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취향의 다양성과 서브컬처 Vol. 34
좀비, 크리처, 오컬트는 K-드라마 월드에서 서브컬처 장르에 속했다. 하지만 글로벌 OTT의 자본력과의 만남으로 탄생한 K-서브컬처 드라마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이제는 ‘주류’로 자리 잡았다. 최근 주춤한 K-서브컬처 드라마가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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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 공개됐을 때 많은 이들이 ‘쿵쿵쿵쿵’ 뛰어오는 지옥의 사자에 놀랐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서비스된 이후 좀비(2019년 <킹덤>), 괴물(2020년 <스위트홈>) 등 여러 미지의 존재가 등장했는데 <지옥> 속 지옥의 사자는 차원이 또 달랐다. 움직임은 인간과 흡사하지만 지금껏 보지 못한 형체의 괴물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최근 돌아온 <지옥 2>를 보면서 사람들은 더는 지옥의 사자에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심심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수년 사이 여러 시도가 이뤄졌고 그만큼 시청자들도 기괴한 형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좀비, 크리처, 오컬트···. 이른바 ‘서브컬처 장르’에 속하는 드라마는 국내에서 잘 만들지 않아 비주류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는 주류로 떠올랐다. 서브컬처 드라마의 시작은 ‘좀비’였다. 넷플릭스가 <킹덤>을 만들기 전에도 좀비 드라마는 관심을 못 받았을 뿐, 가뭄에 콩 나듯 등장했다. 영화에서는 1981년 <괴시>를 좀비물의 시작점으로 보지만, TV에서는 2011년 MBC가 창사 50주년 특집으로 선보인 2부작 <나는 살아있다>가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 최초의 좀비 드라마였다. 전 세계에 좀비 열풍을 몰고 온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가 2010년에 시즌1을 시작한 것에 견주면 한국 TV에서도 서브컬처 시도는 꽤 빨랐다. 분장과 그래픽은 어색하고 어설펐지만, 특수 장르인 좀비물이 지상파에서 방영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무적이었다.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 최초의 좀비 드라마 <나는 살아있다>
ⓒMBC
시작은 했지만 이후 나아가지는 못했다. 더뎠다. 좀비 보는 맛으로 봐야 하는 좀비 드라마에서 어설픈 좀비의 등장은 시청자 유입에 걸림돌이 됐다. 좀비물을 처음 접하는 이들은 인간의 살을 뜯어먹는 설정 등에 거부감을 느꼈고, 좀비물을 좋아하는 이들은 <워킹 데드>가 기준점이어서 만족하지 못했다. 마니아층이라도 잡으려면 기술적 투자가 이뤄져야 했지만 시청률을 신경 써야 하는 방송사가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를 계속 만들 수는 없었다. 대신 2011년 <뱀파이어 검사>(OCN) 등 특별한 분장이 필요하지 않은, 인간과 흡사한 존재인 흡혈귀가 바람을 탔다. <뱀파이어 검사>도 좀비 캐릭터를 염두에 뒀지만 논의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뱀파이어로 바뀌었다. 바이러스를 주제로 한2013년 <더 바이러스>(OCN), 2013년 <세계의 끝>(JTBC) 등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재난 드라마도 쏟아졌다.
그랬던 좀비가 대중매체 주류 콘텐츠로 떠오른 것은 2016년 영화 <부산행>이 흥행하면서다. <부산행>에서도 좀비는 여전히 어색하지만, 부성애라는 한국적인 신파를 투영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좀비의 모습은 어색했지만 딸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아빠(공유)의 모습은 관객들의 감정을 건드리기 충분했다. 마동석이 맨주먹으로 좀비를 쓰러뜨리는 장면도 비현실적이었지만 그 자체로 통쾌함을 줬다. 그동안 ‘저예산 B급’이었던 좀비물에 약 115억 원을 투입해 블록버스터로 탄생시킨 것도 <부산행>의 흥행 요인이었다. 해외 작품과 달리 좀비들이 무리 지어 빠르게 뛰어다니는 모습은 이전 드라마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볼거리였다. 공유와 마동석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해 장르에 대한 낯선 감정도 덜었다. <부산행> 성공 이후 서브컬처는 더는 생소한 장르가 아니게 됐고, TV에서는 2018년 <손 더 게스트>(OCN) 등 오컬트물이 시도되기도 했다.
좀비물을 대중에게 익숙하게 만들어준 영화 <부산행>
ⒸNEW
<부산행>에서 가능성을 봤지만, 서브컬처 드라마는 제대로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들어서 여전히 TV에서 시도되기 어려웠다. 이후 서브컬처 드라마는 넷플릭스가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한국 드라마에 거액을 투자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넷플릭스는 <킹덤>에 제작비 350억 원 이상을 투자했다. 한국 드라마에서 좀비물에 거액을 투자하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살아있다>도 영화 스태프들이 참여하고 후반 작업에만 한 달이 소요되는 등 당시 작업 환경에서는 이례적인 시도를 했지만, 수백억 원을 들여 만든 좀비는 차원이 달랐다. 분장 기법 자체가 달랐고 특수효과 등 기술을 접목해 어색함을 덜었다.
<킹덤>이 전 세계에서 화제를 모은 이후 국내 드라마 시장은 ‘도전’과 ’실험’이 열쇳말이 되어 장르 확장을 이뤘다. 그동안 제작비가 없어서 혹은 실패할까 봐 두려워서 시도하지 못했던 실험적인 장르들이 쏟아졌다. OTT에서 서브컬처 드라마를 만든 적 있는 한 감독은 “넷플릭스는 표현이 자유롭고, 시청률이 집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음껏 창작의 나래를 펼 수 있었고, 그것이 서브컬처 드라마 발전에 큰 도움이 됐다”라고 했다. 덕분에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처물(<스위트홈>)까지 탄생했고, 이후 <경성크리처> <기생수: 더 그레이>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최초 크리처물 <스위트홈>
Ⓒ넷플릭스
도전을 반복하는 동안 기술력의 발전을 이룬 것이 서브컬처 드라마의 장기 집권을 불러왔다. 대략 300억 원이 들어간 <스위트홈> 시즌 1에는 촉수 괴물, 머리가 반 날아간 괴물, 근육 괴물, 눈 괴물 등 기괴한 형상이 대거 등장하는데, 완성도가 높다. 배우들이 모션 동작으로 촬영한 뒤 컴퓨터그래픽을 보태 괴물을 만들어내는 시도에서 출발한 <스위트홈>은 시즌을 거듭하면서 시각 특수효과(VFX) 기술도 발전했다. 이처럼 시각 특수효과는 서브컬처 드라마 성장의 중요한 요소가 됐다. 시즌 1에서는 할리우드 특수효과팀이 참여하는 등 외부의 도움을 빌렸지만 시즌 2부터는 국내 기술로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완성도 높은 크리처물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되면서 <경성크리처> <기생수: 더 그레이> 등이 탄생할 수 있었다. <스위트홈>에서는 국내에서 최초로 실사와 가상 이미지를 실시간 결합하는 ‘버추얼 프로덕션’도 도입했다. 미지의 존재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손짓, 몸짓 등 움직임을 연구하는 바디무브먼트라는 직업까지 주목받게 됐다.
미지의 존재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대립 구도에 집중하지 않고, 미지의 존재와 인간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 것도 한국 서브컬처 드라마가 전 세계에서 사랑받은 동력이다. 성공한 국내 서브컬처 드라마의 공통점은 ‘K-좀비’, ‘K-크리처물’처럼 ‘한국식’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이다. <경성크리처>는 일제강점기 인체 실험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역사를 배경으로, 주인공이 사라진 엄마를 찾아 나선다. 엄마는 실험 대상이 되어 괴물이 되지만, 딸을 보자 모성애가 발동한다. <킹덤>에서는 왕의 탐욕에서 시작해 배고픈 백성들이 좀비가 됐다. 한국식 서브컬처 드라마는 극한의 재난 상황 속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우리 사회 축소판 역할도 했다. 고등학교가 배경인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는 학교 폭력이 좀비 바이러스를 만들어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잘못된 시스템에 피해자가 되는 내용도 큰 울림을 줬다. <기생수: 더 그레이>처럼 크리처물에서 미지의 존재와 인간의 공존을 얘기하기도 한다.
‘K-크리처물’로 불린 <경성크리처>
ⓒ넷플릭스
그러나 신나게 질주했던 서브컬처 드라마는 현재 답보 상태다. 글로벌 OTT의 자본을 만나 마음껏 창작의 나래를 펼쳤던 제작자들은 그 ‘시작’을 뛰어넘는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스위트홈>도 시즌 2와 시즌 3는 성공하지 못했고, <경성크리처>는 오히려 크리처의 표현이 어색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지옥> 시즌 2도 심심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크리처물이 나오다니!”라며 시도 자체에 놀랐던 시청자들은 수년 사이 비슷한 장르를 접하면서 미지의 존재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동안은 한국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존재가 부실한 내용을 덮어줬지만 이제는 그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미지의 존재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는 시청자를 만족하게 할 수 없게 됐다. 그를 활용한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내용 전개가 중요해졌다. OTT의 등장으로 서브컬처 드라마는 성장했지만, 한편에서는 창작자의 자기만족과 로망 실현에 가까운 시도도 이뤄지면서 규모만 키운 졸작이 등장한 것도 사실이다.
최근 드라마 시장이 어려워지면서 투자가 줄고 창작자들은 규모보다는 새로운 캐릭터, 신선한 소재에 집중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드라마 시장이 어려워지면서 ‘본질’에 주목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서브컬처 드라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서브컬처 드라마의 성장은 결국 돌고 돌아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는,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답에 이르렀다.
글. 남지은(한겨레 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