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적 게임: Wii는 갈 수 없지만 Wii는 갈 것이다
작성자: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 작성일: 2012년 11월 27일
Wii U로 닌텐도(Nintendo)가 정말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일까? 게임 디자이너이자 학자인 이안 보고스트가 <설득적 게임(Persuasive Games)> 최근 호에서 그 답을 찾아본다.
125년 동안 닌텐도는 게임에서 위험과 외설스러운 내용을 없애며 안전한 게임을 만들겠다는 무언의 사명을 위해 헌신했다. 닌텐도는 19세기 말 화투를 만드는 회사로 시작됐다. 대부분의 도박이 다 그러하듯 화투 역시 조직 폭력배가 깊이 연루되어 있었고 일본어로 조직 폭력배를 뜻하는 야쿠자라는 말 역시 화투에서 기원됐다. 1 닌텐도는 일본에서 화투가 합법화되자마자 상점을 열었다. 닌텐도가 만드는 제품은 새로이 정치적 자유를 얻은 일반 대중 사이에서 화투의 구습을 정화시켰지만 도박 및 야쿠자와는 지속적인 관계2를 맺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기업이 설립된 지 70년이 지나서도 닌텐도는 여전히 화투장만 만들고 있었다.
닌텐도는 1950년대 말에서야 드디어 디즈니(Disney)와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카드와 게임 방법 책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로서 기업의 운명이 바뀌었고 다시 한번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을 보급하게 되었다.
1970년대 전자 장난감으로 사업을 다각화한 닌텐도는 일본에 비디오 게임을 수입했다. 주로 마그나복스(Magnavox)와 아타리(Atari)에서 만든 미국 게임이었다. 닌텐도의 첫 번째 비디오 게임제품인 TV게임 6과 TV게임 15는 마그나복스로부터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오디세이(Odyssey) 기술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1981년 닌텐도가 자체 개발한 휴대용 게임과 동전 게임이 출시됐다. 게임 앤 워치(Game & Watch) 시리즈와 <동키콩(Donkey Kong)>이 가장 유명하다.
고맙지만 씁쓸한 구원자
서양의 가정용 게임 상품을 들여와 자체 생산한 것이 닌텐도의 세 번째 도약이었다. 닌텐도는 1983년 게임 산업의 붕괴에 기발한 방법으로 대응하였고 이때 이후 30년의 방향이 잡혔다. 이 방향은 좋은 쪽이랄 수도 있고 나쁜 쪽이랄 수도 있었다.
먼저 닌텐도는 비디오 게임을 장난감 시장으로 되돌려 놓았다. 처음으로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과 함께 제공된 R.O.B.(Robotic Operating Buddy)는 미국 장난감 소매업체의 눈길을 끄는 데 도움이 되었다. 미국 장난감 소매업체 대부분은 83년 게임 산업의 붕괴에 심한 타격을 입어 비디오 게임에 대한 관심을 잃은 상태였다.
둘째로 직접 라이선스를 허가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닌텐도는 현재 당사자 라이선스 모델(first-party licensing model)이라고 하는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또 ‘품질 인장(Seal of Quality)’으로 소매업체와 소비자 모두 제품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제품인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품질 인장 라벨은 제작사가 닌텐도에서 라이선스를 받아야만 사용이 가능했고 닌텐도에서는 직접 라이선스 여부를 선정하고 승인했다. 닌텐도는 또한 소매업체 구매자 간의 영향력에 따라 가격을 설정하고 그 가격에 맞춰 모든 게임을 생산했다. 닌텐도를 이용하는 모두에게 이익이었다.
그 결과 서양의 비디오 게임 소매 시장이 살아났다. 비디오 게임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이든,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든 모두 닌텐도에 고마워할 일이다. 하지만 대가는 있었다. 많은 다양한 쓰임새와 경험이 가능한 급성장 분야였던 게임을 장난감 가게에서 팔리는 아이들 용으로 전락했다.
많은 사람들이 83년 게임 산업 붕괴의 원인을 저질 게임의 양산으로 꼽는다. 아타리 2600의 <팩맨(Pac-Man)>이나 <E.T.> 같은 희생양이 아니라 투기꾼들이 최신 유행에 편승하여 한 몫 잡아보려고 마구 양산한 어처구니 없고 엉망진창인 게임이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정하지 못한, 아니 적어도 완전하지 못한 생각이다. 아타리/인텔리비전(Intellivision) 시대에 끔찍한 게임들이 많았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게임 역시 지난 5년 동안 우리가 다시 돌아보기 시작한 관점에서 보면 다양하고 개성적이었다.
초기 NES 게임의 장르는 지금과 비슷했다. 대부분 스포츠[<10야드 파이트(10-Yard Fight), <익사이트바이크(Ecitebike)>, <골프(Golf)>], 판타지 어드벤처[<슈퍼 마리오 브라더스(Super Mario Bros.)>, <클루 클루 랜드(Clu Clu Land)>, <호건스 앨리(Hogan’s Alley)>] 및 R.O.B.와 호환되도록 만든 퍼즐 게임[<자이로마이트(Gyromite)>, <스택업(Stack-up)>이 주를 이루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83년 게임 산업 붕괴 직전에는 로데오[<스탬피드(Stampede)>], 곡예 비행[<반스토밍(Barnstorming)>], 세금 전략[<탈세자(Tax Avoiders)>], 자위[<비트 뎀 앤드 잇 뎀(Beat’Em & Eat’Em)>], 광고[<쿨에이드 맨(Kool-Aid Man)>]에 심지어는 선정적인 성인 등급 영화를 차용한 게임[<포키스(Porky’s)>]까지 아타리 게임으로 등장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의 게임은 어린이용 게임의 숫자나, 성인용 게임의 숫자나 비슷비슷했다. 쇼핑 센터, 지하 층에 놓인 게임만큼 술집이나 볼링장에 놓인 게임도 많았던 것이다. 비디오 게임은 새로 나왔지만 전혀 어리지 않았다.
아이가 십대가 되다
닌텐도가 비디오 게임을 다시 살려내기 전까지 게임 산업은 오늘날의 개발자나 비평가들이 흔히 처음으로 생각해냈다고 하는 그런 종류의 일반 목적 대중매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개발자나 비평가는 너무 젊어서 이전에 어떠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비디오 게임 산업의 발달에 기여한 구원자로 생각하다. 어린 시적 비디오 게임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을 하게 된 거라는 건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닌텐도의 성공에서도 이와 비슷한 자기 모순적인 면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부터 1985년 사이에 닌텐도는 무명의 라이선스 제공업체에서 지적재산권을 소유한 주요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산[<마리오(Mario)>, <젤다(Zelda)>, <메트로이드(Metroid)> 등]은 여전히 장난감 문화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아이들의 캐릭터이자 아이들의 게임이었고 처음 이러한 것들을 산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자식을 낳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렇게 닌텐도의 명성은 건전하지만 어린이를 위한 것이었다. 수익성은 높지만 해롭지 않아야 했고 인기는 끌었지만 예술은 아니었다.
가족 게임으로의 귀환
NES 이후 30년 동안 비디오 게임 사업은 성숙이라는 가치 면에서 어느 정도 ‘성숙’했다. 1990년대 중반 닌텐도는 보라, 연보라 빛의 슈퍼 닌텐도(Super Nintendo)용으로 <동키콩 컨트리(Donkey Kong Country)>를 출시했다. 한편 1인칭 슈팅 게임과 소니플레이스테이션(Sony PlayStation) 덕분에 비디오 게임은 애들 장난감에서 청소년 오락용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술집이나 1980년대 지하실에 놓인 평균 게임 수와 비슷해진 것이다.
2006년 닌텐도는 마침내 Wii라는 결정적인 야심작을 내놓았다. Wii의 독창적인 물리적 제어 기술과 단순화된 그래픽, 상호작용 모델은 30년 전 잊혀진 아타리 게임과 100년 전 닌텐도 자신의 모습을 재현했다. 바로 온 가족이 함께 해도 좋은 게임이었다.
상호작용 설계라는 면에서 Wii는 플랫폼의 유명한 코드명만큼 그렇게 ‘혁신적’이지 않다. 이전의 아이디어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온 가족 또는 여럿이 모여 함께 할 수 있는 게임으로 생각하고, 한 게임의 길이를 짧게 하고, 하드웨어 가격을 저렴하게 하는 것 등 이런 모든 아이디어는 1970년대 말 아타리의 아이디어였다. 닌텐도 Wii에 비디오 게임이란 디즈니 게임 카드에 화투와 같은 관계다. 그러나 다시 한번 Wii가 이러한 역할을 맡은 유일한 이유는 닌텐도가 20년 전 NES로 어른들을 비디오 게임에 고의적으로 물들게 했기 때문이었다.
※ 자세한 내용은 첨부(PDF)화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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