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디자인에는 진실이 없다: 우상화에 대한 논의 (No Truth in Game Desin: An Argument For Idolatry)
제이슨 존슨(Jason Johnson) 가마수트라 등록일(2010. 07. 05)
http://www.gamasutra.com/view/feature/5885/no_truth_in_game_design_an_.php
[저자 Jason Johnson 씨는 게임 디자인에 종교 상징주의를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훨씬 더 쉽게 논의하고 복제될 수 있는 표면적 외관보다는 디자인을 뒷받침하는 필수적인 형식을 이해하라는 요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테트리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테트리스는 순전히 추상적인 개념의 활동이기 때문에, 이 게임이 함축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온갖 종류의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이 게임을 과다 경쟁과 공산주의와 연결시키거나 1987 년의 주식시장 대폭락과 연결시키기도 했다. 뭐 어쨌든 다 좋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는 방식은 바로 해당하는 대상과 그것이 갖는 의미를 연결 짓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필자는 오리온 별자리를 다른 별들의 무리와 구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자는 오리온 자리를 승리의 순간에 곤봉을 치켜드는, 또는 일격을 가하기 위해 곤봉을 치켜드는 사냥꾼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별 의미가 없는 다른 별무리를 바라보면서 오리온에 얽힌 신화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 신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보자면, 오리온의 뛰어난 사냥 실력이 얼마나 위협적이었으면 신이 자이언트 스콜피언을 부추겨 오리온을 죽일 때까지 모든 동물의 생명을 앗아갔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사람들은 상징이라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가졌던 고대 문화 속에서 스파르타인들이 별들을 바라볼 때 단지 거대한 사냥꾼만을 본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인 남획의 위험에 대한 경고를 함께 본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테트리스는 일반적으로 현대적인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테트리스와 80 년대 소련의 정치에 의해 보급된 환경을 구별하는 것은 큰 비약이 아니다. 예술과 창작 매체는 만들어지는 환경의 측면들을 흡수하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 Academy of Sciences 의 휴지통에서 소련의 넝마를 내던지는 알렉세이 파지노프(Alexey Pajitnov)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테트리스 작업 막바지로 갈수록 끊임없이 군대에 돈을 퍼부으라는 공산당의 강요에 의해 혼란스러워했기 때문이다.
테트리스가 시간에 의해 꽤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있음직한 일이다. 결국, 1년 뒤 고르바초프의 당선은 끝내는 탑을 무너트리게 되는 젠가 블록이었다(테트리스의 경우 높이 10).
그러나 아무도 이러한 해석이 신빙성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 청사진이 러시아 정부의 몰락과 관련이 있는 만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규칙을 시작한 사건과 상당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17 년 차르 군주제의 대변동은 보다 직접적인 비교에 도움이 된다. 테트리스의 구조를 귀족 지주의 요구로 지나치게 혹사당하는 가난한 노예들의 사회에 비유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도입함에 따라 철의 장막 체제 하에서 언뜻 볼 수 있었던 평민들과 유사하게, 구 러시아의 노예들은 토지 소유권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맛보게 되었다. 이것은 정확히 귀족 정치가 만든 순간으로, 긴장되지만 다루기 쉬운 상황에서 열광적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숙명적인 테트로미노의 계단으로 테트리스라는 게임을 도약시킨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움직임이었다.
이것은 아주 냉철하면서 기계적인 분석이다. 엘리트의 실패를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승리로 보는 것이 훨씬 덜 염세적일 수 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후 딱 10 년 지나 인기를 얻게 된 프리츠 랑의 선전 걸작인 Metropolis 가 이러한 관점을 취하고 있다. 사회의 거대함이 기계 노동자들의 고통에 의해 지탱되는 반유토피아에 대한 랑의 허풍은 마치 “냉혹한 건축 블록 비디오 퍼즐”과 유사한데, 단 이 경우는 노동자들이 플레이어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 왕이 기계적인 알고리즘과 블록, 방대한 초현대적인 도시에 동력을 공급하라는 요구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귀족과 노예의 단순한 악수로 노동자의 폭동을 진압하면서 테트리스에 내재된 대재앙적 측면을 회피하고 있다. 마치 컴퓨터 화면에서 “플레이어님, 제가 플레이어님이 저를 이길 수 있도록 할게요”라는 문구가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해석을 밀고 나갈 수 있지만, 계속해서 모두 똑같이 타당하지만 마지막 해석의 기본적인 측면과 직접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게임 디자인의 진실”이라는 개념에 필자가 동의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 개념은 가마수트라 기사에서 Scott Brodie 씨가 제안한 것으로 디자이너들이 “인간의 조건에 대해 유용한 어떤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게임 시스템에 규칙들을 통합”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Chris Crawford 의 몇 가지 의견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디자이너가 이를 마음껏 수행하는 동안, 그는 상기 전술된 플레이어에 대한 게임 해석의 통제권한을 포기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프리츠 랑과 같은 선전을 만들고 그 해석이 다양하지 않는 한 말이다. 자신의 고유한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 예술가는 자만의 표시를 피해간다.
오리온 자리를 구성하는 별들의 무리 속에 사냥꾼이 없는 것처럼, 최소한 감춰진 의도의 의미에서 보면 게임에는 진실이 없다. 해석은 단지 자기실현적 상상으로, 모두 타당하면서도 또 타당하지 않다.
어떤 해석이 어떤 예술가의 의도에 매우 근접할 수 있지만, 아무리 해도 음울한 해석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 부족으로 인해 게임 분석에 대한 접근법이 다소 문학적인 방향으로 이동해가고 있는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게임에 논리적인 것과 수학적인 것을 제외하고 명확한 진실이 없다면, 왜 게임을 저술하는 것인가?
오락을 위한 것인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유추를 통해 신념을 지키라고 설득하기 위한 것인가… 우리 스스로 시간/돈/인생을 침몰시키는 습성에 기본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한 것인가…
그러나 이처럼 다소 시시한 동기부여 외에 더 큰 목적이 있다. 오리온 유추를 다시 살펴보면, 해석이 어떻게 당면한 주제에 더 잘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해 주는 프레임워크의 역할을 하는가를 알 수 있다. 별들의 패턴이 별자리로 분류될 때까지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울러, 별자리는 천문학적 지도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유성이나 행성 같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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