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TV 화면이 푸르러졌다. 비슷한 시기에 약속이라도 한 듯 우후죽순 농촌으로 돌아가는 예능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tvN이 선보인 두 편의 농사 예능 <풀 뜯어먹는 소리>와 <식량일기>는 최근 각각 모내기철 편과 닭볶음탕 편을 마무리하며 다음 시즌을 준비 중이고, 지난 5월 KBS가 선보인 파일럿 예능 <나물 캐는 아저씨> 또한 정규편성 여부를 가늠 중이다. 만약 <식량일기>가 동물 학대라는 논란을 이겨내고 다음 시즌 편성에 성공하고 <나물 캐는 아저씨> 또한 호평을 기반으로 정규편성 된다면, 농사 예능도 명실공히 새 시대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 글. 이승한(칼럼니스트)
TV 예능 프로그램이 농사를 짓는 기획을 선보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 MBC <무한도전>은 벼농사 특집을 마련해 멤버들이 파종부터 수확까지 짬짬이 논농사를 하는 1년짜리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고, <해피선데이>(KBS) ‘남자의 자격’ 또한 ‘남자, 그리고 귀농일기’ 특집을 마련해 멤버들이 농사를 포함한 시골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는지 장기 프로젝트를 선보인 바 있다. 여성 아이돌 그룹 멤버들로 구성된 일군의 연예인들이 농사를 지으며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는 과정을 다뤘던 <청춘불패>(KBS) 또한 넓은 범주의 농사 예능이라할 수 있겠다. <인간의 조건>(KBS)의 마지막 시즌 또한 서울 한복판 빌딩숲에서 놀고 있는 옥상 공간을 활용해 농사를 짓는 게 가능한지 실험했다. 이러한 선례들의 존재에도, 비슷한 시기에 한꺼번에 농사 예능들이 몰려나오는 건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이렇게 농사 예능이 한꺼번에 등장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삼시세끼>(tvN)와 <나는 자연인이다>(MBN)에서 시작된 귀농·귀촌 리얼리티 쇼 붐을 첫 번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젊은 시청자들이 점점 OTT와 유튜브 등으로 이탈하며 TV 시청습관을 잃어가는 동안, TV 시청습관을 몸에 익힌 채 나이 먹은 시청자들은 슬슬 귀농·귀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나이대에 진입했다. 도시의 치열한 삶에 대한 대안으로 자연이 살아있는 농어촌에서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이다. 종영 직전까지 많은 중·장년층의 사랑을 받았던 프로그램인 KBS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또한 한적한 남해 바닷가에서 독신 여성들이 연대해 새로운 형태의 삶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예능 프로그램들이 점점 도시를 떠나 농촌을 찾는 이유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 원인은 점점 신선도가 떨어져 그 동력을 잃어가는 리얼리티 예능 장르 자체의 한계다. MBC <우리들의 일밤> ‘진짜 사나이’에서 정점을 찍은 리얼리티 예능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가져오기 위해 점점 더 극한에 가까운 환경으로 출연자들을 보내면서 자극의 경쟁을 벌였다. 문제는 자극이 임계치를 넘어가는 순간 쾌감보다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시청자들이 급격히 흥미를 잃는다는 건데, 그 해법으로 콘텐츠 제작자들이 선택한 리얼리티 예능의 새로운 무대가 바로 농촌이다. 푸른 들판 위로 시간이 느릿느릿 흐르는 농촌의 모습은 분명 도시의 시청자들이 쉽게 보기 어려운 그림이지만, 대신 기존의 트렌드가 지니고 있던 자극성은 월등히 낮다. 농사 예능이 괜히 ‘힐링’이나 ‘생명’과 같은 단어들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런 요소들을 가만히 따져 보면 농사 예능의 조류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텐데, 새로운 트렌드의 등장이 콘텐츠 생태계의 종적 다양성을 살찌워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드는 만큼 우려되는 점 또한 적지 않다. 그 동안 농촌과 농업을 다루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종종 빠지곤 헀던 시선의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농촌의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미화하는 시선이 첫 번째요, 리얼리티 예능의 문법을 적용해 농촌의 고생스러움을 멤버들이 극복해야 할 미션 내지는 고생으로만 활용하려는 시선이 두 번째다. 이 두 가지 함정을 극복하지 못하면 농사 예능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전자는 주로 KBS <6시 내 고향>과 같은 영농방송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줬던 그림이지만, 방송의 주 소비층 또한 농어민인 <6시 내 고향>과 달리, 명백히 도시 거주 중산층 인구를 겨냥한 새로운 농사 예능에서 이와 같은 문법을 적용하는 건 문제가 크다. KBS <나물 캐는 아저씨>를 보자. 쇼는 바쁜 도시와 부담스러운 가장의 의무에서 잠시 벗어나 들로 나가 나물을 캐서 데쳐 먹으며 유유자적하는 일군의 중년 남성들을 보여주며 농촌을 하나의 도피처로 제시한다. 이처럼 농촌의 보기 좋은 부분만 소비하는 것은, 농촌이 처한 실질적인 문제 – 열악한 인프라, 부족한 노동력, 외국인 농사인력 착취 문제, 수입 농산물 시장의 개방,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한 불안정성 증대 등등 – 를 개선하는 데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한다. 실체로서의 농촌은 사라지고, 도시 사람들이 안전하게 소비하기 좋은 이미지로서의 농촌만 제시되고 끝나는 셈이다.
후자는 예능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이 농촌을 찾으며 은연 중에 품은 복심(腹心)이다. tvN <삼시세끼>의 출연자 이서진은 PD에게 고기를 얻어내기 위해 수수밭에서의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제 처지를 ‘수수밭 노예’라 말했고, 제작진은 이서진을 비롯한 출연자들이 밭에서 끙끙대는 모습을 쇼의 주된 재미 요소로 활용했다. 일반적인 예능에서 재미를 위해 출연자들에게 고생을 시키면 의미 없는 가학이라는 비판을 받기 쉽다. 그러나 농촌에서라면 출연자들에게 무엇을 시켜도 농사라는 명분이 있기에 비판을 피하기도, 프로그램을 꾸리기에도 용이하다. 이 또한 타인의 일상을 미션으로 소비한다는 점에서 타인을 대상화하는 비윤리적인 묘사이며, 이런 묘사로는 콘텐츠의 건강함을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삼시세끼>가 시즌을 거듭하며 농업/어업에서 성취감을 찾는 출연자들의 모습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 또한 그 때문이었으리라.
새로 등장한 농사 예능 중 그나마 이 두 가지 함정을 피해갔다고 평가할 만한 쇼는 tvN <풀 뜯어먹는 소리>다. KBS <인간극장> 등을 통해 유명해진 16살 농부 한태웅과 일군의 연예인들이 함께 농사짓는 모습을 보여주는 <풀 뜯어먹는 소리>는, 일일이 사람의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농사의 고단함이나 갈수록 노동력이 부족해지는 농촌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한태웅을 중심으로 기술적 개량이 이루어지고 있는 신형 농기계들과, 드론 농법과 같은 신기술을 배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 하는 농촌의 트렌드 또한 함께 보여준다. 예능이라는 장르적 한계 상 농촌이 처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방도를 제시해주는 지점까지 가진 않지만, 적어도 농촌을 대상화하거나 낭만화하지 않으면서 농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려 고민한 흔적이 묻어난다. 이러한 시도들이 더 많아진다면, 도농 간의 심리적 거리가 줄어들어 함께 상생의 길을 고민해 보는 계기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농사 예능이 극복해야 할 점들이 많다. 각종 스케줄로 바쁜 연예인들에게, 다른 곳에 눈 돌릴 틈 없이 온전히 전념해야 하는 산업인 농업을 체험하게 한다는 시도는 자칫 흉내만 내다가 그치는 모양새로 끝날 수 있다. 실제로 tvN <식량일기>는 출연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먹는 동물들을 직접 키우며 그 과정을 살피고, 마지막엔 직접 키운 동물을 식재료로 삼아 먹을 수 있을지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가 순탄치는 않았다. 실제로 육계가 생산되는 과정을 알아보려면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한 공장식 사육을 택해야 하는데, 스케줄이 들쭉날쭉한 연예인들을 데리고 그걸 시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택한 방식 또한 관리가 잘 된 편이 아니어서, 제작진의 관리 허술로 닭들이 폭염 속에 그늘도 물도 없이 방치되는가 하면 사육장을 벗어났다가 개에게 물려 죽는 일도 발생했다. 심지어 동물권단체가 입양의 의사를 밝힌 닭들을 제작진이 임의로 근처 육계농장으로 팔아버렸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는데,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생명을 도구로 사용해도 좋은가 하는 윤리적인 질문 또한 농사 예능이 장기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다.
농촌의 오늘을 다루고 도시와 농촌 간의 거리를 좁힌다는 목표는, 콘텐츠 제작자들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방안에 대해 얼마나 깊이 고안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