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덕분에’ 미디어 환경도 변하면 된다
노동 환경의 변화
글. 김영미(독립PD, 한국독립PD협회 대외협력 위원장)
독립PD들은 촬영 때문에 일 년 중 3분의 1은 해외에서 보낸다. 협회에 큰 행사가 있으면 모든 회원 PD들의 참석이 불가능할 정도다. 방송사에서 제작하는 프로그램의 해외촬영 상당 부분을 독립PD들이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국 금지는 독립PD들에게 생계의 위협을 느끼게 한 초유의 사태였다.
EBS 〈세계테마기행〉
출처 : EBSDocumentary YouTubeEBS 〈다문화 고부 열전〉
출처 : EBSDocumentary YouTube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코로나19발 ‘해외촬영 금지’ 타격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며 가시화되었다. 방송사의 해외촬영 프로그램이 재방송이나 스튜디오 방송으로 대체됐고, 독립PD들은 기약 할 수 없는 강제 휴업 사태를 맞게 됐다. 〈세계 테마기행〉(EBS)이나 〈다문화 고부 열전〉(EBS) 등은 해외 촬영이 있어야 방송이 가능하다. 지상파의 각종 정보프로그램과 해외 다큐멘터리 제작의 상당 부분에서도 독립PD들이 크게 활약한다. 이런 프로그램들의 해외 제작이 단 한 편도 진행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이다. 독립PD협회 회원 PD 모두가 한국에 있을 것이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 했는데, 협회에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사실이었다. 아무도 해외촬영을 못 나가고 있었다. 심지어 국내 촬영도 섭외가 되질 않는다. 촬영은 낯선 사람 여러 명이 몰려와 하는 작업이다. 전 국민이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안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섭외가 되겠는가. 일이 하나 둘 끊기기 시작하며 독립 PD들은 벌어 놓았던 돈으로 당장은 버텼으나 이내 사무실 월세를 내지 못하거나 생활비가 바닥났다.
사회적 거리두기 두 달째부터 대부분의 독립PD들이 일을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다들 이 사태를 어떻게 버텨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독립PD들에게 고용보험이나 실업급여가 있을 리 만무하다. 장기 실업 사태가 지속됨에도 어디 기댈 곳이 없다. 이 때문에 협회 차원에서 정부 각 부처와 플랫폼 회사들을 뛰어 다녔지만 딱히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럼 대출이라도 알아볼까? 국가에서도 코로나19 상황의 긴급함을 인지하고 프리랜서나 독립PD들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시중의 각 은행이 내세우는 대출 상품과 예술인복지재단의 긴급 생활비 대출 등은 모두 계약서가 필요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입국을 못해 방송을 하지 못해서 생활이 어렵다는 증빙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약서는 언감생심이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우리는 계약서를 먼저 제시하지 못한다. 독립PD들은 갑도 을도 아니고 병이다. 방송사에서 제작사에, 다시 제작사에서 독립PD들에게 일을 주는 방식이다. 일하기 전에 계약서를 쓰는 경우는 10% 미만이다.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일을 구하는 독립PD들 대부분은 계약서를 쓰지 못하고 일한다.
없는 계약서를 필수로 내세우는 코로나19 긴급 대출은 우리에게 무용지물이었다. 이 시점에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이번 기회에 방송사와 제작사에게 필수적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게 하는 조치가 있든가 아니면 계약서 없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해결해줄 수 있는 기관이 없다. 독립PD협회가 여기저기 눈물로 읍소하고 다녀도 정부 부처 어디에서도 이 부분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 장기 실업 사태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의 코로나19 사태 대처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뛰어나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해외는 다르다. 미국이나 유럽은 꼭지물을 제작하기 위해 독립PD들이 자주 가는 해외 촬영지인데 코로나19 사망자가 속출한다. 필자가 자주 취재를 가던 중동지역, 아프리카 등 제3세계는 낙후된 의료 시설 탓에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장기간 입국을 금지하는 중이다. 설사 입국이 가능하다 해도 봉쇄령으로 인해 외출조차 힘들다. 앞으로 언제 이들 나라의 입국금지와 봉쇄령이 풀릴지 기약이 없는 상황이다.
코로나19 사태 다섯 달이 넘어가며 아예 전업을 하는 PD들이 생겨났다. 독립PD협회 탈퇴 신청서에 사유를 ‘전업’으로 표시하고 아예 PD일을 접는 회원들이 늘어가고 있다. 사실 우리 독립PD들이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이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그저 방송이 좋아서인 경우가 많다. 돈은 적게 벌어도 국민들에게 정보와 행복을 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방송 생태계의 제일 마지막에서 최선을 다한다. PD들이 전업을 하면 개인적으로는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겠지만, 언제 다시 저임금의 방송계로 돌아올지 모른다. 이렇게 방송 인프라가 빠져 나가면 가뜩이나 불안정한 방송 환경에서 숙련된 인력이 나오질 못한다. 30대 PD들의 경우는 이런 현상이 더 가속화될 것이다. 나중에 방송사가 방송 인력 부족에 허덕이게 되면 그 피해는 양질의 방송을 볼 수 없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현재 코로나19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우리는 막막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어떻게 변해야 할지 고민해보자. 코로나19가 아니었어도 변화하던 미디어 환경이었다. 오히려 지금이 변화를 위한 적기일지도 모른다.
첫 번째는 계약서 문제다. 이런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은 필수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 아무리 계약서를 권고해도 변하지 않던 방송사와 제작사를 설득할 최상의 명분이 된다. 두 번째는 다른 플랫폼을 개척하자는 것이다. TV방송밖에 모르던 PD들이 코로나19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유튜브 등 다른 플랫폼을 알아보고 있다. 기존의 방송사가 아닌 모바일 콘텐츠 중심의 다큐멘터리나 스토리텔링 구조를 고민하고 있다. 이는 코로나19 이전에도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다만 코로나19 때문에 숙제를 풀어야할 시점이 앞당겨졌을 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사람들은 온라인상의 공간에 익숙해졌다. 우리도 온라인에서의 콘텐츠를 더 많이 고민하게 된 계기였다.
이런 고민에 저작권은 필수다. 촬영은 고비용이 드는 작업이다. 그리고 얻어지는 콘텐츠에 대한 저작권이 있으면 여러 방면에 활용이 가능하다. 이익을 더 보고자 하는 활용이 아니라 양질의 콘텐츠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 저작권 확보를 위한 독립PD들의 노력은 계속돼 왔지만 ‘저작권법’은 국회에서 번번이 표류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재난 상황에 대한 대처로라도 저작권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독립PD들에게 저작권이 확보된다면 그 콘텐츠는 재난 상황에도 충분히 생계에 대한 대비가 된다. 또한 그동안 고질적 문제였던 방송환경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방송 인프라에 대한 고민이 덜어질 것이다. 좋은 방송 환경에서 제대로 임금도 받고 일한다면 당연히 실력 있는 PD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고, 그들은 양질의 방송을 제작하여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전 세계적인 재난이다. 다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재난을 방송 환경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으면 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 독립 PD들에게도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이제 수습의 문제이다. 바이러스를 이겨낼 인간의 위대함은 재난에 대한 대처에서 나오지 않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PD들은 제작 현장을 지키며 국민 행복을 위해 방송을 만들기를 소망한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다면, ‘때문에’라며 상황을 탓 할 게 아니라 코로나19 ‘덕분에’ 갖춰질 좋은 미디어 노동 환경에서 신나게 방송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