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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게임 개발자로 일하기 (The Relocation Game)
폴 하이만(Paul Hyman) 가마수트라 등록일(2010년 5월 10일)
http://www.gamasutra.com/view/feature/4414/the_relocation_game.php
구직이 어려워지면서, 힘들일이 지속되고 있다. 많은 미국인이 시애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레스 같은 국내 게임 개발의 중심지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이 알지 못하고 해외로 기회를 찾아 떠나는 모험심을 가져 보는 방법도 있다.
가령, 마크 쿠크(Mark Cooke)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알 양(Al Yang)은 캘리포티아 남부에서 중국으로 떠났고, 클라우드 랑레이스(Claude Langlais)는 몬트리올 토박이였지만 지금은 싱가폴에 집을 두고 있다. 조나단 김(Jonathan Kim)도 로스엔젤레스에서 몬트리올로 직장을 구해 떠났다.
그들 각각은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결정이 옳은 것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고민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후회했어야 했을 것이다.
마크 쿠크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자랐고 버클리 대학에서 전기 및 컴퓨터 공학 학위를 마치기 전에 루카스아트(LucasArts), 이매진 미디어(Imagine Media) 및 디지털 이클립스(Digital Eclipse ,지금은 파운데이션 9(Foundation 9)의 일부가 됨)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이런 인턴의 경험을 거쳐, 그는 캘리포니아주의 노바토(Novato)에 있는 니힐리스틱 소프트웨어(Nihilistic Software)에 고용되었다. 그는 거기서 3인칭 액션 게임의 프로그램, 디자이너 및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했다.
그러나 쿠크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해 보고 싶어졌고, 다른 세상을 보고 싶어졌다. “일이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나는 내 일을 정말 좋아했다. 일본은 많은 전설적인 게임을 배출해 왔고, 나는 미국과 달리 일본에서 어떻게 게임 개발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운이 따랐는지, 영어로 된 일본 회사의 채용 정보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동경에 있는 그래스하퍼 매니팩츄어(Grasshoper Manufacture) 사가 해외의 인재 채용을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생각은 맞았고, 채용을 제안 받자,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조건을 수용했다. 워킹 비자를 신청하고 몇 달 만에 일본에 도착했다. 그는 2007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가 알게 된 것은 일본 퍼블리셔는 미국 보다 좀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좀더 실험적인 게임에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쿠크는 일본어를 할 수 없는 상태로 채용되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장벽을 넘기 위해서 말하고, 쓰고, 읽는 능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는 이 배우는 과정에 대한 도전을 매우 즐겼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무도 없는 나라에서 생존하는 것은 너무 외롭고 어려운 일이었다.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이런 감정들이 사라졌지만, 처음에는 너무 우울했다”고 그는 토로했다.
“운 좋게도 나는 신주쿠 서쪽에서 살게 되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혼잡한 지하철 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거기는 너무나 볼 것과 할 것이 많았다. 과밀집된 대도시에서 사는 것은 불리한면도 있었지만,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흥미로운 일들에 비하면 이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쿠크는 일본에서 정확하게 2년을 머물렀다. 2009년에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보낸 2년이 그가 생각한대로 였을까? 잠시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알 양은 중국의 THQ에서 9개월을 일했는데, 그는 THQ의 MMO 부서에서 디자이너로 일하자는 제안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졸업과 동시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USC의 인터랙티브 미디어 프로그램(Interactive Media Program)을 통해 스퀘어에닉스(Square Enix), 시에라 온라인(Sierra Online), 블리자드(Blizzard)와 같은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었지만, 그 회사들은 모두 캘리포니아 남부에 있었다. 해외에서 일할 기회를 찾았다는 것은 그에게 “완전 흥미로운 일” 이었다.
“THQ 차이나에서 흥미로운 게임을 만드는 것을 기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은 내게 게임 산업계에 있어서 서부개척시대 같기도 했다. 다행히도 언어 장벽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의 결정은 가족과 친구, 특히 대만에서 이민을 온 그의 아버지에게 충격을 안겨주었고 한다. “아버지게 내게 했던 질문이 생각난다. 너의 부모가 그렇게 어렵게 미국 왔는데, 너는 왜 중국에서 일하겠다고 가는 거냐? 고 아버지가 물었었다.” 중국으로의 이동에 대한 실행계획이 그에게 가장 넘어야 할 큰 문제였다. 그는 가볍게 여행을 다녀오고, 3개의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모두 버렸다. 또한 건강보험, 비자 및 살 집 등등을 모두 고민했어야 했다.
“오랫동안 당신이 속해 왔던 안전한 지역을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것은 상상하는 것 조차 쉽지 않다. 중국에서는 가족도, 친구도 없이 오직 나밖에 없다. 나는 아무런 참고사항도 없이 ‘새로운 규범’을 가지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시장 보는 일에서, 내 게임기를 실행하려면 벽의 플러그에 바로 연결하면 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일 등 모든 것이 모험이었다.”고 양은 이야기한다.
직장에서 그는 동료와의 사고 단계의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동료들은 좋은 게임을 가져와서 분석하고, 중국시장에 맞게 복제하는 데 전문가였다.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좋은 게임을 알아보는 훌륭한 눈을 가졌지만, 그것이 왜 좋은 게임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왜’ 그런가를 설명하는 것은 꽤 어렵고 힘들었지만,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고 그는 회상한다.
중국에서 사는 것에 대한 또 다른 특전은 생활비가 적게 든다는 것이었는데, 최근에 학교를 졸업하여 학비 빚이 많았던 양의 입장에서는 매우 안도감이 들게 하는 점이었다.
“중국에서 디자이너로써의 삶은 미국에서의 디자이너의 삶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게임 산업계에서는 내가 다음주에 어디에 있을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일할지를 알 수 없다. 엄청난 여행을 견뎌내야만 한다. 처음 몇 달 동안 여기서 나는 한번에 2주 이상을 같은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고 그는 토로했다.
“내가 책상에 앉아서 보낸 시간과 지역 개발자들이 그들의 홈 잔디 구장에서 보낸 시간을 비교해 볼 때, 처음 나의 기대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확실히 이런 종류의 사람과 일하는 방식을 원하지는 않았었다.”
클라우드 랑레이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2년 전에 유비소프트 몬트리올에서 유비소프트 싱가포르로 옮겼는데, 몬트리올에서 스튜디오 테크니컬 디렉터로 9년을 일한 다음 신생 스튜디오로의 이적을 제안 받았었다.....(중략)
※ 자세한 내용은 첨부(PDF)파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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