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간 통상 문제에서 강경파로 알려진 재일미국상공회의소(ACCJ)가 지난 10월 1일 <인터넷․이코노미 백서>라는 제목의 대일 요구서를 공표했다. ICT 분야에서 ACCJ가 이런 요구서를 마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용을 보면, ① 일본판 FCC(연방통신위원회)의 설치, ② 전파의 주파수 옥션 도입, ③ 클라우드 컴퓨팅 보급 지원 등, 이제 막 등장한 민주당 정권이 내세운 공약과 같은 점이 적지 않다. 왜, 하필 이런 시점에 강경파들이 일본에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일까. ACCJ(회장 토머스 윗슨, 주식회사 KPMG FAS 파트너)는 1948년 설립되어 약 1,300개 회사가 가입한 일본 최대의 외국자본 기업 경제단체로, 도쿄만이 아니라 나고야·오사카에도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미·일 간의 상거래 확대, 일본에서의 국제 비즈니스 환경 개선 등을 사명으로 하여 가입한 미국 기업의 이익 증진을 도모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더군다나 ACCJ는 재일 미국대사관과 밀접한 협력관계에 있다. 대사관이 ACCJ의 의향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파트너라 해도 좋다. 과거 미․일 간 경제마찰이 있는 경우 ACCJ가 담당한 역할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수많은 미국의 거대기업에서 ACCJ 회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장래 본국․본사에서 승진하는 등용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번 <인터넷․이코노미 백서>를 공표할 때에도 새로운 주일 대사인 존 루스가 윗슨 회장에게 서한을 보내 “당신과 ACCJ 멤버의 강력한 팀워크에 감사한다”며 축하인사를 전하고 있다. 양자의 밀접한 관계는 시대를 거쳐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문제의 <인터넷․이코노미 백서>, 즉 대일 요구서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 약 1,300개 가맹사 가운데 특히 26개사가 전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명단이 백서 말미에 실렸는데, 그 면면을 살펴보면, 아마존재팬, 일본암웨이, 애플재팬, 아시아스트라티지, 빅 픽처 인터내셔널, 블루시프트, 더 보랫그룹, BT재팬, 시스코시스템즈, 델, 이베이, 프라이슈만힐러드재팬, 휴존시스템즈, GE, 구굴, 일본휴랫팩커드, 인텔, 존슨앤존슨, 마이크로소프트, NBC유니버셜, 일본도널드슨, 일본오러클, 페이펄, PBXL, 퀄콤재팬, 타임워너 등이다.
미국의 비즈니스 상황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이 명단만 봐도 경악할 것이다. 마치 ‘철천지원수’ 또는 ‘견원지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경쟁관계에 있는 두 그룹, 즉 PC 분야에서 자웅을 겨루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그리고 반도체 분야에서 전선을 확대하고 있는 인텔과 퀄콤이 사이좋게 이름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두 그룹의 기업이 함께 참여한 것에 대해, 백서를 작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 멤버 한 사람은 “정말로 기적이다. 일본 밖에서는, 심지어 미국에서는 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는다.
오월동주(吳越同舟)를 실현한 배경에는 미국 내에서 일본법인의 지위 하락
두 그룹의 오월동주만이 아니라, 가맹 각사의 이해 조정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은 이번 백서를 작성하는 움직임이 필자에게 감지된 것은 올 이른 봄이었다. 당시에는 ACCJ가 혼자 요구서를 만들고 있어서, 다시 1990년대 중반 이전과 같은 미일 경제마찰이 재연되는 시대가 닥칠지 모른다는 정보가 함유된 것이었다. 그러나 백서 작성은 난항을 거듭했다. 작성 단계에서 문구 하나하나에 가맹 각사의 이해가 격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립은 백서가 만들어지고 발표 전 날까지도 계속되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만일 발표 자리에서 NTT 조달 확대 요구에 관한 질문이 나오면 어떤 기업이 회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는 어느 기업이든 NTT에 많은 제품과 서비스를 납품하고 싶어 하는 마당에 굳이 NTT를 자극하는 것은 ‘본전까지 까먹는 일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ACCJ 가맹사는 어느 기업이든 공격적이라고 알려진 미국 기업이다. 이들을 묶어 하나의 요구서를 만들어내는 일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여태껏 실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이처럼 어려운 오월동주를 실현했던 배경에는 가맹 각사, 결국 거대 미국 기업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어떤 기업에서든 일본법인의 지위가 하락하고 있으며, 더 이상 일본법인을 존치해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 정부나 기업이 오랜 기간 동안 저성장을 겪으면서도 이렇다 할 타개책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글로벌 기업들은 하나같이 중국이나 인도로 아시아의 거점을 이전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어, ACCJ를 구성하는 일본법인이 존망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처럼 성장력이 넘치는 일본에서 한몫 잡아보고 싶어 하는 미국 기업이 무역마찰을 들고 나오던 시대나 국내 시장을 석권한 일본 기업의 움직임을 정치적으로 막아보려 했던 시대와는 전혀 대조적인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백서에는 온화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이번 각사가 일본 시장 정체의 최대 원흉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일본 ICT 분야에 넓게 퍼져 있는 ‘갈라파고스화’다. 갈라파고스는 생물학자 다윈이 ≪진화론≫의 모티브가 된 ‘독자적인 생태계를 갖는 절해고도’의 이름이다. 그것이 최근에는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지 않는 특이한 시장으로 변질되고 만 일본 휴대전화 시장을 야유하는 표현으로 정착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세계 최초로 제3세대 휴대전화 서비스의 상용화에 성공하는 등 선진적인 기술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후발주자인 서구 세력들의 표준 설정이라는 속임수에 감쪽같이 속아 일본의 기술이 세계 표준으로 정착하지 못했던 사연이 있다. 그리고 지금 ‘갈라파고스화’가 일본 차세대 ICT의 여러 분야에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의 ICT 감독체제가 ‘갈라파고스화’의 원흉이라 지적
재미있는 점은, 일면적으로는 일본 기업들이 세계시장으로 비약할 기회를 빼앗았다고 해석되기 쉬운 ‘갈라파고스화’를 ACCJ 기업들은 오히려 널리 판매할 수 있는 세계 표준 기술의 판매기회를 놓치는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 결과 ‘규모의 경제’ 혜택이 퍼지지 않아 소비자가 덩달아 높은 비용을 지불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통신․방송 분야의 규제를 내각의 일원이 총무성에 위임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ICT 김독체제는 ‘갈라파고스적’인 여러 문제의 원흉이라고 한다. 게다가 총무성과 경제산업성의 중복이 그 활력을 한층 꺾어버리는 사태를 초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두 성을 통합하여 미국의 FCC나 영국의 Ofcom처럼 독립된 행정위원회에 이관함으로써 규제․감독 면에서 활력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싼 요금을 실현하고 있는 일본의 고정 브로드밴드에서도 ‘갈라파고스화’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 ACCJ의 견해다. 이 분야에서 거함 NTT가 추진하고 있는 NGN(차세대 통신망)은 세계 표준과 동떨어졌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비용이 저렴한 미국 기업 제품을 제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백서는 구미에서는 휴대전화 등의 상용 서비스에 주파수를 할당할 때 공통 수단이 되는 ‘주파수 옥션제’가 일본에는 도입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도입하면, 국가 입장에서는 새로운 재원을 획득할 수 있는 메리트가 있기 때문에 시험적으로라도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는 요구를 담고 있다. 그리고 전파 이용 목적의 경직성과 변경의 어려움도 손을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차세대 컴퓨터 시스템의 주류가 될 클라우드 컴퓨팅 관련 법제 정비에 대해서도, 일본은 미국과 협력하여 세계 국제표준 설정을 리드해야 할 입장에 있으며, 결코 ‘갈라파고스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호스트(데이터센터 제공회사)를 바꿀 때 중요한 저작권, 개인정보 등의 보호에 대해 이런 법제의 국제적 조화를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아울러 의료 분야에서 전자 진료기록 카드(Karte)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환자가 다른 의사의 진단(second opinion)을 쉽게 얻을 수 있을 뿐더러 신속한 회계, 의료비 절감 등의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미 밝힌 바처럼, 이번 백서는 민주당 정권의 탄생과 그 발표 시점을 같이하고 있지만, 회원사 간 의견 조정에 시간이 결려 이 시기에 공표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판 FCC 설치, 주파수 옥션제 도입 등은 몇 년 전부터 민주당이 제언하고 있는 정책이며, 하라구치 총무상이 취임 직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다시 이 정책의 실현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또 총무성의 심의회․연구회가 모색하고 있던 클라우드 컴퓨팅의 보급 지원책이 지향하고 있는 법제도 미국과 협력하여 세계 표준을 확립함으로써 일본 이용자를 보호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ACCJ와의 공통점은 상당히 큰 것으로 보인다.
비록 우연이든, ACCJ를 둘러싼 환경 변화가 일본과의 협력 강화로 이어진다면 일본의 정책 당국은 그 기운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지 모른다.
● 출처 : http://diamond.jp/series/machida/1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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