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지 않는 이탈리아의 방송계가 다시 공영 방송사의 개혁안으로
들끓고 있다. 1980년대 민영 방송과의 시청률 경쟁에 시달렸던 RAI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기가 무섭게 국내에서는 사유화의 논쟁이, 국외에서는 유럽 연합의 압력이 각각
이탈리아의 공영 방송사를 옥죄고 나선 것이다.
이탈리아의 공영 방송사 RAI는 세 개의 전국 채널 ― RAI 1, RAI 2,
RAI 3 ― 과 두 개의 전문 채널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 방송사이다. 절반에 가까운
재원을 수신료로 충당하는 RAI의 1997년 예산은 141억 프랑(21억 유로)으로, 이 중
수신료 재원이 차지하는 부분은 40%에 달하고 있다. 지난 한 해 RAI는 시장 점유율에
있어 RAI 1이 22.9%, RAI 2가 15.8%, RAI 3이 9.3% 등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기록하며 경쟁 채널인 민방 Italia 1(11.3%)이나 Rete 4(9.6%), Canal 5 (20.7%),
TMC(2.5%)를 누르고 확고한 경쟁력을 드러낸 바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이처럼 호응을 얻고 있는 RAI의 방송 내용에 대해
유럽 방송계는 막상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얼마 전부터 유럽연합은, RAI의
방송 내용이 공영 방송으로서의 품위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유럽연합에 따르면, RAI에서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 특히 연속극 장르는
미국 시리즈의 제작 원칙을 그대로 판박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공영 방송으로서의
품격을 실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민방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미국 시리즈물의 제작 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공영 방송사 쪽에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공영 방송과 민영 방송의 경쟁이 한창 치열하던 시기를 틈타 시장 잠입에 성공한
미국 시리즈물이 이탈리아 프로그램 시장을 크게 바꾸어 놓은 상태에서 민방과 경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이 RAI의 설명이다. 아무리 자국 연속극이
만족스러운 시청률을 거두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미국 시리즈물의 인기가 높은
현실에서 그 성공의 열쇠를 무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지난 3월 24일과 25일 양일에 걸쳐 열린 이탈리아와 프랑스 공식 회의석상
역시 이탈리아 공영 방송사의 이같은 편성 정책이 불거진 자리였다. 50여 명의 프랑스
제작자들과 RAI의 주요 국장들이 함께 한 이 자리에서 RAI의 프로그램 구매국장은
프랑스 제작자들에게 이탈리아 방송계가 선호하는 미국식 연속극의 몇 가지 원칙을
소개하며 이를 무시할 수 없는 RAI의 입장을 실토한 바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공영 방송사의 이러한 양해가 어디서나 수월히 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통합 유럽의 구조가 구체화되면서 서서히 구속력을 갖춰 나가기
시작한 유럽연합으로서는 RAI가 내비치는 상업적 논리의 방송 활동이 여간 마땅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럽 공영 방송들로 하여금 공영 방송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를 적극 촉구하고 있는 유럽연합측에서 시청률 경쟁에 주력하는 방송 양상에
질타를 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RAI로 하여금 공공 서비스 기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그 수익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할 장치를 구상,
시행 중이다.
새로운 법, RAI 3의 광고 수익을 더 이상 허용치 않아
1997년 12월 10일 제정된 법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첫걸음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법안은 문화 방송, 지역 방송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는 RAI 3의 재정에
더 이상 광고 수익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것으로, 공영 방송으로서
채널의 위상을 확실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결과 오늘날 RAI 3의 재정은 그
절반을 공영 방송사가 거두는 수신료로, 나머지 절반을 권리 양도 수익이나 스폰서
원조 등 기타 재원으로 충당하며, 목표 시청률을 9% 안팎으로 정하고 있다.
한편, RAI는 보다 많은 시청자들의 서로 다른 관심사를 만족시키기 위해,
프로그램의 편성을 다각화하고 각 채널마다 고유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이에 따라,
RAI 1은 가족 대상, 대중 대상의 전반적 시청자를 겨냥하는 종합 채널로, RAI 2는
청소년과 도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특색 있는 종합 채널로, RAI 3는 문화 방송을 주로
담당하는 지역 채널로 지정, 각기 다양한 성격의 방송 활동을 벌이고 있다.
방송 내용에 있어 차별화, 다양화를 실시하고 있는 RAI는 보다 효과적인
경영을 위한 조직 변혁도 기획 중이다. 새로운 회장 로베르토 자카리아(Roberto Zaccaria)는
RAI를 독립 계열사를 거느린 연계 그룹 사업체로 변신시키고자 한다. 신임 회장의
구상에 따르면, 이들 독립 계열사들은 독자적인 재정을 보유한 독립 경영 체제를
유지하되 서로 연관 관계를 지니며 상호 발전에 도움을 주는 일군의 사업체를 이루게
된다. 이들 독립 사업단은 RAI 1과 RAI 2를 주축으로 하는 사업체를 비롯, RAI 3과
전문 채널을 하나로 묶는 계열사, 라디오 사업체, 텔레비전 제작 및 방송 사업체
등으로 구분된다. RAI는 장기적 안목의 구조 분산과 이에 따른 인원의 재배치 등을
통하여 이를 실현할 예정이다.
4년 전부터 인원 절감을 단행하며 이제 궤도에 오른 RAI가 현재 당면한
또 다른 문제는 사유화에 대한 논란이다. RAI측은, 지금으로서는 RAI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방송(프로그램 송신)에 대한 사유화의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한다고 밝히고
있다. 반면, 편집 분야나 저작권을 비롯한 각종 권리 양도 분야, 상업적 차원의 매매
분야 등은 민영 사업자들의 참여를 고려 중이라는 것이 공영 방송의 설명이다. 사유화
논의 등 RAI의 주요 운영을 책임지는 행정위원회는 이탈리아 상원과 국회가 각기
다른 정당의 균등을 교묘히 맞추어 가며 임명한다. 따라서 이 역시 마지막 결정권은
국회 소관에 속한다.
유럽연합, 이탈리아 공영 TV에 대해 엄격한 규제 사항을 부과
이탈리아 국회가 비록 아직까지 이렇다 할 사유화의 의지를 표명한
바는 없으나 이제까지 눈에 보이지 않게 방송 제한을 완화해 온 것은 사실이다. 이같은
이탈리아 방송계의 조짐에 유럽연합은 1998년 4월 '범유럽 텔레비전(국경 없는 텔레비전)'
조항을 통해 유럽 프로그램의 제작 및 방영 분야에서 이탈리아의 공영 텔레비전과
관련하여 엄격한 규제 사항을 부과한 바 있다.
범유럽 텔레비전 조항에 의하면, 유럽 공영 방송사는 한 달 총 방영
시간의 절반을 최근 5년 안에 제작된 유럽 제작물 방영에 할애하여야 하는 한편,
연간 광고 수익의 10% 이상을 유럽 프로그램의 구입에 투자하여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범유럽 텔레비전 조항은 RAI의 경우 평균 할당량에 10%의 쿼터를 첨가,
부과하고 있다. 즉, 1999년 RAI는 그 광고 수입의 20% 이상 ― 약 16억 프랑 ― 을
유럽 제작물의 구매 혹은 유럽 방송사와의 공동 제작에 투자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제는 유럽, 특히 프랑스 제작사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
프로그램의 구매에 있어 독일에 이어 최대 구매액을 기록하고 있는 이탈리아가 유럽
제작물의 수입을 늘린다면 그 이익은 바로 프랑스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 제작물의 수입 외에 RAI가 신경을 써야 할 분야는 합작의 의무이다.
이는 디지털 방송을 눈앞에 둔 RAI 전문 채널의 새로운 발전 전략에 부합하는 것이니만큼,
RAI에게는 큰 부담이 될 듯싶지는 않다. 기존하는 두 개의 전문 채널로 어린이 방송,
문화 방송을 실시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공영 방송은 7월까지 요리·공연·예술·영화
등 여섯 개의 채널을 부가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이들 새로운 전문 채널들은 Canal
Plus가 운영하는 Di Pi 다발 방송(부케)의 일환으로 방송될 예정으로, 유럽
공영 방송사들과의 합작 프로그램은 이 새로운 전문 채널의 편성표를 채우게 될 것이다.
이에 RAI는 지금부터 2001년까지 전문 채널 분야의 시장을 적극 개척하여 그 10%를
확보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다.
이처럼, 이탈리아의 공영 방송사는 상업 방송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수익성을 증대시키려는 의지와 공영 방송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를 기대하는 유럽연합의
입김 속에서 그 돌파구를 찾고 있다. 프로그램 구매나 합작 계획으로부터 사업체
자체의 구조 변혁까지 내다보는 RAI의 개혁안은, 유럽 방송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한편 공영 방송의 활동이 부진한 몇몇 유럽 국가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럽 방송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ㅇ 참고 : Le Monde 3. 31.
ㅇ 정리 : 오소영(프랑스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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