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미스트롯>과 <불타는 청춘>:
중장년층, 비주류에서 주류로
글. 이민아 (조선비즈 이코노미조선 기자)
콘텐츠의 주요 타겟층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중장년층의 눈길을 받는 두 프로그램이 있다. 역대 종편 예능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의 우승자는 트로트 스타가 되었고, SBS 장수 프로그램 <불타는 청춘>은 젊은 세대까지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 프로그램들이 일으킨 돌풍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지난 5월 5일 서울 잠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내일은 미스트롯 효 콘서트’를 찾았다. 콘서트 시작 1시간 전인 오후 4시부터 공연장 근처는 이곳을 찾은 차량으로 교통이 마비됐다. 4시 30분, 가까스로 공연장 앞에 도착하니 관객들이 한 손에 티켓을 꼭 쥐고 뙤약볕 아래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게는 40대, 많게는 80대로 보이는 어르신들이었다. 이들의 뒤를 따라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2층에서 내려다 본 관객석은 인파로 빈틈없이 빼곡했다. 흡사 인기 아이돌 가수의 콘서트장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날 7,000석의 자리가 매진됐다고 한다.
‘내일은 미스트롯 효 콘서트’에는 지난 2월부터 3개월간 TV조선에서 방영된 <내일은 미스트롯(이하 미스트롯)>이라는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1~12위를 차지한 12명의 본선 진출 참가자들이 출연했다. <미스트롯> 우승자 ‘송가인’ 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무명 가수에서 이곳저곳에서 러브콜을 받는 트로트 스타로 거듭났다. <미스트롯>의 최고 시청률은 18.1%로, TV조선 자체 최고 시청률뿐 아니라 역대 종편 예능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한 방송 관계자는 <미스트롯>의 이 같은 시청률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종편 예능의 시청률은 그간 아무리 높아봐야 한자리 수를 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미스트롯> 흥행 성공 비결로는 음악 예능의 ‘비주류’ 장르 트로트를 소재로 한 신선함이 꼽힌다. 이를 통해 이미 레드오션이었던 오디션 예능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그간 오디션 예능에서 주류로 다뤄진 음악 장르는 아이돌 댄스, 힙합, 발라드, R&B 등이었다. 기존 방송 콘텐츠 제작의 주요 타깃은 20·30대 젊은층이었고, 이들이 즐기는 음악 장르를 다뤄야 프로그램 성공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Mnet <슈퍼스타K>로 시작된 음악 오디션 예능 열풍에서 중장년층은 참가자로서도, 시청자로서도 소외돼 있었다. 반면 <미스트롯>은 중장년층을 ‘주요 시청자’로 상정해 이들이 선호하는 트로트를 다뤘고, 제대로 먹혀들었다.
SBS의 5년차 장수 프로그램인 <불타는 청춘>도 중장년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불타는 청춘>은 싱글인 중년 출연자들이 여행지에서 만나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은 관찰 예능이다. 주로 1980~90년대에 인기를 누렸던 하이틴 스타, 또는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년 연예인들이 출연한다. 중장년층 시청자들이 10~30대였던 시절 인기를 누려 친근하거나,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는 동년배 연예인들이 프로그램의 중심이다. 최근엔 여러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잔뼈가 굵은 송은이나 홍석천 등을 투입하면서, 젊은 세대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좌) TV조선 <내일은 미스트롯> / (우) SBS <불타는 청춘>
출처 : YouTube 캡쳐이들 프로그램이 화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에도 중장년층에 친숙한 소재로 제작된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하지만, ‘돌풍’이라고 부를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우선 미스트롯의 경우만 봐도, 국내 방송 역사상 최초의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은 아니다. 이미 2014년 Mnet이 <트로트 엑스>라는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최고 시청률은 3%대에 그쳤다.
<미스트롯>과 <불타는 청춘>의 흥행 성공 비결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장년을 공략하면서도 기존과는 다른 관점으로 ‘역(逆)포지셔닝’을 한 덕분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역포지셔닝은 마케팅에서 소비자가 특정 서비스·브랜드에 대해 ‘기본’이라고 여기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략이다.
안성아 추계예술대 영상 비즈니스과 교수는 <미스트롯>이 ‘젊은 참가자, 가벼운 오디션’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정관념을 깼다고 분석했다. 우선 중장년층을 겨냥한 콘텐츠지만 참가자들은 10~30대 여성들로 젊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미스트롯 참가자들이 익숙한 트로트 곡에 젊은 감성의 무대 매너, 현란한 댄스, 화려한 패션 등을 덧입힌 것은 ‘보편적인 감성에 새로운 옷을 입히라’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성공 법칙을 제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미스트롯은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심각한 표정의 심사위원단 대신, 참가자의 무대를 함께 즐기는 심사위원단을 꾸렸다. 안 교수는 “참가자의 당락으로 인한 감정적인 무거움을 덜어내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예능의 즐거움을 더했다”면서 “그동안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준 누적된 피로감에 지친 시청자들의 마음을 적절히 잘 읽은 변화”라고 분석했다.
출처 : SBS Naver TV 캡쳐 SBS <불타는 청춘>은 ‘싱글 중장년층들 간의 우정’을 다루는 역포지셔닝을 했다. 출연자들은 프로그램 안에서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며느리·사위라는 역할을 벗어나 순수하게 개인으로서 여행을 즐긴다. ‘부모와 아이로 구성된 정상 가족 신화’와 그 안에서 엄마, 아빠 역할로 존재해 왔던 이 세대에 대한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부숴버린다. 중장년 연예인들은 불타는 청춘 안에서만큼은 마음껏 ‘자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존재가 된다. 여기에 더해 불타는 청춘은 연예인들의 ‘잘나갔던 과거’만을 조명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잘나가던 이들’이 중년에 접어들며 맞이한 새로운 인생의 국면을 보여준다. 과거의 영광 또는 상처로부터 뻗어나가는 ‘인생 2막’에 대처하는 인간적인 면모가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는 분석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를 대표했던 개그맨 김국진과 강수지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실제 부부의 연을 맺으며 재혼한 것은 상징적이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또래 친구들을 만나 여행을 즐기는 서정희의 출연도 찡한 감동을 줬다.
반면 그간 종편에서 방송된 중장년층 타깃 예능은 대부분 결혼, 음식, 건강, 재테크 등 일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주제를 다뤘다. 주로 자녀를 키우는 기혼 남녀가 현실에서 나눌만한 주제를 연예인 패널들이 나와 단체로 각자의 의견을 내는 식이었다. 중년 여성 패널의 남편, 시댁 험담, 중년 남성 패널의 가부장적인 면모가 대표적이다. 이런 모습은 정상 가족 신화에서 비롯된 중장년층에 대한 고루한 고정관념을 그대로 답습하는 데 불과했다.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한 방송 콘텐츠들이 주목받은 이유는 그간 제작되고 유통된 프로그램들이 이 세대의 대중문화에 대한 수요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중장년층과는 달리, 지금의 중장년층은 본인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즐기려는 성향이 더 뚜렷하다. 이는 디지털에 익숙한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유튜브 이용자의 연령대를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모든 연령층을 통틀어 50대 이상이 유튜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앱 분석 서비스 와이즈앱에 따르면 50대 이상이 4월 한 달 동안 유튜브에서 쓴 시간은 101억 분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두 배 늘었다. 10대(89억 분)보다도 많았다. 한 사람이 유튜브에서 보내는 시간도 마찬가지로 많았다. 50대 이상 이용자들의 한 사람당 평균 유튜브 사용 시간은 월 17시간 25분으로, 30대(월 16시간 46분)와 40대(월 13시간)보다 많았다. 콘텐츠에 대한 중장년층의 수요가 명확하게 존재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내일은 미스트롯> 전국투어 콘서트
출처 : YouTube 캡쳐<불타는 청춘> 콘서트
출처 : YouTube 캡쳐이는 <미스트롯>과 <불타는 청춘>의 콘서트가 뜨거운 호응을 얻은 것으로도 입증됐다. 5월 4·5일 이틀 동안 열린 미스트롯 서울 콘서트에서 1만 4,000석(하루 7,000석)의 티켓이 매진됐다. 서울을 시작으로 광주, 천안, 대구, 부산 제주 등 전국에서 7월까지 공연이 예정돼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벌써 티켓이 매진됐다.
지난 3월 30일 열렸던 불타는 청춘 콘서트도 매진을 기록했다. 방송 5주년 기념으로 열렸던 콘서트는 김국진, 강수지 부부가 진행하고 <불타는 청춘>에 출연했던 양수경, 김완선, 김도균, 신효범, 김혜림, 015B, 구본승 등이 나왔다. 이들은 모두 과거 뜨거운 인기를 누렸던 중년 연예인들이었다. 콘서트를 보고 싶다는 시청자 요구가 빗발치면서, SBS는 이례적으로 불타는 청춘 콘서트를 통째로 120분간 방영하기도 했다.
이는 프로그램의 인기를 오프라인으로 이어 수익 창출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방송 산업의 미래’라는 의견도 나온다. 과거 Mnet의 <쇼미더머니>, <고등래퍼> 등 화제가 된 오디션 프로그램이 방송 후 출연진들을 모아 콘서트를 했던 것과 비슷하다. 젊은 세대뿐 아니라 중장년층에서도 오프라인에서의 즐거움을 찾아다니는 수요가 못지않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