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NN스토리 4

소비 취향의 다양성과 서브컬처  Vol. 34

Special N N스토리 4

비주류에서 주류로, K-서브컬처 게임 성공기

게임은 다른 콘텐츠 장르보다 서브컬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게임 산업에서 서브컬처는 비주류에서 주류로 성장했다.
K-서브컬처 게임 또한 국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는 서브컬처를 어떻게 도입해야 할지 고민하는 다른 콘텐츠산업에도 인사이트를 준다.

<블루 아카이브> 게임
Ⓒ넥슨

서브컬처 장르는 게임 흥행의 보증수표다. 단순한 흥행으로 끝나지 않고 캐릭터나 굿즈 등 관련 상품들도 덩달아 대박이다. 지난 5월 넥슨은 서브컬처 게임 <블루 아카이브> 2.5주년 페스티벌을 열었다. 킨텍스에서 진행된 이 행사에는 레벨 60 이상 캐릭터를 키운 유저에게만 티켓을 파는 제한적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파가 몰려 행사장 일대를 마비시킬 정도였다. 지난 10월, 서브컬처 게임의 대명사 <원신>의 개발사인 호요버스(미호요)가 연 축제 호요랜드 역시 4일 간 5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했다.
서브컬처 게임이 흥행하면서 온라인 RPG 위주의 국내 게임시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서브컬처 게임 개발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정도로 전체 게임 시장을 이끄는 중요한 장르로 떠올랐다. 몇 년 전만 해도 일부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인기였던 비주류 장르가 지금은 서로 모시려고 혈안이 된 게임으로 변했다.

올해 <블루 아카이브> 행사에는 킨텍스를 몇 겹이나 둘러쌀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넥슨

비주류에서 주류로, 서브컬처 게임의 3가지 매력

서브컬처(Subculture)는 하위문화를 뜻한다. 사전에서는 “어떤 사회의 지배적·전통적 문화에 대하여, 비행 소년·히피 등 특정 사회 집단에서 생겨나고 자라는 독특한 문화. 하위문화”라 정의하고 있다. 사회적 주류 문화와 가치관으로부터 일탈한 소외된 그룹이 즐기는 문화라는 말이다. 뜻 그대로 서브컬처 게임도 비주류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실제로 한국 온라인 게임의 전성기였던 2000년대만 해도 시장의 주류는 <리니지>와 같은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 게임)였다. 그 시절 서브컬처 게임은 예쁜 캐릭터만 앞세워 일부 극성 팬들에게 어필하는 오타쿠 게임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게임 인구의 저변이 넓어지고 다양성이 확보되면서, 서브컬처 게임들도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서브컬처 게임은 기존 게임에 비해 명확한 강점이 있다. 첫째, 확장성이 뛰어나다. 게임 자체로 머무는 게 아니라 다양한 문화 매체들과 결합해 재생산되고 확장해가는 유연성이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소설, 팬시, 완구, 피규어 등이 서브컬처 게임과 접목되면서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둘째, 강력한 팬덤이 있다. 서브컬처 게임은 예쁜 미소녀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 강력한 팬덤을 확보했다. 게임 자체보다 게임 속 캐릭터의 인기가 흥행을 좌우한다. 잘 만든 캐릭터는 K-팝 아이돌과 같은 인기를 구가한다. 캐릭터의 인기가 없으면 그 게임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성공할 수 없다.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팬덤은 흥행 롱런의 동력이 되며 또한 팬덤을 타겟으로 한 다양한 파생상품으로 확장될 수 있다.
셋째, 다양한 콘텐츠 소비방식이다. 한국형 MMORPG는 캐릭터를 만들고 전투하고 아이템을 모으는 등 개발자가 만들어 놓은 콘텐츠를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서브컬처 게임은 유저가 콘텐츠를 소비하고 다시 재생산하는 패턴을 가지고 있다. 팬들이 게임 캐릭터를 재가공해 만화를 만든다든가 심지어 다른 형태의 게임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게임 캐릭터의 생일이 되면 실존 인물의 생일인 것처럼 함께 모여 생일파티도 한다. 인기 있는 게임은 팬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게임 음악회를 열고 함께 춤추고 즐기기도 한다. 마치 K-팝 팬클럽처럼 적극적으로 게임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다. 팬덤을 중심으로 코어 유저들을 확보하고 다양한 파생상품들을 만들어 신규 유저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 게임사 입장에선 서브컬처 게임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서브컬처의 본산 일본에서 최초로 1위를 찍은 중국 게임 <벽람항로>
Ⓒ벽람항로 갤러리

한·중·일 서브컬처 삼국지가 시작되다

서브컬처 게임은 어떻게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나? 서브컬처의 가능성을 처음 발견한 나라는 일본이다.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J-팝 등 엔터 산업이 발전한 일본은 이미 80년대부터 서브컬처 종주국 자리를 지켜왔다. 오타쿠 문화라고 다소 폄훼되기도 했지만 서브컬처는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로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2010년 이후 일본 게임 산업이 침체기로 들어서고, 일본산 서브컬처 게임이 한풀 꺾이자 다른 곳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일본 서브컬처 문화를 발 빠르게 받아들여 새로운 서브컬처 강국으로 자리 잡은 중국이다. 중국은 강력한 인력과 자본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서브컬처 게임을 시장에 쏟아냈다. 처음엔 일본 게임을 그대로 베낀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게임의 퀄리티도 일취월장해 지금은 일본 게임을 능가할 정도다.

중국 게임 <벽람항로>는 일본 시장에서 매출 순위 1위를 차지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표절이나 하는 중국 회사들이 서브컬처 종주국 자리를 넘본다는 것만 해도 일본에겐 충격이었다. 중국 돌풍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 서브컬처 게임사 호요버스(미호요)가 만든 <원신> 글로벌이 ‘대박’을 치면서 서브컬처 시장의 무게추가 일본에서 중국으로 넘어갔음을 알렸다. 그야말로 게임 분야의 ‘중국몽’을 실현한 셈이다. 중국 게임에 자존심을 다친 일본은 <우마무스메> 등 흥행작을 내놓았지만 중국의 양적 공세에서는 밀리는 형국이다.

서브컬처 본가 일본이 중국 게임의 공습에 맞서기 위해 만든 <우마무스메>
Ⓒ카카오게임즈

대륙과 열도에 맞선 K-서브컬처 게임

그렇다면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한국은 일본과 중국의 게임 전쟁 속에서 마치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형국에 몰렸다. 이미 한국 게임은 MMORPG의 글로벌 진출 실패로 좌절을 겪었다. 외국 유저들은 한국 MMORPG의 과도한 과금 방식과 지루한 ‘레벨 올리기 노가다’에 관심이 없었다. MMORPG는 한국 내수시장에서만 ‘반짝’하는 게임으로 전락했다. 한국형 MMORPG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다는 게 확인됐다. 그렇다면 어디서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한국 게임은 서브컬처 게임으로 방향타를 돌렸다.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게임사는 맏형격인 넥슨이다. 넥슨은 게임 스타일부터 유통방식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바꿨다. 자체 개발한 서브컬처 게임 <블루 아카이브>를 한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서비스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한국 유저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어쨌든 서브컬처 본국인 일본을 먼저 잡아야 글로벌 시장에서 먹힐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블루 아카이브>는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귀엽고 매력적인 여학생 캐릭터가 서브컬처 특유의 다소 난해하고 유니크한 서사와 만나 상당한 시너지를 냈다. 특히 서브컬처 게임의 핵심인 캐릭터성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K-서브컬처 게임의 경쟁력을 입증했다. <블루 아카이브>는 작년 10월까지 전 세계 누적 매출 4억 달러, 다운로드 수 900만 건을 돌파하며 대한민국 서브컬처 게임의 역사를 다시 썼다.

K-서브컬처 게임의 새로운 역사를 만든 넥슨의 <블루 아카이브>
Ⓒ넥슨

이어 나온 게임은 시프트업의 <승리의 여신: 니케>다. 니케는 이미 일본서도 유명한 캐릭터 디자이너 김형태 대표가 ‘각 잡고’ 만든 서브컬처 게임이다. 게임은 캐릭터 디자인부터 기존의 서브컬처의 틀을 깼다. 보통 서브컬처 캐릭터는 귀엽고 예쁜 소녀 스타일이 대세다. 니케는 가녀린 캐릭터보다 선 굵고 건강미 넘치는 캐릭터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여성의 몸매를 강조하며 노골적으로 캐릭터의 매력을 표현했다. 특히 엉덩이를 부각한 캐릭터 디자인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일부에서는 너무 선정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오히려 해외 팬들에게는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특히 여성의 신체를 과감하게 묘사하는 김형태의 독특한 캐릭터 디자인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승리의 여신: 니케>는 2022년 11월 글로벌 서비스 시작 직후 구글플레이, 애플스토어 양대 마켓 매출에서 일본과 대만, 홍콩 1위, 북미 3위를 기록했다.
두 게임의 성공으로 K-서브컬처 게임은 일본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위치에 올랐다. 당연히 국내 게임 시장에도 서브컬처 붐이 일기 시작했다. 국내 대형 게임사들도 앞다퉈 서브컬처 게임을 개발하고 있다.

독특한 그림체로 해외 유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승리의 여신: 니케>
Ⓒ시프트업

‘예쁜 건 죄가 아니다’ K-서브컬처의 후예들

최근 국내 대형게임사 개발자가 자신이 만든 게임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우리 게임은 서브컬처 게임이 아니다”라고 말해 논란이 됐다. 유저들은 ‘아직도 서브컬처 게임이 일부 팬들만 하는 비주류 장르로 인식하는 사람이 있냐’며 그의 발언을 꼬집었다. 서브컬처 게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이렇게 달라졌다. <리니지> 같은 대작 게임들이 결코 열지 못했던 해외시장의 높은 문을 캐릭터의 인기를 내세운 서브컬처 게임이 쉽게 뚫는 것을 보며 한국 게임사들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는 누구도 서브컬처 게임을 일부 오타쿠들이 즐기는 그들만의 문화로 보지 않는다.
서브컬처 게임은 우리나라 게임 수출까지 견인하고 있다. 한·중·일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서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는 ‘공통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서의 근간에는 예쁜 캐릭터를 좋아하고 좋은 콘텐츠를 공유하려는 마음이 있다. 과거에는 남에게 드러내기 부끄러운 개인적 취향으로 그쳤는데, 요즘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당당하게 내놓고 즐기는 MZ세대의 게임 문화가 부상하면서 서브컬처 시장의 저변을 키우고 있다.

애니메 엑스포 2024의 <블루 아카이브> 부스. 서브컬처 게임은 세계인이 즐길 수 있는 공통 정서를 담고 있다.
©넥슨

주류를 넘어 게임 산업 핵심 콘텐츠로 성장한 서브컬처 게임

올해 지스타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장르의 게임이 관람객을 맞았다. 재미있는 건 지금까지 MMORPG만 고집해 온 대형 개발사들이 하나같이 서브컬처 게임을 행사장 메인 타이틀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MMORPG <오딘: 발할라 라이징>으로 유명한 라이온하트스튜디오는 <프로젝트C>라는 서브컬처 게임을 선보였다. <뮤> 시리즈로 20년간 MMORPG 한 우물만 판 웹젠도 서브컬처 게임 <테르비스>를 공개하며 변화를 시도했다. K-서브컬처 게임은 주류를 넘어 ‘이미’ 게임 산업을 이끄는 핵심 콘텐츠로 성장한 것이다.

글. 이덕규(<게임 어바웃>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