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취향의 다양성과 서브컬처 Vol. 34
서브컬처는 ‘사랑을 적게 받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숫자는 적지만 서브컬처 팬덤의 콘텐츠에 대한 애정과 구매 욕구는 뜨겁다.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제작자 역시 ‘찐팬’이 되어 서브컬처 콘텐츠 속에 숨은 매력을 제대로 찾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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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처’의 개념이 주류 문화의 반대말로 통용되던 시기를 사실상 지나왔다. ‘서브컬처가 주류화되고 있다’는 표현도 이제는 시의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상은 영화관과 텔레비전보다 유튜브와 각종 OTT로, 만화는 출판만이 아닌 웹툰 플랫폼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유통되는 현재의 콘텐츠 시장에서 특정 콘텐츠나 플랫폼을 ‘주류(mainstream)’라고 지칭하는 것이 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 이슈를 접하고 관계를 맺고 콘텐츠를 소비하는 모든 과정이 각자의 알고리즘에 기반해 완전히 개인화된 피드 안에서 이루어진다. 주류가 불분명한 시대에 새삼 서브컬처를 논하려니 어쩔 수 없이 어색한 것이다.
최근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넷플릭스의 요리 서바이벌 <흑백요리사> 같은 히트작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콘텐츠는 소비층이 공유되는 법 없이 각자만의 리그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또 마친다. 믿기 어려운 사람은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또 하나의 넷플릭스 예능 <더 인플루언서> 1화를 봐도 좋겠다. 팔로워 2,700만이 넘는 틱톡커부터 구독자 200만이 넘는 유튜버까지 상당한 명성을 구가하는 ‘셀럽’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나, 그것을 보는 시청자는 물론 같은 업계에서 활동하는 참가자들조차 적지 않은 이들이 서로를 몰랐다. 시청자와 참가자 모두가 아는 유일한 유명인은 단 한 사람, 텔레비전 시대부터 왕성하게 활동한 연예인 장근석이었다.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이 분명했던 콘텐츠 시장이, 서로가 서로의 비주류가 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음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셀럽’들이 서로를 몰라본 <더 인플루언서>의 한 장면은 주류와 비주류 구분이 흐릿해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넷플릭스
이런 혼란스러운 시장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자기 몫을 쟁취해내는 콘텐츠를 내보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출발점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방법이 아니라 ‘누구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의 방식이 다분화된 만큼 타깃 소비층을 향한 섬세한 이해가 요구된다. 만들고자 하는 콘텐츠의 주요 소재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떤 유형의 소비자들이 선호하고, 그 소비자들이 어떤 창구를 통해 콘텐츠를 향유하고 값을 치르는지, 그들이 함께 즐기는 다른 분야는 무엇인지 같은 세부적인 질문들이 필요하다.
웹툰을 예로 들어보자. 웹툰 독자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접근해서는 그 누구도 만족시키기 어렵다. 예를 들어 귀여운 그림체로 사소한 개그와 일상을 전달하는 ‘일상툰’과 남성 인물 간의 로맨스를 그린 ‘BL(Boys Love)’ 장르는, 웹툰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제공과 소비 방식 모두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 한다. 네이버웹툰의 일상툰 <마루는 강쥐>와 레진코믹스의 인기 BL 작품들을 묶은 ‘팀레진’ 팝업스토어 사례는 각자의 소비자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에 적합한 방식으로 대응해 큰 성공을 거둔 사례다.
<마루는 강쥐>는 네이버웹툰이라는 대중성 높은 플랫폼에서 귀여운 그림체와 가벼운 분위기로 무료 연재됐다. 반면 팀레진 작품들은 훨씬 덜 대중적인 플랫폼인 레진코믹스에서 유료로 판매되었고 미성년자는 볼 수 없는 성인 BL 웹툰들이다. <마루는 강쥐>의 독자 일부는 아예 팀레진 작품들에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취향의 차이로 <마루는 강쥐>를 볼 수 있더라도 굳이 보지 않는 팀레진의 독자들이 존재한다.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더 높은 장르 특성과 연재 환경을 고려할 때, 분명 <마루는 강쥐>의 소비층이 팀레진보다 넓을 것이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쪽이 다른 쪽에 포함되는 형태가 아닌, 꽤 배타적인 형태의 소비층일 것이라 예상한다. 그만큼 일상툰과 BL 장르는 대척점에 놓여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능에서 다큐를 기대하지 않고 연극에서 노래를 기대하지 않듯이, 장르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 또한 다르다는 사실 역시 콘텐츠 소비자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둘 부분이다.
<마루는 강쥐> 기적의 별 팝업스토어
ⓒ네이버웹툰
<마루는 강쥐>가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귀여운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는 쪽이라면, 팀레진의 BL들은 마치 아이돌 문화처럼 소비된다고 볼 수 있겠다. 한쪽은 귀여움이, 다른 한쪽은 잘생김이 최대 무기다. 판매된 굿즈를 상세히 비교해보면 각자가 자신의 무기를 얼마나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2024년 10월 진행된 ‘마루는 강쥐 기적의 별 팝업스토어’의 굿즈는 캐릭터를 활용한 문구와 생활용품 위주였다. 봉제로 만든 인형과 키링, 캘린더와 다이어리, 스티커, 슬리퍼, 무선마우스 등이 귀엽고 산뜻한 디자인으로 제작되었다. 반면 ‘2024 팀레진 팝업스토어’의 굿즈는 장식 목적의 상품 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마루는 강쥐> 팝업스토어에서도 아크릴 스탠드 장식과 포토카드 홀더를 판매하긴 했지만, 팀레진 쪽이 디자인도 훨씬 다양했고 등장인물의 미모에 충실한 느낌이었다. 파스텔톤인 <마루는 강쥐> 굿즈가 귀엽고 뽀송뽀송하고 좀 더 실용적인 분위기라면, 어두운 색의 팀레진 굿즈들은 멋있고 퇴폐적이고, 쓸모없어 보이지만 잘생긴 것이 곧 쓸모라는 인상을 주었다.
팀레진 팝업 굿즈
ⓒ2024 라포 & LEZHIN ENTERTAINMENT
모두가 주류인 동시에 비주류처럼 유통되는 지금의 시장에서, 어떤 콘텐츠들이 더 큰 대중성을 갖추는 것은 전략의 탁월함 때문만이 아니다. 모두가 성인 BL 웹툰을 보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는 것처럼 소재와 유통 환경 등에 따른 콘텐츠의 태생적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흑백요리사>의 사례도 그렇다. 분명 규모와 완성도 면에서 여러 흥행 요인을 갖춘 수작인 것은 맞지만, 그토록 흥행할 수 있던 데는 요리라는 소재 자체의 보편성이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태생적 한계를 가진 콘텐츠가 판매자 입장에서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는 무언가를 하필 좋아하는 소비자들은, 그 선택에 담긴 애정을 콘텐츠에 대한 높은 충성도와 구매력으로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레진코믹스뿐만 아니라 미스터블루나 봄툰 등 BL 장르를 주축으로 20대~30대 여성을 공략하는 플랫폼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다. 이들 플랫폼은 소비층의 폭은 좁지만 애정과 구매 욕구는 열렬한 독자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대응함으로써 자기들의 몫을 확보하고 있다.
미스터블루, 레진코믹스 등은 숫자는 작지만 콘텐츠에 대한 애정은 큰 독자들에게 집중한다.
출처 | 미스터블루 홈페이지
콘텐츠 제작사에게 <흑백요리사> 같은 빅히트작은 하나의 ‘로망’일 것이다. 하지만 콘텐츠 시장의 공급과 소비 방식은 이미 상당히 분화되었고, 점점 더 빠르게 파편화되어가는 중이다. 이러한 와중에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무조건 멀리 또 높이 가려는 욕심을 내기보다는, 가야 할 곳에 명확하게 도착하는 것이 최선의 목표일 수도 있다. 정확히 겨냥한 타깃을 확실하게 만족시킨 뒤 여진(餘震)을 기대하는 것이 훨씬 승산 있지 않을까. 줏대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콘텐츠보다는 자신을 알아봐 줄 누군가를 위해 정성을 갈고닦는 콘텐츠가 많아지면 좋겠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콘텐츠 시장에서 한눈팔지 않고 자신을 향해 달려와 줄 콘텐츠를 소비자 역시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글. 최윤주(웹툰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