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2일, 일본의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는 'NHK 프로그램 개변(改變) 문제'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NHK를 비롯한 방송계뿐만이 아닌 일본 미디어계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 더욱 주목을 모으고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NHK의 특집 방송을 둘러싸고 취재에 협력한 민간단체('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네트워크(「戦争と女性への暴力」日本ネットワーク, VAWW-NET JAPAN. 이하, 'VAWW-NET JAPAN')가 NHK와 제작회사 2사에 손해 배상을 청구한 소송의 상고심 판결에서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프로그램의 내용에 대한 취재 대상자의 신뢰나 기대는 원칙적으로 법적 보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NHK 등에 200만 엔의 배상 판결을 내린 2심 판결을 뒤집고 원고측의 청구를 기각한 것이다. 이로 인해 2심과는 달리 원고측의 역전 패배로 'NHK프로그램 개변 문제'는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의 내용은 여러 가지 해결 과제를 남기고 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미디어의 '편집의 자율성'을 중시한 매우 바람직한 판결이지만 방송에 대한 정치권의 개입이 문제의 발단이었다는 것을 두고 보면 본질적인 문제를 간과한 판결이라는 지적 또한 만만치 않다. 후자의 문제는 NHK를 비롯한 방송계만이 아닌 일본 미디어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소지가 다분하다고 하겠다.
NHK 프로그램 개변 문제의 경위
'NHK 프로그램 개변 문제'의 발단은 2005년 1월 12일자 아사히(朝日)신문의 보도에 의한 것이었다. 2000년 12월에 개최된 '여성국제전범법정(女性国際戦犯法廷)'을 취재한 내용의 프로그램을 다음 해인 2001년 1월 30일에 방송한 NHK교육텔레비전의 ETV특집 '전시성 폭력을 묻는다(問われる戦時性暴力)'를 둘러싸고 당시 '일본의 전도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 대표이었던 나카가와 쇼우이치(中川昭一)와 아베 신조(安倍晋三)관방(官房)부장관의 양 중의원 의원이 방송 전날인 1월 29일에 NHK의 간부를 불러서 방송의 내용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공평성 등을 거론, 방송 내용의 수정을 요구했다고 전했다. NHK의 간부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서 삭제·편집에 대한 현장의 반대 의견을 무시한 채 방송 전날에 프로그램의 내용을 편집하기에 이른 것이다.
44분의 내용으로 제작된 당초의 프로그램의 내용에는 중국 위안부의 증언과 천황에게 책임이 있다는 여성 법정의 결론 등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방송된 내용은 이러한 내용이 거의 대부분 삭제된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2005년 1월 13일에는 프로그램 제작에 직접 참여한 나가이 사토루(長井 暁)NHK 프로듀서가 기자회견을 열고 4년 전에 자신이 데스크를 담당했던 NHK의 프로그램에 대한 정치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양심선언을 했다.
그러나 NHK를 비롯한 아베씨와 나카가와씨는 아사히신문의 이러한 보도와 현장의 제작에 직접 참여한 프로듀서의 기자회견 내용을 반론·부정했다. 그 뒤 NHK와 아사히신문은 자사의 결백과 보도의 진실성을 두고 치열한 공방에 들어갔다.
아사히신문은 7월 25일, 자사의 조간신문을 통해서 'NHK프로그램 개변 문제 보고(NHK番組改変問題 報告)'라는 제목으로 검증 기사를 게재했으며, 프로그램 개변의 경위와 상세한 취재 내용을 상당 부분의 지면을 할애하면서 상세하게 보도했다. 특히 취재 내용에 대해서는 아베씨와 나카가와씨 등 직접 문제에 관여한 인물로 지목받고 있는 인물들을 직접 취재하여 일문일답의 형식으로 보도하였다. 아사히신문은 자사의 진실성과 NHK와 정치권의 부정 사실에 대한 강한 확신의 논조를 일관하였다.
이에 대해 NHK는 7월 26일, 아사히신문의 기사를 부정하는 반박 보도를 하면서 정치권의 압력에 의해서 프로그램의 내용을 삭제·편집했다는 지적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다. 아베씨와 나카가와씨도 아사히신문의 기사 내용에 대해서 반론했다.
'기대권' 대 '편집권'
NHK의 프로그램이 방송되기 직전에 외부(정치권)의 압력을 받아서 삭제·편집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손해 배상을 청구한 취재를 받은 당사자인 VAWW-NET JAPAN의 소송에서 일본의 최고재판소은 2심의 결과를 뒤집는 판결을 내렸다.
최고재판소 판결 내용에서는 '기대권'과 '편집권'에 대한 내용이 주요 쟁점이었다. 취재를 받은 측이 프로그램의 내용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방송사업자나 취재를 한 제작회사가 배상의 책임을 지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최고재판소는 '편집에 의해서 당초의 기획과 다른 내용의 프로그램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되어 있다'고 하면서 '기대와 신뢰는 원칙적으로 법적 보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VAWW-NET JAPAN은 자신들이 취재에 응했던 당시의 설명과 내용이 다른 프로그램이 방송된 것에 대해서 '기대권을 침해받았다'고 주장하면서 NHK와 하청사인 2사에 손해 배상을 청구했었다.
최고 재판소는 '기대와 신뢰'가 외적으로 보호되는 경우에 대해서 ①취재에 응함으로 인해 취재 대상자에게 현격한 부담이 발생하는 경우, ②취재자가 '반드시 일정한 내용, 방법으로 다룬다'는 설명이 있었던 경우, ③그 설명이 객관적으로 취재 대상자가 취재에 응한 원인이 되는 경우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모든 경우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에 한해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밝힌 후 이번 VAWW-NET JAPAN의 경우 '여성국제전범법정'은 취재와는 관계없이 예정되어 있었으며, VAWW-NET JAPAN 측에는 현격한 부담이 없으며, 취재 당사자도 '반드시 일정한 내용, 방법으로 다룬다'는 설명이 없었던 점으로 보아 VAWW-NET JAPAN 측의 '기대와 신뢰'는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원고는 '기대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법정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호소하였으나 법정의 판결 내용에는 '기대권'이라는 단어는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
재판관은 '보도의 자유에 대한 제약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기대와 신뢰가 법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고 설명했다. 또한 일절 예외는 인정할 수 없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2007년 1월, 2심 도쿄 고등 법원의 판결에서는 'NHK측이 국회의원 등의 의도를 헤아려서 탈이 없도록 프로그램을 수정했다'고 판단했었다. 또한 NHK에 200만 엔의 배상 명령을 내렸으며, 이 중에서 100만 엔에 대해서 연대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의 최고 재판소는 이러한 2심의 판결 내용을 뒤집었으며, 최종 판결 내용에는 국회의원 등의 정치권의 방송 개입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비중이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1심 도쿄 지방 법원은 2004년 3월에 취재를 담당한 NHK의 하청 회사에 100만 엔의 배상 명령을 내렸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정치권의 미디어 개입 문제
전술한 바와 같이 결과론적으로 보면 미디어의 보도의 자유와 편집의 자유 등 미디어계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이상적인 최고 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뭔가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다. 이번 판결에서 일본의 최고 재판소는 정치권의 개입과 압력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여전히 정치권의 미디어 개입 문제는 남아있다고 하겠다.
'NHK프로그램 개변 문제' 소송에서는 방송 직전에 아베씨와 나카가와씨의 정치적인 압력이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한 사법적인 판단도 중요한 쟁점의 하나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최고 재판소는 방송 직전에 NHK의 간부가 정치가와 만난 뒤에 방송의 내용이 바뀐 것에 대해서 정치적인 힘의 개입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았다. 이러한 판결에 대해서 원고측은 '정면적 판단을 피했다'고 하면서 판결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2심에서는 정치가의 압력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NHK의 간부는 정치가의 발언을 필요 이상으로 받아들여서 의도를 헤아렸으며, 탈이 없는 방송을 하기 위해서 수정을 반복했다'고 지적했었다. 또한 NHK의 대응은 '기대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배상 명령 판결을 내렸었다.
그러나 본래 '기대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최고재판소는 이러한 2심의 판단을 시인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다시 말해서 유력한 정치가와의 만남이 프로그램의 내용을 삭제·편집하는 데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여부의 판단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대해서 일본의 방송법제 전문가들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편집의 자유와 보도의 자유를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한 판결이었다는 긍정적인 판단과 함께 국민의 알권리의 침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이번 판결은 취재를 받는 측에서 보면 매우 납득하기 힘든 판결이다. 취재를 받는 측의 권리가 보호되지 않은 상태에서라면 어떻게 방송이 될지 모르는 취재에 응하는 태도는 소극적으로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보도의 질적인 측면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며, 취재 보도의 양도 또한 줄어들 것이다. 이는 국민의 알권리 침해로 연결될 우려가 있다는 분석이다.
또한 본 건은 NHK의 간부가 정치가의 압력으로 인해 방송 직전에 프로그램의 내용을 삭제·편집한 결과, 취재에 응한 대상자의 기대와 신뢰를 저버렸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판결은 정치가의 압력에 대해서는 불문하고 방송의 자율이라고 하는 일반론으로 판단했다는 모순에 대한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미 NHK의 자율적인 판단이 침해된 프로그램에 대해서 표현의 자유라고 하는 논리적인 근거로 옹호하는 형식적인 판결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NHK의 입장에 손을 들어준 최고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졌지만 정치와 NHK의 관계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신감은 여전히 남아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신문을 비롯한 일본의 여러 미디어는 이번 'NHK프로그램 개변 문제'를 두고 정치적 압력의 유무를 다루기보다는 주로 NHK 측의 '편집권'과 관련 단체의 '기대권'의 대립 양상 구도로 보도했다. 한국의 조선일보 격인 요미우리(読売)신문은 '기대권'을 받아들이지 않은 최고재판소의 판결은 타당한 판결이라고 하면서 강한 논조의 사설을 실었다.
또한 아사히신문도 NHK와 정치권과의 일정한 거리 유지와 정치가들로부터의 압력에 이겨낼 수 있는 각오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도 '취재를 받는 측의 기대권에 대한 확대 해석을 방지하며, 표현과 보도의 자유를 지키는 데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판단'이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NHK의 '편집권'의 승리에 이대로 최고 재판소의 판단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해도 좋을지 의문이다. 도쿄(東京)신문의 나카무라 신야(中村 信也)기자는 NHK '편집권'의 승리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안이 뒤로 감춰져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번 '편집권' 승리의 판결에는 제작 현장의 표현의 자유와 시청자의 알권리가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방송 직전에 천황 유죄의 판결과 법정 판결의 내용을 평가한 코멘테이터들의 발언, 일본 정부의 책임을 언급한 부분을 삭제·편집한 것은 시청자의 알권리를 침해한 것이며, 사실을 은폐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최고 재판소가 존중한 편집의 자유는 'NHK의 알리지 않을 권리'도 함께 인정한 결과가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나카무라 기자는 '사법은 법적인 책임은 없다고 판단했지만 저널리즘으로서의 윤리적인 책임은 남아 있다'고 쓴 소리를 던지고 있다.
미디어가 보도의 자유와 편집의 자유를 주장하려면 정치로부터도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번 일본 최고 재판소의 판결 내용과 관련 논의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 참고 : - 니혼케이자이신문, 2008년 6월 13일자. - 도쿄신문, 2008년 6월 13일, 23일자. - 마이니치신문, 2008년 6월 13일자. - 미디어종합연구소, 放送レポート 2002년 1월, 3월, 5월호. - 아사히신문, 2008년 6월 13일자. - 이와나미서점, 世界, 2005년 10월호. - 月刊「創(The Tsukuru)」, 2005년 3월호.
◦ 작성:백승혁(일본 조치 대학교 신문학전공 박사과정, poowo74@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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