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의 개념적 정의
한국에서의 지역방송이라 함은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서 운영되는 방송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부산 KBS, 대구 MBC, 광주 CBS 등은 소유와 운영 면에서 각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지역방송으로 분류된다. 서울에 있는 방송사들은 대부분 ‘중앙방송’이라는 명목 아래 지역방송을 관리 혹은 네트워크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영국에서는 ‘지역방송’의 정의와 관리 운영, 지역방송 콘텐츠에 대한 의무할당제 및 재정적 지원 등에 대한 논의가 세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우선 지역방송을 설정하는 기준인 ‘지역’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논의가 출발점이 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지역을 의미하는 여러 단어, 즉 ‘national’, ‘?? 지al’, ‘regional’, ‘지역 의’, ‘tow?棹?, ‘village’ 등을 지역방송을 정의하는 데 있어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실시하였다.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오프콤(Ofcom)에서 실시한 시청자 조사를 통해 국민들이 가장 쉽게 인식하는 지역적 구분법을 방송에도 적용하기로 했다.
영국에서의 ‘national’은 영국(United Kingdom)을 구성하는 4개의 독립적인 소국가 개념, 즉 잉글랜드(England)·스코틀랜드(Scotland)·웨일즈(Wales)·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를 의미한다. 그보다 하위 개념으로는 ‘regional’을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영국에서 West Midlands나 East Anglia 등의 ‘county’의 개념과 비슷하며, 한국에서는 영남권·충청권·호남권 등의 권역과 비슷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local’의 개념을 적용하는데, 각 개인이 속해 있는 도시나 마을 등이 여기에 해당되며, 한국에서는 시 혹은 군의 개념과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ultralocal’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가장 작은 규모의 지역 단위로 한국에서는 읍, 면, 동 정도에 해당하는 범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정의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에서의 지역적 구분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지역방송의 개념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는 또 다른 개념적 구분이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되어 왔다. 예를 들면, 특정 지역의 ‘local’ 상업 라디오 방송은 수백만 청취자를 커버하는 데 반해, 스코틀랜드의 몇몇 소규모 ‘local’ 라디오 방송국은 불과 수천 명의 청취자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이들 두 방송을 동일한 개념의 ‘local’ 방송국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BBC나 ITV 같은 대규모 방송사들은 각 지역별 뉴스를 소개할 때 ‘local’이라는 표현 대신 ‘regiona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표현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명칭 문제를 떠나서라도 여전히 York나 Belfast 같은 특정 도시만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방송과 Channel M과 같은 Greater Man chester area 전체를 총괄하는 지역방송을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는가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현재 영국에는 대략 1,300여 개의 지역신문과 325개의 지역 라디오 채널, 11개의 ITV 지역국(잉글랜드 8곳, 스코틀랜드 2곳, 웨일즈 1곳, 북아일랜드 1곳), 46개의 BBC 지역국(잉글랜드 40곳, 스코틀랜드 2곳, 웨일즈 2곳, 북아일랜드 2곳) 등이 운영되고 있다.
영국에서는 지역 TV의 역할에 대해 세 가지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네트워크 서비스로, 이 모델에 의하면 시청자들은 단일한 네트워크화 된 중앙방송국에서 송신하는 콘텐츠를 제공받는다. 지역 시청자들은 특정한 시간대에 해당 지역에서 제작된 방송을 선택적으로 제공받으며, 이것은 중앙방송의 보충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모델은 미국에서의 지역방송 모델과 매우 유사한 형태이다. 두 번째는 독립적인 지역방송 서비스 모델로, 여기에 따르면 해당 지역의 독립적인 방송사는 자신들의 지역에서 제작된 콘텐츠를 방영한다. 방송사들은 각각 독립성을 갖추어야 하며, 시청자들은 해당 지역방송사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만 시청할 수 있다. 현재 맨체스터 지역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Channel M이 이러한 모델에 가장 근접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혼합형 서비스 모델이 있다. 각 지역별로 독립적인 방송사들은 그들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콘텐츠를 제공하되 각 방송사들 간의 네트워크 체계를 만들어 공동 제작 콘텐츠를 제공하기도 하는 등의 지역방송사 간 연합 시스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뉴미디어 플랫폼과 지역방송의 공생관계
미디어 플랫폼의 급격한 변화는 지역방송의 역할과 역량에도 영향을 미쳤다. 디지털 방송의 보급과 다채널 방송의 실시로 인해 지역 콘텐츠에 할당되는 절대적인 방송 시간은 증가하고 있으며, DAB 디지털 라디오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인한 새로운 형태의 멀티미디어 환경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역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디지털 라디오 시장이다. DAB 방식의 디지털화는 보다 손쉽게 라디오 전송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누구나 자신만의 라디오 방송을 송출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물론 중소 지역방송사들이 송출하는 프로그램들도 청취율이 높은 편이지만, 지역 주민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 라디오 방송 중에도 지역에서 매우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채널들이 있다. 이들은 일부 지역 기업의 스폰서로 운영되는 지역방송과는 달리 자본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의견 개진이 가능하고, 지역 이슈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지역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또한 각 지역방송사들은 현재 인터넷 웹사이트 등을 통해 각 지역방송국의 정보를 제공하고, 해당 지역에서 제작되는 프로그램 소개 및 관련 관광 상품 등을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한국과 달리 영국의 방송 시스템은 런던 이외의 지역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을 일정 비율 이상 방영하도록 하는 의무할당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 프로그램 콘텐츠의 수요는 어느 정도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 2012년에 맨체스터의 Salford에 BBC와 Five 등의 주요 방송사들로 이루어지는 대규모 Media City가 완성되면 지역방송의 위상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의 방송사들은 본사가 대부분 런던에 소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런던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지만, 본사가 런던 이외의 지역으로 이전하면 아무래도 여러 가지 시스템이 분산되는 효과뿐 아니라 지역(특히 맨체스터 주변 지역)의 방송 제작 및 관련 산업이 발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영국 미디어 업계에서는 향후 미디어 산업의 중심이 다양한 지역으로 분산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BBC와 지역방송국
BBC의 지역 서비스의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로부터 2년간 시험방송 허가를 받은 BBC는 부분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형태로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1967년에 개국한 BBC 라디오 레스터(Leicester: 잉글랜드 중부의 도시 이름)였다.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BBC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들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대부분은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펀드를 받아 운영되던 지역방송국들을 공영화하면서 BBC의 지역방송국으로 변모한 사례였다.
2008~2009년에 BBC는 잉글랜드에 소재한 총 39개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1억 3,300만 파운드(한화 약 2,660억 원)를 지원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는 3,800만 파운드(한화 약 760억 원), 웨일즈와 북아일랜드에는 각각 3,200만 파운드(한화 약 640억 원)와 1,800만 파운드(한화 약 360억 원)를 지원했다. 또한 BBC는 자사의 인터넷 서비스(www.bbc.co.uk)에도 다양한 지역 관련 웹페이지를 제공하고 있다. 2008~2009년에 BBC는 온라인 서비스에만 총 1억 7,700만 파운드(한화 약 3,540억 원)를 투자하였으며, 이 중 지역 관련 온라인 콘텐츠에 투자한 금액은 2,600만 파운드(한화 약 520억 원) 규모로 나타났다.
BBC가 지역 미디어에 기여하는 바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라이선스 대금으로 운영되는 공공 서비스 방송이라는 측면에서 타 상업방송처럼 광고수익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형태의 방송을 운영할 수 있다는 점과 인구가 적거나 낙후된 지역이라는 이유로 상업방송의 외면을 받는 곳에도 양질의 방송을 제공한다는 점,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을 고려하여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지역에는 각각 지역별 고유 언어로 제작된 프로그램도 일정 시간 제공하고 있다.
영국 지역방송의 한계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지원책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지역방송은 더욱더 많은 발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은 지역방송이 정착된 북미 지역이나 유럽 대륙의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1996년 이후 영국에서는 거의 24개 지역방송 사업자가 라이선스를 취득했으나, 현재까지 지상파를 통해 지역 시청자들에게 프로그램을 송신하는 사업자는 4곳(맨체스터의 Channel M, 벨파스트의 Northern Vision NvTv, 레스터의 MATV 그리고 요크의 York TV)에 불과하다. 이 중에서 the Guardian Media Group의 소유인 Channel M이 가장 안정적인 재정을 바탕으로 좋은 콘텐츠를 생산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2009년의 경제위기로 인해 전년 대비 매출이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자칫 존립 기반이 흔들릴 위기에 봉착해 있다.
영국 정부와 오프콤은 현재 미국과 캐나다 및 타 유럽 국가의 사례 연구를 통해 지역방송의 활성화 방안을 놓고 고심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의 차이로 인한 한계는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 우선 미국이나 캐나다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는 넓은 시장의 폭과 그로 인한 광고 시장의 잠재성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한 독립 자치주 단위의 연합국가이기 때문에 자체적인 주 단위 혹은 시 단위의 방송 시장이 형성되기에 적합한 환경이기도 하다. 또한 미국과 타 유럽 국가들의 공통점은 케이블 방송이 널리 보급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잘 알려진 바대로 케이블 방송이 전체 TV 시장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독일의 경우도 80% 정도의 케이블 방송 보급률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케이블 방송의 확대는 지역별 케이블 사업자들이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으며, 지역방송 채널의 진출도 용이하게 한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13%의 케이블 보급률에 그치고 있고, 그나마 대형 미디어 그룹인 Virgin Media가 기존의 지역 기반의 케이블 회사를 통폐합함으로써 독점 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 미디어에 대한 배려는 현실적으로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인쇄매체가 여전히 강세를 나타내고 있는 영국의 현 상황도 지역방송 활성화 어려움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지역방송의 경우 독자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광고수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영국의 경우 현재 광고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매체가 신문(31%)이라는 점은 방송광고 시장의 성장을 짓누르는 가장 주된 원인으로 분석된다. 미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텔레비전 광고 시장이 전체의 38%로 가장 큰 광고 시장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국의 TV 광고는 대부분 중앙방송사들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으며, 미국의 경우는 반대로 대부분의 TV 광고가 지역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방송의 미래와 과제
영국은 2012년까지 디지털 전환을 완료할 예정이며, 영국 정부는 이후에 지역방송 활성화 방안에 대한 논의를 할 계획이다. 단기적으로 볼 때, 지역 미디어 사업자들은 인터넷 미디어의 활성화와 그에 따른 경쟁에 적응해 가는 과정으로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역방송 활성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부의 방송 관련 정책의 기조 변화다. 특히 2010년에 있을 총선에서 다수당이 유력시되는 보수당은 지역보다는 중앙 집중적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정치적 상황 변화를 감안하면서 시장의 동향을 살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다다.
새로운 형태의 지역방송 개발도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형태의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지역 관련 콘텐츠를 생산하고 방영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과 TV를 결합한 On Demand 형식의 지역 콘텐츠, 디지털 방송에서의 인터랙션 서비스를 이용한 멀티 프로그램, 지역 특산품과 연계된 홈쇼핑 채널 운영, 그리고 각 지역별 관광자원을 이용한 홍보전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와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잘 어우러진다면 현재보다 더욱 다양하고 체계적인 지역방송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중앙 집중식 방송 시스템에서는 스코틀랜드 시골 마을의 옆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1,500킬로미터나 떨어진 런던에서 현장을 취재하여 방영하면, 그제야 자신의 옆집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알게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은 배제한 채 오직 중앙에서 바라보는 관점으로 모든 콘텐츠를 제작하면 결국 지역 고유의 색채는 철저하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 참조 : - Ofcom (2009) Local and Regional Media in the UK. - Ofcom (2009) Local Media research, AprilMay 2009. - Barnett, S. (2009) Journalism, Democracy and the Public interest: rethinking media pluralism for the Digital Age, Oxford University Press.
● 작성 : 주재원(영국 런던 정경대학(LSE) 언론학 박사과정, mediakorea@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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