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통권 30호] 영국 소우프 오페라의 리얼리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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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기타 | 등록일 | 99.12.18 | ||||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 조회수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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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방송사들이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는 규칙 중의 하나는 '영국 시청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국의 방송사들이 독창성 있거나 새로운 프로그램의 포맷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영국 시청자들이 갖고 있는 뿌리깊은 보수성을 역설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이 같은 규칙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다른 장르의 프로그램보다 더욱 명백하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소우프 오페라의 경우 ITV의 'Coronation Street(1960)'와 'Emmerdale(1972)', Channel 4의 'Brookside(1982)', BBC의 'EastEnders(1985)'는 여전히 인기 순위에서 선두를 점유하고 있다. Granada Television이 제작하고 있는 'Coronation Street'는 36년째 계속되고 있으나 시청률 1위를 빼앗기지 않고 있다. 매 에피소드마다 거의 20%의 영국인이 시청하고 있는데 1주일에 두 번 방영하는 것과 재방송까지를 포함하면 매주 2000만 명 이상이 시청하고 있다. BBC는 공영방송에는 소우프 오페라가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1985년부터 'EastEnders'를 제작해 오고 있는데 매주 1500만 명 정도의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다. 하나의 소우프 오페라가 짧게는 10년이상 36년이라는 기간 동안 방영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영국 소우프 오페라의 미적 특징인 리얼리즘의 추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론 장기간 방영된다는 것이 리얼리즘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프라임타임 시리즈 역시 장기간 방영되지만 그것들이 리얼리즘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영국의 소우프 오페라들이 리얼리즘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주요 인물이나 무대가 노동 계급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소우프 오페라는 'Dallas'나 'Dynasty'처럼 화려한 생활을 하는 상류층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고 무대 설정 역시 평범한 일상생활에 맞게 꾸며져 있다. 물론 이것은 영국의 텔레비전 산업이 미국의 주요 네트워크처럼 높은 예산을 투입할 수 없다는 사실과 관련될 수 있지만, 이와 같은 산업적 측면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것은 영국 문화에서 노동계급의 문화가 차지하는 역할이 역사적으로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Hoggart가 'The Uses of Literacy(1957)'에서 미국 대중문화가 영국으로 확산되면서 사라져 가는 영국 노동계급 문화의 건강함과 따뜻함, 이상적인 어머니로서 노동계급 어머니상을 그리워 했던 것을 'Coronation Street'와 'EastEnders'는 담아내고 있다. 영국 노동계급 문화에 대한 향수와 건강함이 소우프 오페라를 통해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어머니로서 노동계급의 강하고 인내하는 어머니상은 소우프 오페라 내러티브에서 중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것은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강한 남성상을 기본 모티브로 삼고 있는 미국의 장기적인 드라마 시리즈와 대비되는 점이다. 노동계급 문화에 대한 집중력 있는 묘사는 인물의 다양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들 소우프 오페라들은 특정 스타에 의존하도록 인물을 설정하지 않는다. 드라마가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인물 설정과 묘사의 밀도감에 의존하는 것은 리얼리즘을 구현할 수 있는 또 다른 국면이다. 말하자면 드라마에서 총체성과 전형성이 관심의 대상인 것이다. 사실상 장기적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우프 오페라에서 특정 스타의 역할이 강조될 때 오히려 전체적인 드라마의 서사 구조가 깨질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야기의 연속성과 역사(장기간 방영됨으로써 각각의 인물이 고유한 個人史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가 강조되는 소우프 오페라에서 갑자기 특정 인기 스타가 등장함으로써 비중심적인 인물의 중요성을 무너뜨리는 전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소우프 오페라가 장기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이야기의 구조는 영국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쟁점들이 끼워질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구조와 일상생활의 연속성이 언제나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미혼모의 문제가 사회적 쟁점이 되었을 경우 소우프 오페라에서 미혼모 문제를 다루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등장 인물은 허구적 인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인물로서 시청자 앞에 나타난다. 소우프 오페라가 리얼리즘을 강조한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멜로드라마적인 장치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멜로드라마에서 강조되는 감정적 처리나 분명한 선악의 개념이 소우프 오페라에서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Dallas'에서처럼 언제나 악인 역할을 담당하는 JR 같은 인물이 영국의 소우프 오페라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비록 한 인물이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몇 년이 지나면 그 인물이 선한 행위를 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선했던 인물이 악인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의 구조가 소우프 오페라를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각각의 인물이 드라마에서 個人史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단순한 선악의 개념을 가지고 다양한 일상생활의 현실을 묘사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의 강조는 물론 소우프 오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영국 텔레비전에서 질의 평가가 리얼리즘에 기초해 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큐멘터리나 다른 장르의 프로그램 역시 리얼리즘은 영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미적 성격임에 틀림없다. 텔레비전의 리얼리즘은 초창기 영국 텔레비전이 생중계로 방영될 때부터 이미 강조되어 온 부분이다. 기술적 한계 때문에 강조된 리얼리즘의 전통이 여전히 현재까지 영국 텔레비전의 전통으로 남아 있다. 영국 텔레비전 드라마가 추구하는 리얼리즘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 영국 노동계급의 사회적 이슈나 계급의식 등 - 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현실을 다루고는 있지만 노동계급의 사랑, 개인적 경험, 직업 문제 등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공적 영역으로서 노동현실에 대한 관심은 미약한 편이다. 이런 점에서 Jordan은 'Coronation Street'가 제한된 리얼리즘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소우프 오페라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보다는 '소박한 리얼리즘(Naturalistic Realism)에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더욱이 80년대 중반 들어 십대들이 소우프 오페라의 주요 시청자로 부상함으로써 등장인물에서 십대들의 역할에 무게가 실리고 있으며 액션물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도 삽입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소우프 오페라에서 건강한 노동계급의 현실이 주요 테마가 되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창윤/영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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