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영상 매체는 일본 기업끼리의 규격 경쟁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DVD가 보편화되어 있는 지금도 여전히 소비자들의 중요한 기억 매체로 애용되고 있는 VHS 비디오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일본 기업끼리의 기나긴 규격 경쟁의 과정이 있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기억 매체로서 세계적으로 이용되기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도 미국 거대 영화사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의 갑작스런 등 돌림의 영향이 커다란 결정타로서 분석되고는 있지만 일본 기업 간의 차세대 DVD 규격 경쟁은 한국 가전 업체를 비롯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일본 거대 가전 업체 도시바(東芝)가 HD-DVD 사업으로부터 철수를 결정했다. 이로 인해 차세대 DVD의 규격은 소니(SONY)나 마츠시타(松下) 전기 산업이 주도하고 있는 블루레이 디스크(Blu-ray Disc, BD)로 통일되기에 이르렀다. 도시바는 양 거대 가전 업체를 주축으로 한 기업들 간의 규격 경쟁으로 인하여 혼란을 겪으며 휘둘린 소비자에 대한 대책이나 거대 손실 등 무거운 해결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예상외의 막판 역전승을 거둔 블루레이 진영도 무사태평하게만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규격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제 살 갉아먹기' 식의 가격 경쟁으로 인한 투자액 환원 방안의 모색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인터넷 기술의 진보가 강력한 새로운 라이벌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규격 경쟁의 실체는 게임과 영화의 경쟁
제품을 판매한 뒤로 약 2년이 채 못 되는 사이에 블루레이의 승리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소비자와 게임, 영화 업계 등 가정오락 사업에 관계하는 모든 분야를 끌어들인 규격 경쟁은 앞으로도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게임과 영화 사업에 지대한 영향을 주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2005년 소니와 도시바는 규격을 통일하는 데 있어서 각 진영의 진두에 있는 양 사가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것으로 결착을 보는 분위기가 업계에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디스크 용량(HD-DVD: 최대 30기가, 블루레이: 최대 50기가)의 문제로 최종적인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영화 업계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는 30기가의 용량이면 충분하며, 생산하는 데 있어서도 저렴한 비용으로 할 수 있는 HD-DVD 진영의 도시바와 당시 신상품 플레이스테이션 3(P-layStation 3, PS3)의 상품화를 서두르고 있던 소니는 PS3에 자사의 텔레비전 등을 세트로 연결해서 고화질의 게임과 영화를 즐기는 가정에서의 생활을 구상, 용량이 크면 클수록 좋다는 판단을 고수했다. 이러한 디스크 용량에 대한 시각과 판단의 차이는 규격을 통일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로 작용했으며, 엄밀하게는 게임과 영화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빚은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시장'에 의한 세계 표준 결정
도시바가 차세대 DVD 규격 경쟁에서 패배한 것은 하드(기기)와 소프트(영상) 양 진영의 두터운 신임을 얻는 데 있어서의 전략적인 실패에 원인이 있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다.
도시바는 특허 기술의 권리로부터 창출되는 이익의 유혹에 자유롭지 못했다. 특허 전략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타사 가전 업체의 찬동을 얻지 못한 채 고립된 위치에서 HD-DVD의 보급률을 올리는데 고전했다. 이로 인해 영상 소프트 부문에서 협력적인 관계를 쌓아온 미국의 거대 영화사들도 도시바에 등을 돌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기존의 DVD 제조 라인을 이용한 저렴한 생산 비용과 경쟁 업체인 소니와 마츠시타 전기 산업의 블루레이보다 염가라는 장점이 부각되면서 확장된 초반의 시장 분위기가 일변했다.
이러한 차세대 DVD의 세계 표준을 둘러싼 경쟁은 유통과 소비자 등 '시장'이 그 흐름을 결정했다고 니혼케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분석하고 있다.
영상 매체의 규격 경쟁은 1970~1980년대의 'VHS' 대 '베타'의 VTR 규격 경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승부는 소니의 베타 방식의 상품화로부터 VHS 방식으로의 전환까지 14년이 걸렸다. 이에 비해 이번에 결정된 차세대 DVD의 규격 결정은 새로운 규격에 대한 발표로부터 5년, 상품 발매로부터는 불과 2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일 내에 결정되었다.
규격 경쟁이 짧아진 것은 기나긴 VTR의 규격 경쟁을 거치면서 규격 경쟁에 익숙해진 유통이나 소비자가 빠르게 상품을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의 압력은 경영자로 하여금 가전제품 시장이나 소비자들에게 주는 상처가 깊어지기 전에 빠른 결단을 내리도록 작용했을 것이다. 약 30년 전 VTR은 대여 형식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VHS와 베타가 VTR의 규격 결정을 두고 경쟁했을 때는 같은 타이틀의 영상 콘텐츠를 두 가지 형식으로 소비자에게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분명 효율적인 면에서도 떨어지는 것이었다. DVD를 중심으로 하는 영상 콘텐츠의 판매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도 두 가지 형식의 영상 콘텐츠가 소비자들에게 제공된다면 이는 마찬가지의 효율성 저하를 가져올 것이다.
VTR의 규격 경쟁은 베타 방식으로 소니가 먼저 경쟁의 불을 붙였지만 VHS 방식을 채용하고 있었던 일본 빅터(VICTOR)와 마츠시타 전기 산업이 미국의 영상 콘텐츠 유통 시장에 자사의 VTR 방식의 장점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소니보다 앞서서 유통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손을 쓴 결과로 승리를 거두었다.
도시바는 VTR 규격 방식에 있어서 베타 방식의 소니와 파트너가 되어 VTR의 표준이 베타 방식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반대의 결과로 VHS 방식이 채택된 이래 소니와는 경계를 분명히 하는 평행선의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현행 DVD 방식에서는 마츠시타 전기와 히타치(日立)제작소를 끌어들여 규격의 통일을 주도했다. 이러한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타임워너(Time Warner)였다.
규격의 표준을 정하는 데 있어서 항상 문제시되고 중요한 결정의 포인트가 되는 것은 전 세대 기술과의 호환성 문제다. DVD의 경우 소니가 CD와의 호환성을 강조했으며, 도시바도 차세대 DVD의 장점을 강조하는데 있어서 현행 DVD와의 호환성에 대해서 강하게 호소했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도 같은 이유에서 도시바를 지지했다.
이렇게 각 가전 업체가 사활을 걸고 규격 경쟁을 하는 데는 특허료 수입이 최우선의 목적이다. 만약 규격 경쟁에서 패배한 경우에는 새로운 기술 규격으로 시장의 판도를 뒤집기 위한 역전의 기회를 노린다. 이렇게 도시바의 기술에 대항하면서 태어난 것이 소니 진영의 블루레이이다. 호환성은 낮지만 기술력 승부를 강조한 규격 경쟁의 전형적인 흐름을 보여 준 좋은 예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마츠시타의 움직임이다.
마츠시타는 VTR 규격 경쟁에 있어서 소니 진영에 합류하려는 기미를 보였던 적은 있지만 실제로는 자회사인 빅터 편의 손을 들었었다. DVD의 경우에 있어서는 도시바와 행동을 같이했었는데 차세대 DVD 규격 결정의 기로에서는 소니 진영에서 블루레이의 승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에 대해서 유통 시장 분야에서 강한 면을 가지고 있는 마츠시타가 같은 진영의 아군이었다는 것 자체가 미국 시장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처럼 규격 경쟁의 흐름을 좌우했다는 평가다.
도시바의 HD-DVD '철수'와 플래시 메모리 '집중'
도시바는 두 가지의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HD-DVD의 완전 철수와 플래시 메모리에 대한 투자 집중을 동시에 발표했다. 2005년 6월에 니시다 아츠토시(西田 厚聡) 사장이 취임한 이래 반도체와 원자력에 주력해 왔다. 원자력 분야에서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를 인수했으며, 카자흐스탄의 우라늄 광산의 권익을 취득하는 등 원자력 분야에 있어서 복합적인 대응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왔다. 한편, 반도체 분야에 있어서도 니시다 사장의 주도로 2007~2009년도의 설비 투자의 총액 1조 7,500억 엔 중에서 1조 엔이 넘는 금액을 반도체 사업에 투자하여 이와테(岩手) 현과 미에(三重) 현 두 곳에 NAND형 플래시 메모리 생산을 위한 새로운 공장의 건설을 결정했다.
〈표 1〉블루레이디스크(BD), HD-DVD 양 진영의 규격 경쟁을 둘러싼 주요 움직임
※출처: 니혼케이자이(日本經濟)신문, 2008년 2월 18일자.
2009년 봄부터 일제히 공사에 착공하여 2010년 준공을 예정하고 있으며, 제휴 기업인 미국의 샌디스크(SanDisk)와 합친 공장 투자액은 최대 1조 8,000억 엔에 달할 전망이라고 한다. 또한 반도체 분야에서는 소니로부터 고성능 반도체 제조 장치의 매수를 결정하였다. 대량 생산 체제에 들어가게 되는 NAND형 플래시 메모리는 휴대 음악기기나 휴대폰의 기억 메모리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으며, 컴퓨터의 HDD를 대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면 그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리라는 전망이다.
한편, 이러한 일련의 결정은 한국의 삼성전자가 차지하고 있는 DRAM이나 플래시 메모리 분야의 세계 점유율 1위 자리를 노린 전략으로도 분석되고 있다.
그 외에 샤프(SHARP)와는 액정 패널과 영상 처리용 LSI(대규모 집적회로)의 상호 공급 제휴를 결정했다. 이와 더불어 도시바 EMI 등의 관련 회사 주식의 매각과 도시바 긴자(銀座) 빌딩의 매각 등 도시바 사업에 있어서 주변적인 사업 분야는 가차 없이 정리한다는 방침을 표명하고 있다.
도시바 HD-DVD 철수에 따른 영향
우선 도시바가 차세대 DVD 규격 HD-DVD로부터 철수한다는 발표의 영향으로 대형 가전 판매업체의 HD 제품 판매 정지의 방침이 확대되고 있다. 일본 요도바시 카메라가 판매 정지를 발표한 이래 코지마나 edion 등의 주요 가전 판매업체 6사의 HD-DVD 제품의 판매정지 방침이 계속되고 있다. 판매정지 방침의 발표와 함께 손실을 줄이고자 도시바와 재고 처리 문제에 관해서 협의 중이며, 재고의 반품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다.
한편, edion사는 2월 21일, 판매한 HD 제품을 블루레이 규격 대응 제품으로 교환해 준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DEODEO[히로시마(広島) 시]나 EIDEN[나고야(名古屋) 시] 등 그룹사 판매점 약 1,000여 곳에서 3월 1일부터 31일까지 교환 접수를 받는다고 한다. 단, 교환을 원하는 블루레이 대응 제품이 구입한 제품보다 고가인 경우는 차액을 지불하고 반대로 저렴한 경우는 차액을 환불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이미 도시바의 HD-DVD 규격 대응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이다. 도시바는 앞으로 8년 동안 부품을 보존하며 애프터서비스(AS)를 실시하여 소비자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 전념한다는 방침이다. 또한 HD 전용의 영상 콘텐츠나 기록 미디어를 만드는 회사에 지속적인 제품 판매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에 콘텐츠나 기록 미디어 제조 회사는 시장의 동향을 보면서 판단한다는 방침이 대세이다. 하지만 그 시장의 존속 가능성은 매우 짧을 것이라는 예상이며, 조만간 영화사 등의 HD-DVD 규격 대응 콘텐츠의 제작은 비용 절감의 차원에서 제작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소니는 블루레이 규격의 영화나 게임을 기록한 차세대 DVD 콘텐츠의 누계 생산이 작년 말 시점에서 1억 1만 개를 돌파했다고 발표하면서 도시바의 HD-DVD 철수로 인한 규격의 단일화로 작품수도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표 2〉일본 거대 가전 3사의 영상 관련 규격경쟁의 승패(○: 승리, ●: 패배)
※출처: 니혼케이자이(日本經濟)신문, 2008년 2월 22일자.
소비자 중시 풍토가 필요
디지털 기술의 변화는 그 어떤 변화보다 빠르고 다양하며 여러 분야에 걸쳐서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비록 이번에는 규격 경쟁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던 도시바가 패자로 전락했지만 언제 내일의 승자로 자리하게 될지는 어느 누구도 모른다. 고속·대용량의 통신기술 발달이 하루가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 음악이나 영상 콘텐츠를 이용하고 있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도시바가 HD-DVD를 버리고 플래시 메모리 사업에 전념한다는 방침이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평가받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좋고 편리한 기술이나 매체가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가장 중심에서 생각되어야 할 대상은 소비자이다. 이번 HD-DVD에서의 철수를 발표하는 기자 회견장에서 니시다 사장은 “HD-DVD의 완전 철수 결정은 소비자 보호 차원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고 강조했다. 이미 구입한 소비자들의 최소한의 피해를 위해서 전념할 것을 약속한 도시바의 발표가 약간의 불안을 덜어준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완전할 수는 없다.
항상 경쟁의 희생양은 혁신자 층이라고 할 수 있는 조기 구입자들이었으며, 회사를 믿은 소비자들이었다. 기술개발이나 저렴하고 좋은 물건의 공급을 위해서는 경쟁이 불가결하다고는 하지만 소비자들이 피해자가 되는 것을 당연시해서는 안 될 것이며, 소비자를 보호하는 의식이 항상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것이다.
◦ 참고 : - 도쿄신문, 2008년 2월 20일자. - 아사히신문, 2008년 2월 20일자. - 요미우리신문, 2008년 2월 20일자. - 니혼케이자이신문, 2008년 2월 16·17·18·19·20·21·22·23일자. - 도시바 보도자료.
◦ 작성:백승혁(일본 조치 대학교 신문학전공 박사과정, poowo74@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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