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2월 소련의 붕괴는 국제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 것과 더불어 거대한 러시아 연방국가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중산층이 탄생되었고, 이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지난 20여 년간 러시아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변화의 물결에 편승하여 빠르게 러시아를 발전시켜 왔다. 페레스트로이카를 기점으로 현대에 이르는 20년 동안, 1985년부터 1990년까지가 가장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시기였다면, 러시아 연방국가의 최고 과도기는 1991년의 소련 붕괴, 표현의 자유와 미디어 소유를 인정한 1991년의 ‘러시아대중정보매체법’ 제정과 1992년의 가격자율화 실행 시기를 포함한 1991년부터 1995년이라고 나는 본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어떠한 체제도 존재하지 않았고 탈중앙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또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상존하며 강력하게 대립하고 상충하는 계속적인 투쟁의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형식의 무역의 붐이 일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독점적인 형태의 산업적 위기가 난무하였고 자본을 축적하는 시기였다. 사회적으로는 시민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대부분은 몰락하는 경제에 대한 새로운 움직임에 국가의 부를 꿈꾸고 있었다. 또한, 언론은 극단적으로 저널리스트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제4의 권력으로서 당으로부터 독립적인 미디어 조직을 지향하며 미디어 기업으로서 성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중앙지의 몰락과 지방지의 상승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그동안의 소련 언론의 구조인 피라미드형을 서서히 붕괴하는 중앙언론이 몰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까지 소련의 신문 구조는 이른바 ‘중앙언론’의 핵심기구인 공산당, 정부, 다른 중앙기구들에 의해서 국가와 공중에게 공식적으로 정책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중앙언론들은 모스크바에 그 기반을 두었고, 1990년에는 신문의 총 가짓수의 3%를 형성했고, 그의 발행부수는 전체의 73%에 이르렀다. 그동안 중앙언론에서 최고지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일간신문인 <프라우다>였고, 소비에트 최고의원 신문인 <이즈베스티야>였다. 중앙위원회는 산업‧농업‧문화‧국제적인 업무 등등뿐만 아니라, 공산당 이론과 실습을 위한 잡지들과 신문들을 발행했다. 젊은 공산주의자 연합인 콤사몰은 젊은이들에 대한 소식을 다뤘던 <콤사몰스카야 프라우다>를 발행하였고, 무역연합중앙위원회는 노동자집단을 위한 <투르드>를 발행했다. 작가집단 편집인들은 지식인들을 위해 <리테라투루나야 가제타>를 발행했다. 영화종사자연합은 영화 팬을 위한 잡지인 <소베트카야 에크란>을 발행했다. 국가스포츠위원회는 스포츠팬을 위해 일간지 <소비에트카야 스포츠>를 발행했다. 이러한 러시아 인쇄매체들은 자치공화국의 수도에서 유사한 성격과 유사한 이름으로 반복하여 출판을 하였다. 이는 비록 중앙 출판물과 어떠한 출판물 사이에 명백한 종속관계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지배하고 있는 기구들은 일종의 종속관계와 같은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배체제는 비록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중앙언론의 가짓수가 적다고 할지라도 자치공화국의 재생산된 출판물로서 가장 인기 있는 언론매체였다. 이러한 신문들은 중앙언론과 그 내용이 유사하였고, 가장 레닌적인 전통을 가진, 집단적인 선전자들, 집단적인 교란자들 그리고 집단적인 조직과 편집인들에 의해 정치적 이슈에 대한 당 견해를 설명하였다. 잡지들은 얼마의 자유를 가졌지만 엔터테인먼트를 주제로 한 선전적 성격을 띠었다. 1986년에서 1988년까지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러한 중앙언론을 그의 개혁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신문의 난에 시민들의 편지를 게재하는 방법으로 페레스트로이카에 참여를 시켰다. 또한 국가 어느 곳에서나 읽혔던 중앙언론이었기 때문에 그의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호소를 할 수 있었다. 또한 크레믈린은 저널리스트에게 특권과 자유를 주는 방법으로 중앙언론과 자연적인 동맹관계로 만들었다. 한편, ‘1990년 소련의 대중정보매체법’은 모든 출판사들을 공식적으로 국가기관에 등록하도록 하였다. 사실상, 이러한 절차는 편집인 스태프들이 그들의 옛 주인과 다르거나 심지어는 그들 자신이 신문의 등록자로 하는 설립자로 등록을 하게 하였다. 이러한 실시는 기존의 그들만의 복종의 선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독립적인 아울렛을 갖게 함으로써 피라미드형의 중앙언론을 위협하는 동기를 마련하였다. 동시에 새롭게 등록된 편집인들은 신흥사업가로 탄생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91년 8월에 공산당과 그의 자산의 국영화 금지에 따라 수천 개의 재등록된 출판물들을 탄생시켰다. 이미 탈공산주의 신문들 몇몇은 주로 지방신문들로서 ‘콤뮤니즘, 프라우다, 소비에트카야’라는 이름을 벗어나 다른 이름을 가졌다. 또한 편집의 개선도 달라졌다. 이러한 현상들은 당 메커니즘에 의한 중앙-지역의 언론체제에 대한 전체적인 붕괴를 가져왔다. 몇몇의 인쇄매체의 경우 모스크바와 자치공화국에서 중앙언론과 유사한 구조를 창조함으로써 옛 체제를 모방하려고 애를 썼지만 지방 행정의 더 큰 자치적인 분위기와 정치적인 방편의 부족의 분위기로 말미암아 압력을 집행하기란 쉽지 않았다. 사실 국가의 보조금 형태의 경제적인 지렛대를 이용하였지만 그러한 것들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피라미드형의 언론체제로 보이지만, 이미 내부는 꼭두각시의 줄들이 진정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떠한 신문도 중앙언론인 모스크바의 신문 내용에 기반을 두지 않았고. 신문에서 선전적인 경향과 조직적인 지침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공공의 관심이 공동사회 문제로 이동하면서, 지방언론은 분산된 구조의 가장 안정된 부분이 되었다. 1989년과 1990년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대중매체가 가장 대중성의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이 시기는 시민의 정치적 관심도가 가장 높은 시기였다. 개방의 가장 흥분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이은 3년은 심각한 경제적 문제로 많은 가정들이 5~6개의 출판물을 구독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피하고 하나만으로 제한을 하였다. 대신에 이들은 신문보다는 텔레비전 시청하기를 더 선호했다. 시민들은 집중적으로 텔레비전을 생방송으로 시청하고 라디오를 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읽는 습관’을 가진 러시아인들을 ‘보는 습관’을 갖는 러시아인으로 탈바꿈시켰다. 한편, 지방지의 경우는 1988년부터 지방언론을 중앙언론보다 더 선호하는 경향이 일기 시작했다. 이는 지방지들이 모스크바의 중앙언론에서 벗어나, 지방 뉴스‧실무적인 정보‧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일상의 삶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었고, 한편으로는 낮은 배포 비용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 출판물의 부수 수준을 상대적으로 안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93년 3/4분기의 구독예약 캠페인 동안에, 중앙지의 구독예약이 63% 그리고 잡지는 66%만이 유지된 반면에, 지방지는 그들의 독자의 84% 그리고 잡지는 100%를 유지하였다. 새로운 당지의 출현과 언론의 소유구조의 변화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소련의 모든 언론은, 공산당과 공산당에 의해 통제를 받고 있는 각종 위원회와 국가기구 그리고 공공 조직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1990년 소련의 대중정보매체법’에 따라 모든 대중매체들은 등록제가 시행되었고, 이는 다시 각종 위원회와 국가기구들이 새로운 소유자로 등장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지방의 경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예를 들면, 등록된 1만 2,000개의 출판물 중에서 이들이 소유하거나 저널리스트들과 공유한 출판물이 2,140개가 되었다. 한편, 1990년 이후 비공산주의 계열의 당 설립이 법적으로 보장되었다. 그러나 정당의 미숙함 때문에 비공산주의 계열의 당에서 발행하는 언론은 매우 미숙하였다. 덕분에 대중성이 매우 낮았고, 발행부수도 증가하지 않았다. 1993년에는 200개의 당적 신문이 존재하였는데 그중 12개는 모스크바에서 발행한 것이었고, 18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하였다. 대부분의 당적 신문의 성격은 뉴스레터 수준으로, 상황적 이슈들을 출판하는 게 고작이었다. 당시의 시들해져 가는 정치적 관심과 정치인들의 불신으로 당 언론의 성장과 안정성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한편, 당시 러시아 언론의 소유구조는 대략 연방에 속한 국영지가 29%였고, 30%가 공공 조직과 당에 속했고, 41%가 개인 소유였다. 지역신문의 경우는 21%가 연방소유인 반면에, 22%는 개인 소유였다. 자치공화국의 언론에 관해서는 85%가 자치적으로 소유했고, 나머지는 개인과 공공 조직의 소유였다. 1993년에 러시아에 등록되었던 모든 뉴스 신문들 중 57.1%가 개인 자산이었고, 23.1%가 국가 소유이고, 자치공화국의 자산은 5.8%였다. 그리고 19.8%가 공공 조직과 정당이 소유하고 있었다(Bekker & Gurevich, 1993). 또한, 대부분의 기업과 은행은 인쇄매체보다는 방송영역에 더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면 ‘모스트’ 기업은 상업방송인 <엔테베>와 일간지 <시보냐>를 운영함으로써 러시아 미디어 재벌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대중매체의 기업과 융합: 시장경제로의 발돋움 1991년부터 계속되는 경제적 악화와 출판 부가비용의 증가로 대중정보매체는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은 부대비용을 줄이기 위해 외국과 국가의 특파원 수, 그들의 사무소 공간의 임대를 감축하였다. 1993년 신문 생산 경비의 내역을 살펴보면, 240명의 스태프들 중 60명이 저널리스트들로 구성되어 있는 <모스코브스키 노보스티>의 경우, 배포(32%)‧인쇄(21%)‧신문용지(20%)‧월급과 사례금(12%)‧사무실 임대‧교통‧수리‧문구 등등(11%)‧무선 서비스(4%)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같은 상황은 다른 매체도 유사하다(Kiselev, 1993).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 대중정보매체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기업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방법 중의 한 예가 광고수입의 확대이다. 광고는 중요한 출판물의 총수입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아그루멘트이팍트>는 광고수입이 총수입의 70%에 달했다. <모스코비스키 노보스티>는 37%가 구독예약, 3%가 거리판매의 수입인 반면에 60%가 광고수입이었다(Kiselev, 1993). 기존의 대중매체들은 그들의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서 전혀 다른 기업들과 융합하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예로, <아구르멘트이팍트>는 1980년 후반부터 벽돌생산 공장의 건축물과 책 인쇄소, 니즈니노브고로드의 도시의 텔레커뮤니케이션 사업에 그들의 자본을 투자했고 증권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공산당 일간지였던 <프라우다>는 그리스 공산주의자 비즈니스맨과 함께 <프라우다 인터내셔널>이라는 공공자본회사를 만들었다. <모스코비스키 콤사몰렛츠>는 자체 상점들을 보유하는 몇 개의 무역회사들을 만들고 높은 수익의 대출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카메르상트>는 미국과 러시아 외국인 사회에 외국의 화폐로 구매할 수 있는 영어판 주간지를 발행했다. <네자비시마야 가제타>는 <카메르상트>처럼 서구에서 판매되는 영어판을 발행하여 한 부에 약 2달러씩 판매했는데 거의 4만 부의 부수를 유지하였고, 주로 지식인들과 대학교수들이 읽었다. 또한 <워싱턴 타임즈>에 러시아 회사의 광고물을 루불로 게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라네자>라는 광고대행사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네가뉴스서비스>는 소련 외부지역에서 <네자비시마야>의 특파원들과 비상근 통신원으로 구성되었다. 글라스노스트 시대의 가장 인기 있는 주간잡지인 <아고뇩>은 프랑스-영국의 출판물인 <에코>를 함께 경영하는 첫 러-영 신문인 <에코>를 발행하였다. <이즈베스티야>는 서구 언론 회사와 사업을 하는 첫번째 출판물을 발행하였다. 1989년부터 독일의 출판인인 브루다 베리가그와 함께 광고대행사인 <부르다-이즈베스티야>를 상호 운영해 왔다. <이즈베스티야>가 의회지임을 감안할 때 그 당시에는 특별히 정치국 결정에 의해서 그러한 사업을 시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 파이낸셜>과 함께 <이즈베스티야>는 <파이낸셜 이즈베스티야>를 주간지로 발행하였는데, 외국 회사와 신문에 게재하는 광고물의 수익을 나눴다. 광고물들은 <이즈베스티야>의 총수입의 가장 중요한 재원이 되었고, 그러한 광고물들은 각각의 페이지에 25% 이상을 점령하였다. <콤사몰스카야 프라우다>는 그 이상이었다. 신문은 그의 지면을 광고물을 위해서 43%나 포기하였다. 이러한 중앙지들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뿐만 아니라 많은 러시아 도시들과 지방에서 발행하는 발행지에 지역광고물을 싣기 시작했다. 이는 지방광고인의 관심을 충분히 끌었다. 예를 들면, <콤사몰스카야 프라우다>는 지방판에 지방 뉴스, 텔레비전 편성표, 그리고 기상예보 이외에도 광고를 실어 구독예약자의 비율을 높였다. 국가의 보조금 국가가 매스 미디어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한다면 이는 야누스적인 두 가지 면을 지니게 된다. 하나는, 보조금이 신문이나 방송을 정치적 도구나 상업적 사업체가 아닌 국민의 문화적 그리고 교육적인 이익을 위한 국가의 후원이라는 것과, 둘째는 미디어의 정치적 독립성, 객관성, 보도에 대한 균형성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주는 것이다. 1991년에 러시아의 언론에 대한 보조금의 배분은 언론과정부 부차관(당시는 미하일 폴타린)의 임무였다. 이론적으로는 어린이, 청소년, 장애인, 국가의 소수자들, 문학과 문화잡지를 위한 신문이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옐친 대통령의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서 <투르드>와 <콤사몰스카야 프라우다>와 같은 대중성이 큰 신문에도 주어졌다. <투르드>는 국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개혁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국가로부터 지지를 받는 신문이라는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서라고 하였다(투르드, January 21, 1992). 한편, <모스코브스키 노보스티>‧<카메르상트>‧<쿠란트>와 같은 신문은 자유로운 언론을 위해서 국가의 도움을 거절했다. 1992년 12월부터 1993년 8월까지 언론과정부 부장관이었고 소련과 러시아 대중정보매체법을 만든 한 사람인 페도토브 박사는 폴타린의 보조금 정책을 변화시켰다. 보조금은 1년이나 2년 안에 사라지게 될 것으로 개인 사업가나 외국자본, 언론축약판, 종교 또는 상업신문, 광고물의 게시판들 또는 음란언론에 의한 출판물에는 보조금을 주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지방언론의 경우에는 각각의 모든 지역에 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하고 인기 있는 하나의 출판물만을 지원한다고 하였다. 보조금은 일단 전체적으로 인쇄소의 몫을 구매함으로써 또는 지역은행에 넣어줌으로써 지방자치의 지도자로부터 보호한다고 하였다. 또한 모든 지역의 출판물들은 시장의 원칙에 의하여 존재해야 하고, 수익성이 있거나 없는 것은 그들 지도자의 전문성과 재무적인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1993년 10월부터 언론과정부 부장관이었던 블라드미르 슈메이코는 1994년 말까지 연방보조금을 중단할 것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 그의 그러한 결정에는 직접적으로 대통령에 의해서 통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 의문이 남아 있었다. 1991년에 1,200만 루블로 몇몇의 출판물들을 보조하던 연방보조금이 그 규모가 계속적으로 커져 적어도 300개의 출판물을 보조하며 그중에 42개는 지역언론을 보조하였다. 이에 대해, 보조금의 80%는 연방예산에서 나오고 나머지 20%는 지방행정 자산에서 나온다고 1992년 여름, 대중정보 영역의 국가정책에 대한 의회공청회에서 발표를 하였다. 1992년 국가예산으로부터 전체의 보조금은 51억 1,00만 루블로 형성되었지만 인플레이션으로 약 95억 5,300만 루블로 증가하였다. <모스코브스키 노보스티>는 이에 대해 1992년에 사실상 123억 1,100만 루블이 300개 이상의 출판물에 보조금으로 지급되었다고 하였고, 이는 연방예산에서 85%, 지방예산에서 15%라고 하였다. <라시스카야가제타>에 따르면, 1992년에 <이즈베스티야>에 할당되어야 할 원래의 보조금은 5,500만 루블이지만,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그해에 8억 5,800만 루블을 받았다고 하였다. 1993년에는 3월 연방 예산 초안에는 110억 루블에서 120억 루블의 연방보조금이 할당되었지만, 1993년 한 해 동안 재무장관은 240억 5,800만 루블을 600개 이상의 출판물에 보조금으로 지급하였다. 한편, 이 해 국가 텔레비전의 보조금은 1,000억 루블 이상이었다(약 9,000만 달러). 당시 러시아의 언론정책은 첫째, 국가의 브네세코노방크에서 신문사들이 외화계좌를 개설하고, 둘째, 세금의 수익과 언론에 대한 호의적인 대출을 공급하고, 셋째, 텔레커뮤니케이션과 우체국 서비스 이용에 대한 특권으로 관세를 적용하고, 넷째, 임대에 대한 특권을 제공하고, 다섯째, 신문용지의 생산과 인쇄 그리고 유통산업들에 대해 비국영화와 민주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사실 그러한 특권들이 저널리스트의 독립을 위해서 모든 출판물에 공평하게 적용되었다고 하더라도, 보조금에 대한 미디어의 의존성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욕구에 만족하지 못할 경우에는 더 큰 불만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제4의 권력이라는 미디어가 행정력을 행사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이 1993년 8월에 옐친 대통령과 미디어 지도자들과의 회동에서, 10월에 러시아 저널리스트 연합에 의해서, 그리고 1994년 1월에 편집인들의 언론회의에서 일어났었다. 신문 생산업 러시아 개혁정책은 신문 생산업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용지 생산소와 인쇄소의 낙후성과 경제적인 어려움은 신문의 생산마저도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러한 점들은 저널리스트들이 갖고 있는 어려움이 아니라 출판물생산 자체의 어려움이었다. 그 당시 러시아 대부분의 인쇄소들은 서구의 기술 수준보다 50여 년이나 뒤져 있었다. 신문의 컬러 인쇄(1993년 이후 몇몇의 외국 합작 신문들은 컬러 신문을 인쇄하였다)와 전자 레이아웃은 러시아 출판물에는 여전히 새로운 형태였다. 사실, 이러한 낙후성은 이미 1980년대 후반에 42%에 달하는 생산 적자 때문에 최신 장비를 구입할 여력이 없어서 나타난 것이었다. 한편, 대부분의 가장 좋은 인쇄소들은 국가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도 그들 자체의 결산을 바탕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신문용지는 출판물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신문제작소에서 구매하지만, 잉크와 다른 재료, 서비스 비용과 요금에 대해서는 결산을 하는 공장에 책임이 있었다. 세금과 다른 비용의 지불 이후에, 총수입은 국가의 간섭 없이 공장에 보내졌다. 대부분의 경우는 인쇄소와 정간물들은 공동 소유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들은 또한 다른 출판의 형태를 소유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신문사들은 인쇄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정간물과는 항상 전단‧소책자 등과 같은 다른 인쇄물들을 생산 전환할 수 있어 관심을 가졌다. 그 당시 대부분의 편집인들은, 10개의 신문을 각각 발행하는 것보다 어떤 한 신문 100만 부수를 생산하는 것이 수익이 더 높아 나날이 증가하는 인쇄비용으로 경쟁을 하고 있었다. 신문용지를 생산하는 공장은 인쇄소보다 상황이 더 악화되어 있었다. 10개의 공장 가운데 6개만이 가동을 하고 있었다. 이용되는 장비 역시 인쇄소와 마찬가지로 65%가 생산 수명을 초과해 있었다. 이 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이 지불한 배상금의 일부이기도 하고, 1928년 전에 제조된 것도 있었다. 신문용지는 국가에서 가격을 정했다. 이는 인쇄된 신문들이 하층 시민이나 소수 민족, 일반 시민의 관심 하락 때문에 경제적 조건이 나빠져서 용지를 생산하는 공장에 시장의 원칙에 따른다는 그들이 요구할 수 있는 거대한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신문용지 생산 공장들이 더 많은 수익을 위해 신문용지를 해외에 달러로 파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한창 언론을 격려하고 고무했던 정부에 언론정책의 한 장애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1993년에 러시아는 1988년 100만 8,000톤의 신문용지를 생산한 것과 비교하여 100만 톤을 생산하였다. 오늘날 가장 큰 신문용지 생산 공장인 국가 소유의 ‘콘도로가’와 ‘솔리캄스크’ 그리고 주식회사인 ‘말라크나’는 신문용지 생산을 위해 다른 출판물로부터 주문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경쟁을 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경쟁은 유통과 출판 서비스에 적합한 신문용지 가격을 인상하게 만들었다. 독점적 유통체제의 몰락 러시아의 신문 유통체제는 국가가 독점적으로 지배하였다. 이것은 언론과정부 부장관 소속의 ‘러스패차티’에 속해 있었다. 1980년대에는 ‘사유즈패차티’에 의해서 소련 출판물의 유통을 관리하고 있었다. 소련 시절에는 833개의 작은 상점들과 3만 7,700개의 뉴스 가판대, 키오스크, 그리고 9,900개의 신문 자동판매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유통체제는 소련 시절에는 1년에 한 번, 1992년 이후에는 1년에 두 번의 캠페인을 통해 거의 모든 신문과 잡지들의 구독예약 판매를 제공하고 있었다. 1993년에는 4만 7,000개 국가의 전국적인 우체국과 모든 지역의 지국에서 판매 제공을 하였다. 이미 이때부터 전문가와, 컴퓨터 체제 망과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구조물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서비스의 총 관리는 ‘러스패차티’가 하였다. 이러한 독점적인 유통대행사의 구독예약과 거리판매의 판매액이 출판물의 판매가격과 비교하여 1991년에는 20%, 1993년 1분기에는 52%, 2분기에는 출판물의 판매가격의 73%나 올랐다. 또한 1993년 구독예약에 대한 언론비용은 1992년 말과 비교하여 26.5배, 1991년과 비교하여 90배 증가하였다고 하였다. <옵사야 가제타>에 따르면, 1993년에 구독예약 비율의 역학은 1인당 수입, 최소의 임금, 환율과 다른 경제적인 지침의 그것들을 앞지른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불만을 품은 편집인들은 그들 자신의 유통회사를 세우려고 했고, 지역 수준에서 몇몇의 출판물들을 거리판매와 구독예약으로 자체 유통을 했었지만 그러한 비즈니스를 체계적으로 할 만한 재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 그러한 유통체제를 설립할 때 비용은 1991년 여름, 110억 루블(약 4억 달러)에 달했다. 한편, 1992년 모스크바의 뉴스 가판대 수는 817개로 떨어지고, 1993년에는 200개로 떨어졌다. 신문 자동판매기는 러시아의 동전이 사라진 이래 사라졌다. 전통적으로 우체국 서비스는 10~25%의 낮은 수익사업이다. 1993년에 한 통의 편지를 배달하는 데 드는 실제적인 비용은 우표 비용의 14배였다. 신문배달은 구독예약비로 완전히 충당하지 못했다. 모스크바 지역 우체국 사무소는 1992년 11월부터 1993년 4월까지 1억 루블의 손해를 보았다. 이러한 손해는 텔레커뮤니케이션 서비스의 수익으로 균형이 이뤄졌지만 이러한 서비스들은 1993년 대통령령에 의해서 우체국과는 독립적이었다. 우체국 수익의 또 다른 재원은 연금을 배달하며 서비스 대가로 받는 4%의 배달수수료였다. 그러나 경제적 악화로 연금생활자들은 이러한 우체국 서비스 없이 직접 자신이 수령을 한다. ◦ 작성 : 선봉희(언론학 박사, 동서미디어연구소 소장, bonghee333@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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