램을 60분씩 2부로 나누던 기존 방식보다 3부 편성이 시청자들의 짧아진 시청 호흡과 패턴에 더 부합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추가 광고 수익 확보 가능성에 대한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광고 수익의 급감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상파 방송사업자로서는 시청률 높은 인기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의 광고 노출을 늘리고 광고 판매를 늘리기 위한 고민을 멈출 수 없다. 도입 당시의 갑론을박에도 불구하고 예능 프로그램의 분할 편성 전략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SBS <미운 우리 새끼>
출처 : SBS 홈페이지이처럼 최근 ‘파격 편성’이라 부를만한 뉴스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는 사실 예능 프로그램에 국한된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뉴스 대부분이 지상파 방송 발(發)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올해 지상파 방송사의 편성 변화의 진폭은 더욱 커지는 양상이다.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신규 사업자들의 도전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업자들이 ‘편성’을 혁신 전략의 일부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편성 변화의 대상이 확대되고 있다. MBC는 지난 3월 저녁 메인 뉴스인 <뉴스데스크>의 시작 시간을 7시 30분으로 옮기는 개편을 단행했다. 저녁 시간대 편성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저녁 메인 뉴스의 시작 시간을 30분 앞당긴 것으로 정시 시작이라는 명분보다 시청자들의 변화하는 생활 패턴에 맞추어 ‘가장 빠른’ 저녁 종합 뉴스라는 실리를 택한 것이다. 이는 주말 핵심 시간대에 간간히 시도되던 편성 실험이 주중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방송사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저녁 메인 뉴스도 편성 변경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확인시킨 계기였다.
MBC 금요일 편성표
출처 : MBC 페이지SBS 화요일 편성표
출처 : SBS 페이지또한 ‘○○ 장르는 △△시’라는 철칙이 무너지고 있다. 방송사들은 평일 저녁 8시 뉴스, 9시 생활교양, 10시 드라마, 11시 예능이라는 고정적 편성 원칙을 과감히 버리는 모습이다. MBC는 <뉴스데스크>의 시간대 변경에 이어 월화 드라마, 수목 미니시리즈의 방송 시간대를 모두 저녁 9시로 옮기고, 10시대에 교양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SBS도 올여름 한정이라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월화 드라마 방영 시간대인 저녁 10시에 예능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변화된 일상 흐름의 반복이 시청자들의 생활 시간대 변화로 이어지고 방송사는 이러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방송 시간대 변화로 대응하는 것이다.
실제로 주 52시간 근로제의 도입 이후 일반 시민의 생활패턴 변화는 각종 조사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한국 미디어 패널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저녁 6~7시대 자신의 주거 공간에 있었다는 응답 비율이 2017년 54.45%에서 58.29%로 늘었으며 저녁 7~8시대 그 비율은 74.87%에서 78.41%로 늘었다(정보통신정책연구원, 2018). 주거 공간으로의 진입 시간대가 빨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저녁 시간대 일상 흐름이 예전보다 앞당겨지거나 혹은 다시 재구성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방송사들이 시도하는 다양하면서도 혁신적인 편성 전략 속에서 예능 프로그램은 매우 중요한 카드로 각광받고 있다. 경쟁력 있는 드라마 한 편으로 높은 시청률과 광고 수익을 올리고 채널 이미지를 견인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반면, 예능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의 미디어 이용 패턴에 잘 부합할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낮은 제작비로 안정적인 수익 창출이 가능한 장르임을 입증해내고 있다. 예전부터 예능 프로그램은 드라마와 달리 수명이 길었고 따라서 장수 프로그램도 많은 편이었다. 일단 하나의 포맷이 구성되어 인지도와 호응을 얻기 시작하면 방송사에게 안정적인 시청률과 수익을 보장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예능의 이러한 특징은 지금의 미디어 환경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요즘의 시청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과 주목(attention)이라는 자원(resource)을 소비함에 있어 큰 위험을 감수하길 원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상당한 시간과 집중력을 투여해야 하는 드라마 시청을 감행하기보다는 만족도 수준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고, 짧게 끊어서 볼 수 있으며 시청 만족도의 격차가 크지 않은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선호도가 점점 높아지는 이유인 것이다. 실제로 ‘나에게 얼마나 큰 재미를 줄 것인지’에 대한 예측이 어려운 신규 프로그램보다는 소소한 재미는 얻을 수 있는 예능 재방송을 보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음은 여러 시청 데이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격화되는 경쟁 속에서 천정부지로 치솟는 제작비와 저조한 시청률이 반복되는 드라마 편성을 줄이는 것은 방송사들로서는 당연한 선택이 되어가고, 이렇게 비어가는 슬롯의 상당 부분은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에, 짧은 기간 내에 완성할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채워지고 있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은 이처럼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사의 편성 전략에서 갖는 가치도 함께 변화시키고 있다. 편성 전략의 핵심 요소이자 슬롯 운용을 돕는 주요 카드로 자리매김한 예능 프로그램의 진화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