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uasive Games : 과오에서 미학까지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 가마수트라 등록일(2011. 08. 02)
http://www.gamasutra.com/view/feature/6446/persuasive_games_from_aberrance_.php
지금까지 일부의 사람들은 “역사적인 과오”를 비판함으로써 게임 디자인 방법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과거의 선례를 통해 새롭고 비정상적이며 공유되지 않은 생각에 바탕을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특정한 트렌드를 조성한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첫째, 몇 년 전에, Raph Koster는 싱글 플레이 게임에 대하여 이 주장을 언급하였다. Koster는 “전체 비디오 게임 산업의 역사는 과오로 점철되어 있다. 연결되지 않은 컴퓨터를 가지고 오직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돌연변이 몬스터였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싱글 플레이 게임은 정말 과오이다.”라고 하였다.
둘째, 최근에 Daniel Cook은 내러티브 게임에 관해서 똑 같은 주장을 했다. Cook이 말하기를, “게임을 최상으로 활용하는 것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는 점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내러티브 게임은 역사적으로 비정상적이다. 문화적이고, 친화 그룹을 가지며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멀티플레이어 시스템은 과거와 현재의 트렌드이다.”고 하였다.
변칙적인 변칙
나는 이 디자이너들이 관련된 토팩에 관하여 논쟁을 시작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과오에 관한 논쟁은 그것 하나만으로 창조성에 관한 범주를 만들어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궁금하게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게임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내재되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수 천년의 역사가 잘못되었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기준으로, 무수히 많은 다른 현상들도 역사적인 이례로 간주된다. 역사의 모래시계로 측정할 때 몇 개의 문화적 특성이 진정으로 이례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 의무 교육, 실내 환기, 여성의 투표권, 어린이에 대한 생각과 전기 공급으로 인한 심야노동과 놀이. 그러나 거의 이러한 변화가 역행되고 있다는 것을 애통해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인 이례”라고 이것들을 칭할 뿐 충분히 통탄해 하지 않는다.
여전히, 앞서 들었던 이러한 예는 창의적인 움직임이라기 보다는 문화적인 발전의 파장으로 인해 형성된 물결이라고 인식된다. 예술은 어떠한가? 어떤 예술적인 시행이 역사적으로 이례로 간주될 수 있을까? 제의 실행 대신 재현하는 것, 상업화, 개념론, 추상. 또는 좀더 분명하게, 일반적인 산문시와 특정한 소설은 수천 년의 시에 대한 역사적인 변칙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말, 예술적인 움직임은 기존의 생각에 대한 순전한 적개심 또는 불만족에 의해 동기화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에서 대부분의 성공적인 트렌드는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Koster와 Cook의 입장은 이례적인 보수성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비디오게임은 “진정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고대의 민속 게임에서 우연히 생성된 핵심이다. 이 핵심을 뽑아내고, 수정하고 배치하려는 시도는 착각된 왜곡이다. 대신에, 추론을 계속해 보건데, 우리는 게임의 “본질적인” 특정을 대표화하고 재조명해야만 한다.
탈선과 일탈
과오는 탈선이고, 기형적이며, 이상함이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논의해 보자면, 당시의 행동패턴을 동의하면서도 이상향을 발견한 것을 의미한다 : “백인”이라는 용어 사용이나 다른 인종간의 결혼 금지 같은 행동이 당시의 행동 패턴을 말해 준다.
역사적인 과오에 대한 후보를 꼽아 보는 것은 때로는 현재에 정확히 짚어내기에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 사실에 비추어 추론해야만 한다. 동성애 결혼과 세금 정책과 같은 미국내에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논쟁이 좋은 예가 된다 : 보수 지지자는 모든 것이 현재 지금 그대로가 좋은 방식이라고 하지만, 개혁 지지자는 변화 그 자체가 진보를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수 지지자는 검증되지 않은 탈선을 과오라고 하지만, 개혁 지지자는 전통을 똑같은 방식으로 검증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디오 게임은 전자라기 보다는 후자에 속하는데, 지금 그대로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게임에 있어서, 진보는 기술적인 진보를 의미한다. Nintendo와 Microsoft가 Wii와 Kinect라는 인터페이스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역사적인 과오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전통이라기 보다는 발전이라는 명목을 활용했지만 말이다.
조이스틱과 게임 패드는 수준 이하이고, 직관적이지 못하고, 원초적이어서 반드시 자연스럽고, 직관적이며, 신체적인 인터페이스를 포함하는 도구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이스틱은 과오가 되고, 제스쳐 인터페이스는 진보적인 것이 된다.
우리의 몸을 확장시키는 툴 기반의 인터페이스가 좀더 바람직하다고 쉽게 생각하기 마련인데, 우리가 관습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래서 좀 더 “자연스러운 것”을 당연시 한다. 또는 비슷하게, Wii 리모콘이나 Kinect 센서는 조이스틱보다 훨씬 직관적이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배워야만 하고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집안에 마련해야 한다는 등등의 측면을 고려해 본다면, 분명하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기술적인 진보의 측면에서 이 논쟁은 좀더 쉽게 언급되어 지는데, 역사적인 과오로부터의 논쟁과 실제로 연계되어 있다 : 사실, 이것은 정확하게 반대 방향을 언급한다. 개혁 지지자이자 일탈주이자는 게임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하고, 보수적인 과오주의자는 게임이 과거에 그랬던 것이라고 한다.
보수적 과오주의자에게, 대답은 과거에 있고, 우리는 게임의 완벽한 잠재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디자인의 최상층에 진실을 남겨두어야만 한다. 그리고 일탈주의자에게, 대답은 미래에 있고, 우리는 그 잠재성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하부 구조의 단계에 혁신을 가해야만 한다.
역사적인 과오를 언급한 보수주의자와 기술적인 발전을 호도한 개혁주의자 모두 개별적으로 창의성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둘 다 하나의 진실한 길이 있다고 하였으며, 반대 방향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보수진영은 때로는 겉보기에 양립하고 있는 두 진영을 동시에 구체화 하면서, 야누스적인 시각을 생성하기 위해서 기술적인 진보를 강조하는 개혁진영을 결합하려고 한다. Cook과 Koster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한편으로, 그들은 싱글 플레이어와 내러티브 게임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제시하였다. 이것들이 게임이 “현재 그런 것”이라는 상태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소셜 네트워크와 모바일 디바이스와 같은 하부 구조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알려진 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Facebook은 게임이 다시금 멀티 파티가 되도록 해 주었고, iPhones은 학습자과 되도록 해주었으며, 좀더 체계화 되도록 해 주었다. 우리는 멀티플레이어의 시스템의 보수주의자와 함께 기술적인 진보의 진보주의를 가지게 되었다.
미학
과오냐 진보냐를 떠나서, 대안을 모색해 보자 : 게임과 개발자는 다른 미학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을 창조한다는 것에 대한 컨셉도 다를 뿐 아니라, 구체적인 작업을 생성하고 동기화 하는 스타일과 원칙 또한 다르다.
앞에서 언급했던 역사적인 과오에 대한 불평을 담고 있는 캐릭터를 예로 들어보도록 하자. Heavy Rain을 예로 들고자 하는데, 이것은 비정상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두 가지 모습을 유용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 내러티브와 싱글 플레이.
※ 자세한 내용은 첨부(PDF)화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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