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민영방송이 올해 6월 16일자로 방송 출범 20주년을 맞이했다. 16년 전까지만 해도 4%대의 최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던 RTL이 현재 독일의 최고 시청률 기록자로 평가되듯, 방송사상 독일의 민영방송은 공영방송과의 이원 시스템 속에서 급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양적 팽창의 측면에서 진일보하는 민영방송사의 위상만큼이나 사회적 의무와 책임에 대한 사회 각계의 요구 또한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러한 요구들은 일차적으로 양대 공영방송인 ARD와 ZDF가 공공성을 담보하는 의무와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영방송 출범 20주년 기념으로 개최된 심포지엄에서는 민영방송의 출범에 따른 역사적 경험의 공유와 함께 디지털방송의 확대에 따른 방송계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 예측한다는 목적 아래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여기서는 이 심포지엄에 참석한 방송계뿐 아니라 법조계 인사들의 민영방송에 대한 평가와 요구들을 살펴봄으로써 변화된 민영방송의 위상을 가늠해 보도록 한다.
민영방송의 의무와 책임 강화 제기
6월 16일 마인츠에서는 독일 상업방송 출범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열렸고, 독일 상업방송계의 책임자들이 거의 모두 참석했다. 주 매체기구 공동 연구팀(Arbeitsgemeinschaft der Landesmedienanstalten, ALM)과 라인란트 팔츠 주 매체기구(Landesanstalt f r privaten Rundfunk Rheinland-Pfalz, LPR)가 공동 주최한 이 심포지엄에서는 '민영방송 출범 20주년, 민영방송의 미래'라는 주제 아래 현 상업방송계의 위기 타개책에 관해 숙연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기념 심포지엄은 상업방송계가 최근 몇 년간 연이어 광고 수주의 하락세에 직면하는 상황에서 미래의 대안을 공동 모색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 국립국장에서 개최된 이 기념식은 과거 시청자들의 높은 관심을 끌었던 의 타이틀 연주곡을 시작으로 개막되었고, 이어서 상업방송의 창업자인 RTL의 헬무트 토마(Helmut Thoma)와 Sat1의 위르겐 되츠(J rgen Doetz)는 상업방송 초창기의 경험과 회고담을 연설했다. 상업방송계의 재정적 위기상황을 반영하듯 기념 심포지엄은 숙연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발표자들은 무엇보다도 독일의 이원적 방송 시스템의 미래 문제에 관해 집중 발표했다.
논의 과정에서 주 매체기구 회장단 회의(Direktorenkonferenz der Landesmedienanstalten, DLM)의 의장이자 헤센 주 매체기구(Landesanstalt f r privaten Rundfunk, LPR Hessen) 회장인 볼프강 태너트(Wolfgang Thaenert)는 미디어 정책가들과 매체기구에 디지털방송의 최근 경쟁상황에 대해 주목하고 면밀한 분석과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디지털 전송 방식의 팽창은 민영방송계의 재정 기반과 기존의 이원 방송체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방송계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전 연방헌법재판소 판사를 역임했던 디이터 그림(Dieter Grimm)은 디지털방송의 다양성을 공급자의 다양성과 같은 것으로 혼동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는 오히려 미래에는 전송 네트워크의 민영화가 주요 흐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동시에 프로그램 공급자와 네트워크 운영자가 엄밀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는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 연합 방송 상임위원회의 회장이자 라인란트 팔츠의 주 총리인 사회민주당 소속 쿠르트 벡(Kurt Beck)은 네트워크 운영자들이 자신들의 이해와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편성할 수도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디이터 그림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는 광고 수주의 하락으로 인한 재정적 위기상황과 디지털방송의 등장으로 인한 방송 구조의 대변동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확실한 규칙총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쿠르트 벡은, 지금까지 주 매체기구가 민영방송만을 광고 규제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이를 벗어나 앞으로는 공영방송의 광고 규제까지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공영방송의 전문위원회는 사실상 객관적인 위치에서 이러한 규제 및 감독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독일 제2공영방송인 ZDF의 관리위원회 회장이자 공영방송 전문위원회의 임원직을 갖고 있는 벡 총리의 주장은 다른 발표자들 및 참석자들에게는 다소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대해 바이에른 주 매체기구(Bayerische Landeszentrale f r neue Medien, BLM) 소장인 볼프 디터 링(Wolf-Dieter Ring)은 적극 동의를 표했고, 덧붙여 문제가 있는 방송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공동의 규제 방안이 주 매체기구를 중심으로 모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존의 공영방송에 책임 부여된 청소년 보호의 역할을 주 단위로 변경할 것을 주장하는 링 소장의 근거는 독일의 제1, 제2 공영방송인 ARD와 ZDF가 공영성에 입각한 본연의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문제인식에서 제기되었다.
ProSiebenSat.1의 새로운 소유자, 하임 사반에 대한 감시
나아가 바이에른 주 매체기구의 링 소장은 민영방송계에 대해 기존에 합의된 미디어 규정의 준수를 강력히 요구했다. 단적인 사례로서 링 소장은 ProSiebenSat.1 Media 그룹의 새로운 소유주가 된 미국의 대부호 하임 사반(Haim Saban)을 지목했다. 그에 따르면, 민영방송의 큰 위치를 차지하는 이 그룹의 신임 책임자가 얼마나 법적인 규정과 원칙을 잘 엄수하고 있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링 소장이 기존에 보여 준 다른 민영방송사들에 대한 유화적 태도와 비교해 볼 때, ProSiebenSat.1 Media 그룹의 발전에 대한 우려는 이례적인 것이다. 링 소장이 표출한 문제의식은 이 그룹이 하임 사반에게 낙찰되기 전까지의 복잡한 상황, 특히 키르히 그룹의 파산으로 인한 방송계의 경제적·사회적 위기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또 다른 한편 미국의 기업가인 하임 사반의 자질과 경영 능력이 독일 방송구조 내에서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그림 전 연방헌법판사는 사회적 공공성의 책임을 담당하는 공영방송의 역할과 이러한 역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업방송 간의 관계를 환기시켰다. 그에 따르면, 공영방송인 ARD와 ZDF가 앞으로 법적으로 명시된 의무 및 책임을 총괄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결과적으로 민영방송사들은 이전과 달리 더 높은 규제 및 감독 그리고 더 많은 의무사항을 준수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림은 민영방송사의 공공 의무에 대해서도 강력한 법적 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기하는 근거는, 법적 규정에 따른 강요가 아닌 민영방송사들 내의 자체 규정은 실질적인 효력이 없다는 게 이미 입증되었고, 국가의 규제가 개입되어야만 자체 규정까지도 제대로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은 또한 연방헌법재판소의 사법 조항을 가능한 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려는 민영방송사들의 움직임을 지적하며, 이에 대해 명확히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다. 헌법재판소는 기본법 제5항에 명시된 언론의 자유 조항이 기존 규정에 의해 더 이상 보장될 수 없을 때에만 이원적 방송 시스템에 대한 사법 내용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다.
독일 방송계의 선두, RTL
한편, 독일 민영방송사에 대한 공공의 역할이 점차 부각되는 것은 공영방송의 책임 방기에 대한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민영방송사들이 지속적으로 높은 시장 점유율을 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민영방송에 대한 공공의 책임 부여 동기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RTL의 경우는 방송 프로그램상으로 시청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력히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독일 공·민영 방송사들의 현재 시장점유율과 광고 수입에 대한 최근 조사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2004년도 1/4분기 독일 방송의 14∼49세 시청자층 시장점유율을 보면, 여전히 RTL이 선두를 달린다. 가령, RTL이 17.9%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한 데 이어 ProSiebendl이 12.5%, Sat1이 12.1%, ARD가 8.2% 그리고 가장 저조한 위치에 ZDF가 7.6%대에 멈춰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로, 1988년도 RTL의 시장점유율은 4.1%대에 불과했고, 공영방송의 TV 방송 권력에는 전혀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측된 바 있다.
그 이후 <콜롬보(Columbo)>와 , 그리고 등의 인기 방송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1993년에 RTL이 시장 선도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은 아직도 민영방송사의 신화로 손꼽힌다. 특히 2003년도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TV 방송 프로그램 100 편 중 62편이 RTL에서 방송되었다는 사실은 현재 RTL의 시장점유율을 기준으로 볼 때,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것을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표 1>에서 보듯이 2003년도 독일 TV 방송사의 광고 수익 현황에서도 RTL은 다른 방송사보다 재정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처럼 독보적인 RTL의 시장점유율이 모든 방송 시간대에서 하락 추세에 의한 결과라는 점 또한 간과될 수 없다. 예컨대, 일일 프로그램의 경우 19%에서 17%대로, 낮 시간대에서도 19.2%에서 17.1%로 각기 2%씩 낮아졌고, 프라임 타임대인 저녁 시간대에서는 21.1%에서 20%로 1% 정도 하락했다. 이는 현재 독일 상업방송계가 광고 수주의 하락으로 인한 재정적 위기상황뿐 아니라 시장점유율의 축소에 따른 부담까지 안고 있음을 반증한다.
○ 참조 : Spiegel Online 2004. 6. 21. Funkkorrespondenz 2004. 6. 18.
○ 작성 : 강진숙(독일 통신원, schaffen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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