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인터뷰]
새로운 시장을 만든 사람
라이브 커머스 서비스 그립(Grip)의 김한나 대표
글. 조영신(SK브로드밴드 성장전략그룹장) / 사진. 김성재(싸우나스튜디오)
그립(Grip)은 2018년 이 치열한 커머스 시장에 진입한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는 30~40%씩 성장했고, 지금도 10%씩 성장하고 있다. 이용자도 늘어났고, 시간도 늘어났다. 단순히 구매를 넘어서 흥미로운 유형의 시청 행태가 될 가능성도 보이고 있다. 일부이긴 하지만 40분 이상 시청하는 이용자도 나왔다. 몇 백 만원을 구매하는 이용자도 등장했다. MAU(월 이용자수)는 20만 명 수준이다. 20만이란 숫자를 놓고 누군가는 ‘아직’이라, 누군가는 ‘벌써’라고 평가할 것이다.
그립의 김한나 대표는 마케터 출신이다. 스노우(SNOW) 등을 포함해서 네이버의 굵직굵직한 서비스를 마케팅했다. 본능적으로 고객을 읽고 기존 서비스의 약점과 강점을 읽는 것을 훈련해 온 사람이다. 그런 이가 생소한 라이브 커머스를 떠올렸다면 거기에는 꿈과 비전 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더욱이 한 여름 밤의 꿈이 아니라 동료와 손을 잡고 퇴사를 결심할 정도였다면 가능성을 넘어 확신의 단계가 되었지 않을까 싶었다. 월급쟁이로 사는 내겐 그 확신이 궁금했다.
“우리가 매일 숫자를 보잖아요. 텍스트가 감소하고 동영상이 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2013년부터 그런 징후는 나타나고 있었거든요. 네이버 검색이 줄고, 유튜브 등 영상을 통해 하울(haul, 구매한 물건을 품평하는 내용을 담은 콘텐츠), 언박싱(Unboxing), 댓글 등 실시간으로 소통이 일어나고 있었고, 영상 정보의 정확도도 높아지고 있었어요.
인터뷰 중인 조영신 그룹장과 김한나 대표
하지만 아시는 것처럼 네이버가 손을 댄 동영상 서비스가 대부분 실패했어요. 원래 기획 초기에 스노우는 동영상 기반 위에서 시작하려고 했어요. 근데 막상 서비스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보니 제약이 많더라고요. 5G는 커녕 막 4G가 태동할 때라 여전이 데이터는 비싼 재화인데, 10대들에게 권유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진을 중심으로 기획을 다시 짰어요. 물론 예쁘기보단 웃겨야 한다고 봤고요. 지금이야 ‘병맛’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B급 브랜딩에 대한 내부에서 우려도 있었거든요. 근데 반응이 온 거죠. 그때 조금 더 박차고 나갔어야 해요. AR에 기반한 스노우를 영상 통화에 적용하려고 했었는데 결국 내부 설득을 못했어요. 그래서 항상 아쉬움이 있었죠. ‘영상으로 가야 한다’는. 그리고 그 영상은 사람과 사람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라이브여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각종 데이터는 소비자가 영상에 시간과 돈을 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거든요.”
언뜻 보기에 영상 서비스에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는 믿음과 그립 서비스 기획과의 연계성을 찾기는 어렵다. 영상서비스의 가능성을 본 미디어 사업자들은 대부분 MCN등 영상 콘텐츠 제작으로 갔고, 이내 미디어 커머스란 이름으로 시장을 탐색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데이터를 만지고 작업한 김한나 대표는 다른 지점을 읽었다.
“그립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2017년도였어요. 미디어 커머스가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 그 시점이에요. 사람들은 대안으로서의 미디어 커머스를 이야기했지만 제 눈에는 지속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고객에게 온전한 정보가 가지 않으니까요.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구매한 사람들은 이내 해당 서비스를 외면할 것이 분명해 보였어요. 그런데 라이브라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서로 묻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정보의 정확도가 높아지죠. 2018년부터 라이브 시장이 열리는 것이 보였어요. 아프리카TV나 유튜브 등에서도 심심찮게 라이브를 하기 시작했고요. 독도의 오징어 어선과 통영의 굴 생산자, 동대문 의류 판매인 등이 직접 영상으로 소비자와 만나 거래를 한다는 상상을 했어요.
라이브 커머스 〈그립〉
출처 : 그립 공식 홈페이지시장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상황이 되었다고 판단했고, 이를 당시 스노우 개발팀장(현재 그립 CTO)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제 판단에 동의하더라고요. 혼자의 생각이 아니라는 확신이 서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대표에게도 아이디어를 이야기했더니, 늦추지 말고 당장 시작해 보라고 응원해 주셨어요. 시드머니도 투자해 주시겠다고 하시고. 몸이 가만있지를 못 하겠더라고요. 당장 뭘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났죠. 회사를 나오기로 마음먹고 시장조사를 하는데 중국에 이미 라이브 커머스가 활황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의 고민이란…. 내가 한다고 될까? 중국에서 들어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런데도 퇴사를 하고 창업을 선택했다. 세상에 없는 멋진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시작했는데, 이미 세상에 있던 모델이고, 그것도 자본과 규모를 가진 중국에서 급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퇴사를 결정했다. 확신이 있지 않고서는 힘들었을 것이다.
“제 생애 가장 힘든 결정 중 하나였어요. 중국에서 급성장 중인 라이브 커머스를 조사하고 난 뒤에 4개월 뒤인 2018년 8월에 퇴사를 결정했어요. 퇴사 직전 4개월 동안 온 세상 우려는 다 들은 것 같아요. 한국에서 동영상 가지고 성공한 사업자가 없다는 이야기나, 커머스와 플랫폼 사업의 특성상 사람과 자금이 풍부한 대기업이나 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이야기는 기본이고, 어떻게 판매자를 확보할 것이냐는 구체적인 의심까지 성공의 가능성이 아니라 실패할 이유를 수도 없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을수록 확신이 더 서는 거예요. 대기업이 하기에는 자잘한 품이 많이 가는 사업이었고, 스타트업이 하기에는 자금이나 기술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잖아요. 그러기에 조금 어정쩡한 우리가 할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 거죠. 동료들이 확보한 기술력이면 충분히 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도 동일한 생각일까. 어느새 네이버, 카카오 등도 라이브 커머스 시장에 진입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동료들이 놀리듯이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대기업 안 들어온다고 하더니 대기업 다 들어왔다”고 말이죠. 하지만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시장이 커져서 더 좋다고 보고 있고요. 그립의 경우 입점한 셀러가 이미 1만 3천 명이 넘고, 셀러를 대신해서 판매하는 그리퍼(Influencer)도 800명이 넘었어요. 장이 열렸으니, 오히려 기회가 더 많아졌다고 보고 있는 거죠.”
〈그립〉에서 활동 중인 ‘그리퍼’들
출처 : 그립 공식 홈페이지사업의 성격상 셀러를 모으는 것이 첫 시작이다. 신생 기업, 그것도 작은 기업이 시작한다고 했을 때 그 많은 셀러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 허들을 그립은 부지런함으로 넘어섰다.
“처음은 참 힘들었어요. 50명도 채 안 되는, 정확히는 49명의 셀러를 모으는데 꼬박 반 년이 걸렸어요. 지금은 반나절이면 모이는 숫자인데 말이에요. 그만큼 시작이 힘들었어요. 커머스에 잔뼈가 없었기에 인맥도 없었고요.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하는 일이 인스타그램 등을 뒤지는 일이었어요. 적합한 셀러를 직접 찾아보는 거죠. 일단 우리와 일을 같이 할 셀러라고 판단이 들면 메일을 보냈어요. 1,000통 넘게 보내는 날도 있었죠. 우리는 나름 비전까지 담아서 보냈지만, 답장이 오는 곳은 거의 없었어요. 심지어 “이런 메일 보내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고, 무섭다는 대답이 오는 곳도 있었어요. 그나마 답장이라도 보내주면 좋은 거고 무응답이 대부분이었지만요. 그래도 찾고 보내고 하는 작업을 반복했어요. 제법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최근에 연락이 오는 셀러들 중에는 과거에 우리가 메일을 보냈던 분들도 있는데, 다들 그 당시 메일이 온 줄 모르고 계시더라고요.
뾰족한 곳을 찾고 싶었어요. 수제 생산이라서 소량이지만 핫해서 사람들이 구매하고 싶은 그런 것들 말이죠. 이런 곳이라면 조금 비싸더라도 고객들이 이해하고 지불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생산자도 큰 기대 없이 시작해 볼 수 있을 거라고 판단이 들었어요. 그렇게 투자받기 전까지 버텼어요.”
실제로 김한나 대표가 그동안 한 인터뷰 내용들을 보면 시행착오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은행 결제가 안되기도 했고, 와이파이 환경이나 접속 기기의 사양 등 여러 변수들을 고민하지 못했다. 그래서 초기 시장의 반응은 냉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점을 빠르게 수정해 나갔다. 덕분에 1년도 채 되지 않아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2018년 8월과 2019년 7월 2개의 투자사로부터 총 35억의 시리즈 A(Series A) 투자를 받았다. 한국투자파트너스 정화목 수석팀장은 당시 투자 결정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립은 모바일 커머스 내 판매자와 구매자 양측 모두에게 새롭고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모델로 라이브 동영상이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깊이를 기반으로, 커머스의 넥스트 페이지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투자를 결정했다.”1)
커머스의 본질은 뭘까요? 뜬금없이 툭 하고 던졌다. 결국 본질에 대한 이해가 성패를 좌우한다. 사업 초기 반짝할 수는 있지만, 결국 고객은 본질적인 것에서 해답을 찾기 때문이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솔직히 처음부터 그 고민을 하지는 않았어요. 전 기획자로서 시작했던 사람이고, 고객의 반응을 읽고 분석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커머스를 한 경력은 없죠. 초기에는 고객 입장에서 기존 서비스의 불편함(pain point)를 개선해서 새로운 사업을 출시하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셀러와 고객이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정보를 나눌 수 있다면 중간비용은 사라질 것이고, 그만큼 셀러와 유저 모두에게 수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전부예요. 커머스의 본질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상거래니까 ‘가격’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가격은 핵심 요소일뿐 전부는 아니더라고요. 때론 ‘100원 더 비싸지만 그 셀러한테 산다’는 말이 나오니 말이죠. 지금은 가격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팬덤이 얹어진 게 ‘적어도’ 라이브 커머스의 본질이지 않을까 싶어요. 다만 팬심은 눈 뜨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걸려요. 좋은 가격이라는 기본적인 사항은 만족시키면서, 고객이 원하고 들어올 수 있는 서비스에 집중해야만 하는 거죠.”
정해진 가격이 있는데, 라이브 커머스형 상품이 아니고서야 가격을 더 낮춘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라이브의 매력은 라이브 할 때 구매하면 인터넷 최저가보다 싸다는 거예요. 라이브 커머스의 특성상 판매와 마케팅 목적이 뒤섞여 있거든요. 일종의 하이브리드인데, 입소문을 내기 위해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이용하듯이 판매자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홍보 수단으로서 라이브 커머스를 할 수도 있거든요. 큐레이팅 상품인 거죠. 게다가 일정 시간만 판매하기 때문에 시장 가격을 흐트러뜨리지 않아요.”
라이브 커머스의 장점은 저렴한 가격이다
출처 : Google Play그립은 셀러가 아니라 셀러가 모이는 플랫폼을 지향한다. 일종의 커머스의 유튜브 같은 모양새다. 유튜브도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플랫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관리 비용은 높아진다. 셀러가 1만 명이 넘었다면 그 셀러 모두가 선한 목적의 사람들이라고 단정하기 힘들다. 이제 슬슬 관리 문제가 불거질 타이밍이다. 다만, 커머스니 현재 유튜브 내에서 벌어지는 ‘뒷광고’ 논란은 없을터다.
“아직은 서비스 초기인지라 고객의 관여도가 높아요. 생각보다 유저들이 날카롭고 신고를 많이 하더라고요. 그러면 우리가 경고 조치를 해요. 예상보다 이상한 짓을 하기 힘들어요. 20-30대 여성들이 주 이용자다 보니, 어그로를 싫어해요. 하지만 장기적으론 AI 기술로 걸러내는 작업은 필요해 보여요. 유저들이 좋아요 버튼을 많이 누르는 것, 실제로 구매가 일어나는 것, 이용자가 자주 보는 것과 유사한 것을 전면에 배치하는 작업등을 자동화시켜서 문제의 발생 가능성을 줄여야 할 필요성이 있어요. 물론 모두 비용이긴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 지금부터 조금씩 투자하고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했다. 2018년 8월 론칭 후 그립은 급성장했다. 이런 표현이 지나칠 순 있지만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 이제는 시장을 지켜야 한다.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업체에서부터 롯데홈쇼핑 같은 사업자는 물론 신세계 같은 전통의 커머스 사업자도 라이브 커머스의 가능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진검승부는 이제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엔 론칭이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성장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사람과 기술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그립은 네이버, 카카오 동기 7명이 공동으로 창업한 회사인데, 서로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굳건하고, 옆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각자 알아서 자기 일을 챙기는데 그 톱니바퀴가 묘하게 서로 잘 맞물려 돌아가는 거죠. 각자가 스스로의 약점과 상대방의 장점을 잘 알고 있어요. 서비스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고, 고객의 동선과 데이터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판단을 할 때 각자의 개성이 어우러지며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조직이에요. ‘멜팅팟’보다는 ‘샐러드볼’ 같다고 할까요? 구성원들 스스로가 ‘나만 잘하면 된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해요. 그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이고 동료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거겠죠. 얼마 전에 CTO에게 ‘밖에서 우리를 걱정한다’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의 차별화는 뭘까 물었더니, ‘그냥 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걱정할 시간에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꾸준히 묵묵히 하면 된다는 거죠. 그러다보면 어느새 시장에서 인정받지 않을까요?”
그립(Grip) 김한나 대표
라이브 커머스가 한국에서 대세가 될지, 그리고 대세의 주역이 그립이 될지를 지금 현 시점에서 예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 가능성을 확신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스스로 시장에서 검증받으려고 한다는 그 자체가 시장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스타트업이 잘되고 못되고를 찬찬히 살펴보면 결국 다 사람의 문제라고 본다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립은 사람 문제 만큼은 해결된 스타트업, 거창하지는 않지만 단단한 곳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립이 한국의 또 다른 유니콘이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