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큐멘터리 시장과 한국
한국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유럽의 전문 다큐멘터리 시장인 Sunny Side of the DOC(SSD)에 참가했다. 이곳에 참가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결정이었는데, 정해진 예산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마켓들만을 선별해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그래도 한국이 다큐멘터리 장르에 대해 걸고 있는 가능성을 반영한 정책적 판단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다큐멘터리 시장의 크기는 매우 크다. 드라마가 지극히 문화할인법칙을 많이 타는 장르라고 한다면 다큐멘터리는 이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장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한 통계 수치를 보여줄 수는 없지만, 유통되는 콘텐츠의 수명도 훨씬 긴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드라마가 판매되지 않는 지역에서도 다큐멘터리는 환영받을 수 있는 장르이며, 프랑스의 ARTE 채널이나 스페인의 RTV 등에서도 한국의 다큐멘터리가 연속적으로 편성되기도 한 점은 그러한 가능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긍정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러한 여세를 지속적으로 넓혀나가면서 동시에 드라마에만 국한되어 있는 한류를 보다 확대시키고자 하는 바람과 목표를 가지고 다큐멘터리 산업을 접근하고 있다.
■ 성장하는 Sunny Side of the DOC
Sunny Side of the DOC은 2007년 올해 18회를 맞이하고 있다. 남쪽의 마르세이유에서 지금의 La Rochelle로 터를 옮겨 잡은 지는 올해가 두 번째이다. 라로셸은 예전에는 근처 보르도의 와인을 전 세계로 수출하는 매우 중요한 항구였다. 지금도 그때의 영화를 잘 보존하고 있는 조용한 지역이다. 올해는 전 세계 46개국으로부터 전년대비 12% 늘어난 1900여명의 참가자들이 라로셸로 집결했다. 저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열정, 새롭고 창의적인 콘텐츠를 찾는 날카로운 눈, 자신의 아이디어를 사줄 파트너를 찾는 기대, 갖고 있는 콘텐츠를 팔고자 하는 마음 등을 가지고 비행기에서 다시 기차로 갈아타며 이곳 작은 마을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것은 6월말의 날씨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쌀쌀하게 불어오는 바람. 이웃나라인 영국이 최악의 홍수피해를 겪고 있듯이 유럽 전체가 이상기후에 고통을 받고 있기에 날씨에 대한 불평을 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다만 이 행사의 이름인 Sunny Side of the DOC을 계속 반복해서 불러보며 하늘을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보기는 했다. 반면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에 익숙한 유럽인들은 긴 장화에 털코트를 휘날리며 활보하고 다니는 모습은, 그 제목만 믿고 가져온 열대풍 무늬의 얇은 옷들을 겹쳐 입고서 떨고 있는 우리들과 좋은 대조를 보여주었다. 유럽의 다큐멘터리 시장의 문턱은 그만큼 높은 것인가. 하는 좌절감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순간이었다.
■ Sunny Side of the DOC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다양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을 다녀보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Sunny Side of the DOC이 만들어내는 묘한 매력의 원인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유통하는 사람들만의 특징일까, 아니면 SSD를 처음으로 조직하고, 1회 때부터 한 고집으로 이어온 설립자 Yves Jeanneau와 그를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매력일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MIPTV와 MIPCOM 등에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비즈니스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시간을 쪼개 쓰다 보니 ‘효율성’이 모든 비즈니스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 SSD에서는 “네트워킹”에 보다 초점이 맞춰질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환경이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SSD는 그 어느 곳보다도 국제적인 공동제작 프로젝트들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아이디로만 존재하던 프로젝트들이 새로운 투자파트너들을 찾아 현실화될 수 있는 곳이다. KBI가 현재 야심차게 진행중인 싱가폴 MDA와의 HD 프로그램 공동제작 프로젝트를 처음 이야기한 곳도 바로 1년 전 이곳이었다.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분위기와 자신이 환영받고 있다는 푸근한 느낌들이 넘쳐난다. 이곳은 ‘만남’을 위한 곳이다. 다큐멘터리만을 위한 공간으로 모두를 알아가는 보다 친밀한 커뮤니티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안에 조금씩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은 너무 긍정적인 생각일까. 세상의 모든 일은 결국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렇게 서로 긴밀하게 짜여져 있는 것 같은 커뮤니티에 조심스럽게 한발씩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다큐멘터리, 나아가 한국 콘텐츠의 발전을 마음속에 품고서...
■ 뉴미디어 시대의 다큐멘터리
뉴 미디어 시대를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미디어 업계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의 최대 관심사일 것이다. 다큐멘터리 또한 이러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007년의 Sunny Side of the DOC 또한 이를 가장 커다란 화두로 삼고 있다. 마켓과 함께 열리는 컨퍼런스에서는 따라서 저마다 시장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마다로 말하자면, 새롭게 늘어나는 플랫폼과 새로운 유통의 방법들이 다큐멘터리 시장, 그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새롭게 확대시키는 수단으로 봐야한다는 결론이었다. 기존 방송사들의 새로운 노력들도 소개되었다. 프랑스 공영방송사인 France 2의 경우는 네티즌들이 접속하여 다큐멘터리 제작 비하인드 클립들을 살펴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필름 웹사이트를 새롭게 오픈할 예정이다. 이 사이트에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자마자 곧이어 풋티지들을 공개함으로써 다큐멘터리 보는 재미를 보다 배가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ARTE 채널에서는 프랑스 TV제작사협회(USPA)와의 협약을 통해 ARTE 채널을 통해 방영되는 다큐멘터리들을 온라인에서 무료로 시청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다. 해적판의 범람으로 사람들에게 무시되었던 DVD 매체 또한 소규모 제작자들이 주축을 이루는 다큐멘터리 장르에 있어서는 새롭게 부각되어야 할 매체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온라인유통을 통해 제작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이윤이 돌아가는 보다 간소화된 모델들도 소개되어 제작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을 안겨주는 등 새로운 환경의 변화를 다큐멘터리가 보다 소비자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의 증대로 생각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 다큐멘터리의 진화
“다 큐멘터리가 없는 나라는 가족 앨범이 없는 가족과 같다” 이는 칠레의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 Patricio Guzman이 남긴 말이다.
다큐멘터리는 삶의 기록이며, 나 자신을 포함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하나의 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지극히 개인적이 될 수도 있지만, 가장 소중한 역사적 기록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숨겨져 있던 역사를 파헤치는 집요한 눈, 이름 없이 살아가는 식물이나, 동물,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사회를 뒤흔든 사건에 대한 냉정한 판단, 개인의 일상사에 대한 덤덤한 기록,,,, 이 모든 것이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앞의 열거는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세상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다양한 종류의 다큐멘터리가 존재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도 가족 앨범은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그 존재양식이 변할 뿐이다. 블로그를 통해, UCC를 통해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기록”에 대한 관심은 높아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다큐멘터리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누가 다큐멘터리를 아무도 보지 않는, 사라지는 장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다큐멘터리는 다만 진화할 뿐이다. 이미 한국의 영상 제작 능력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우리는 스토리에 강하며 이를 채워줄 무궁무진한 주제가 있지 않은가. 보다 확고한 신념을 갖고,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뒷받침만 이루어진다면 한국의 다큐멘터리 또한 오직 진화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 은혜정 / 글로벌마케팅팀 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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