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통권 51호] 'Public Journalism'의 배경과 문제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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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기타 | 등록일 | 99.12.18 | ||||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 조회수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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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다 히로시(藤田博司/上智大學 敎授) 1990년대 미국의 저널리즘에서 주목되는 동향 가운데 'Public Journalism' 혹은 'Civic Journalism'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굳이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시민과 저널리즘을 보다 긴밀히 연결하는 보도방법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민주사회에서 건전한 저널리즘의 역할은, 시민이 민주정치의 과정에 참가하고 직접, 간접으로 다양한 결정에 관여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점에 있다. 그렇지만, 1990년대 미국의 저널리즘이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담당했나 물을 때 의문시되는 점이 많다.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주로 현장의 저널리스트들이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시도가 바로 퍼블릭 저널리즘이다. 이러한 시도는 1990년대 초, 캔서스주, 노스캐롤라이너주, 위스컨신주의 지방 신문사나 방송국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 방법은 저널리즘 현장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그에 공감하는 저널리스트나 연구자 사이로 확대되고 있다. 90년대 후반인 지금 퍼블릭 저널리즘을 나름대로의 형태로 실천하는 미디어는 지방지나 지방 방송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미치고 있다. 물론 이 방법이 미국의 저널리즘에서 완전한 시민권을 획득한 것은 아니다. 유력지의 저널리스트들은 강하게 비판하고 있어 퍼블릭 저널리즘이라는 생각이 미국 저널리즘의 주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널리즘의 현상에 대해 시민 사이에서도 강한 불만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불만에서 출발한 것인 만큼 퍼블릭 저널리즘의 시도가 일과성 운동으로 머지 않아 잊혀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현재 진행중인 논의가 앞으로 저널리즘의 바람직한 모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퍼블릭 저널리즘의 배경과 논의의 쟁점, 그리고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시민에게 정치 참여를 촉구한다 '퍼블릭 저널리즘'에 대해서 확립된 정의 내지 엄밀한 행동지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이를 제창하고 있는 뉴욕대학의 Jay Rosen 교수에 따르면, 그것은 '사람들을 공공적 생활로 끌어들이고, 정치 과정에 참여시켜 민주국가 시민으로서의 견해와 기술을 갖도록 촉구하는' 것을 저널리즘측에서 지원하는 것이라고 한다.1) 미국에서도 지역사회나 공공의 문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은 점차 희박해지고 있다. 사회에 등을 돌리고 자신의 틀 속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국정 선거에서의 투표율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점이 그러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흐름에 쐐기를 박고 시민의 눈을 다시 지역사회와 정치로 돌리기 위해 저널리즘도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 로젠 교수의 주장이다. 어떤 방법을 택하는가는 각 현장에서의 시도에 맡기고 있다. 단 최근, 각지에서 실천되고 있는 다양한 시도 가운데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저널리즘과 시민의 결합을 강조하기 위해 미디어가 시민 의식조사나 토론집회 등을 통해 시민의 의사를 형성해 내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시민의 사회 참여, 정치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미디어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자의 노력 가운데는, 이제까지 미디어가 뉴스보도에서 취해 온 중립적, 방관자적 자세를 바꿔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방책을 제창하는 데까지 나가고자 하는 생각도 있다. 이러한 방법의 원형을 만든 것은 캔서스주 위치타의 신문 이 신문이 이러한 보도자세를 취한 것은 1988년 대통령 선거전 보도에 대한 반성 때문이었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 민주당의 마이클 듀카키스가 출마한 그 선거에서는 대대적인 텔레비전 광고를 활용하여 허위, 왜곡, 중상, 비방을 마다 않는 선거전(Negative Campaign)이 전개되었다. 더욱이 미디어는 양 진영의 정보조작에 휘말려 '사상 최악의 선거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제까지의 선거보도는 자칫 후보자의 동정이나 지지율 경쟁에 치우쳐, 시민이 관심을 갖는 선거의 쟁점이나 지역의 문제는 등한시되기 쉬웠다. 미디어가 전하는 뉴스와 시민의 관심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었다. 바로 그러한 점이 시민의 정치 참여에 대한 관심을 빼앗고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강화되는 오락화와 수익 중시
시민과 저널리즘의 단절이 지적되는 보도 자세는 1970년대 이후 꾸준히 계속되고 미디어의 'Infortainment(Information+Entertainment)' 지향성과 그를 재촉하고 있는 수익 우선의 '기업 저널리즘'과 깊은 관계가 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개발되고 보급된 ENG, SNG 기술은 텔레비전에 의한 뉴스보도를 재미있게 함으로써 여론에 대한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뉴스보도 가운데 텔레비전의 시각적 뉴스가 한층 중요시 되어 정치도 정치적 쟁론등 내용보다는 이미지를 다루는 겉핥기 식으로 바뀌었다. 이미지 중심의 정치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 4년마다 치루는 대통령선거였다.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신문보도 태도도 바뀌었다. 대부분의 신문이 텔레비전에 대항하기 위해 사진이나 도형을 많이 이용하고 지면을 컬러화하여 시각성을 높였다. 기사도 딱딱한 내용보다는 부드러운 내용이 선호되어 읽기 쉽게 하기 위한, 다시 말하자면 신문을 텔레비전에 근접시키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90년대 뉴스보도는 오락적 성격이 강해지고 가십이나 스캔들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인포테인먼트'라 불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선거보도가 후보자의 동정이나 가십, 비난에 대한 응수 등으로 일관하여 표면적 이미지 이상의 것을 전할 수 없게 된 것도 이러한 인포테인먼트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뉴스보도의 인포테인먼트화는 보다 많은 독자, 시청자를 획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신문 구독이 줄어들고 방송 미디어의 다양화로 시청률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미디어 기업으로서는 생존을 건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신문에서는 계열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1996년 현재 그룹기업의 계열하에 있는 신문은 미국의 전 일간지 4/5에 달하고 있다(60년대는 1/4 수준이었다).3) 방송에서는 80년대 후반 이후 3대 네트워크가 차례로 제너럴 일렉트릭, 웨스팅하우스, 디즈니 등 거대자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케이블TV, 디지털방송의 분야에서도 미디어·통신분야의 거대기업이 합종연횡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한 결과로 미디어 사업에서도 수익을 중시하는 자본의 논리가 우선시되는 경향을 낳았다. 신문의 뉴스에서 노력과 시간이 드는 조사보도가 점차 사라지고, 텔레비전에서도 돈이 들지 않는 값싼 프로그램 제작이 장려된다. 이제까지 뉴스를 중시해 온 3대 네트워크마저도 80년대 후반부터 취재부문의 축소, 정리가 진행되고 있다. 효율적으로 독자, 시청자를 확보하려는 보도의 인포테인먼트화는 '기업 저널리즘' 혹은 'Bottomline Journalism(손익계산 우선형 저널리즘)'이라 불리는 수익을 중시하는 자본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객관보도의 원칙에서 대립
퍼블릭 저널리즘은 현재 지방의 미디어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미국 저널리즘의 주류에 속하는 사람들로부터는 강한 비판과 의혹의 눈총을 받고 있다. 예를 들면, 퍼블릭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의 근거는 주로 두 가지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둘째는, 시민의 의향을 모으려는 나머지 미디어로서의 주체성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시민과 미디어의 괴리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퍼블릭 저널리즘은 시민의 의사와 관심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 미디어 스스로 토론집회를 열어 시민과 대화를 갖는다든지 여론조사등을 통해 시민의 의식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보도의 주제나 시각을 결정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극단적으로 추진되면 미디어 보도가 독자나 시청자에게 아부하는 쪽으로 기울기 쉽다는 지적이다.
과연 퍼블릭 저널리즘은 객관주의 보도의 틀을 깨뜨려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확한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지 않다. 한 편에는 미디어도 '미디어, 제3자'의 입장을 버리고 자기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역사회(community) 속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미디어의 책임이라 주장한다. 다른 한 편에는 종래 뉴스보도의 개혁을 모색하여 퍼블릭 지널리즘의 방법에 부분적으로 동조하지만, 객관주의 보도원칙을 버리는 것에는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두 번째 점에 대해, 퍼블릭 저널리즘을 추진하고 있는 현장의 사람들 대부분은 미디어로서의 주체성이 상실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민의 의식과 관심의 소재를 보도에 참고하기는 해도 거기에 안주하지는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이다.6)
객관주의 보도는 이제까지 미국의 저널리즘이 장점으로 여겨온 것으로 그 원칙을 뛰어 넘는 주장을 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퍼블릭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과 반발은 격렬하다. 앞으로 퍼블릭 저널리즘의 방법이 더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되더라도 전통적인 저널리즘측으로부터의 저항은 계속될 것임에 틀림없다.
원래 미국 저널리즘의 본류가 지금까지 객관주의 보도원칙을 순수하게 지켜왔던 것은 아니다. 기자, 편집자의 주관이 섞인 해설이나 분석은 뉴스면에서도 사실상 인정되었으며, 조사보도나 캠페인 보도를 통해 미디어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냈던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퍼블릭 저널리즘도 특별히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이전부터 시도되었던 여러 가지 방법의 연장선상에 있는 또 다른 한 가지로 파악할 수도 있다.
공통의 목적을 지향한다
퍼블릭 저널리즘의 시도에 차가운 눈총을 보내고 있는 주류 미디어도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 드러난 보도자세를 좋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워싱턴 포스트>의 저명한 정치기자 데이비드 브로더는 1988년 선거가 끝난 후 정치보도의 자세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메리트로 하여금 퍼블릭 저널리즘을 실천하게 한 동기의 하나는 브로더의 칼럼이었다고 한다).
또, <뉴욕 타임즈>의 편집국장 진 로버츠는 신문의 인포테인먼트화와 기업 저널리즘을 비판하고 내용이 없는 뉴스보도를 배척하여, 시민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본질적인' 뉴스보도에 힘써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7)
브로더와 로버츠는 보도 개혁의 방법으로 퍼블릭 저널리즘이나 시빅 저널리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브로더는 미디어와 시민 사이에 단절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로버츠도 미디어가 시민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보도의 임무는, 선거민이 민주제도 아래서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중략) 신문이 피상적이 되고 내용이 빈약해 지면 독자나 지역사회와의 관계도 소원해 지고 만다."는 로버츠의 주장은 메리트의 주장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뉴스보도의 현상에 불만을 느껴 퍼블릭 저널리즘을 실천하는 지방 미디어 종사자들과 그 방법에 비판적인 유력지 저널리스트들의 생각은 적어도 그들이 목표로 하는 점에 관한 한 별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차이에 있다. 결국 객관주의 보도원칙에 대한 해석의 차이이다. 명분상의 논의에 얽매이면, 쌍방의 타협점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보도의 개혁을 목표로 하는 미디어로서 궁극적인 목표를 공유할 수 있다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각자의 방법을 통해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위험성은 있다. 퍼블릭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측은 객관주의 보도원칙을 버림으로써 그 뉴스보도에 대한 독자, 시청자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 역으로 이를 비판하는 측도 이전과 다름없는 보도를 계속함으로써 독자나 시청자로부터 따돌림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밥법이 90년대 미디어에게 보다 유효하고 실제적인가는 결국 실험을 거듭하여 그 성과를 계산해 보는 도리 외에는 없다.
어떤 방법이 옳든, 또 한 가지 보다 중요한 문제는 미국의 미디어가 강력한 기업 저널리즘의 흐름에 저항하여 시민과 저널리즘의 관계를 강화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개혁이 진정으로 보다 '본질적인' 뉴스보도를 지향한다면, 당연히 새로운 경비증가를 예상할 수 있다. 현재 미디어계의 대세로는 커다란 지출증가를 필요로 하는 개혁을 기업 저널리즘이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다. <뉴욕 타임즈>나 <워싱턴 포스트>와 같은 유력지에서는 아직도 편집측이 주도권을 잡고 개혁을 추진해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방의 미디어나 계열에 속해 있는 미디어로서는 경영측의 수익 우선 요청에 대항하여 개혁을 추진하기란 너무 어렵다. 현재까지 퍼블릭 저널리즘을 시도한 미디어 가운데 계열지가 적지 않다. 그것이 경영측의 개혁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장 지출이 크게 늘지 않는 단계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앞으로 이 실험이 광범위하게 지속되어 경비문제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현장이 과연 어떤 사태에 직면하게 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퍼블릭 저널리즘의 성패는 그 후 판단할 일이다.
[ジャ-ナリズム硏究 '97. 봄. No.150]
1) Rosen, Jay and Davis Merritt, Public Journalism : Theory and Practice. dayton, Ohio : Kettering Foundation,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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