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덕’과 함께 성장하는 K-콘텐츠 Vol. 33
찰나의 즐거움을 주는 콘텐츠를 순간적으로 소비하는 것도 엄연한 콘텐츠 소비 문화다. 이와 공존해야 하는 것은 진정성 있는 콘텐츠를 가치 있게 소비하는 문화다. K-콘텐츠를 가치 있게 소비하는 것은 K-콘텐츠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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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스낵컬처가 미래 대세라는 전망은 정확해 보였다. 스마트 모바일 기기로 스낵을 먹듯 짧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풍경은 어디서나 흔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낵컬처 대세론이 전적으로 옳은 분석과 예견은 아니었다. 대중은 짧은 콘텐츠를 좋아하면서도 할리우드 마블시리즈나 넷플릭스 드라마 오리지널 시리즈처럼 매우 긴 콘텐츠를 정주행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음악에서도 디깅(Digging) 컬처 현상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디깅은 한 분야나 장르, 특정 아티스트의 콘텐츠를 매우 깊이 파고드는 문화 현상을 가리킨다. 오래된 작품이 새삼스럽게 주목받거나 예전에 발표된 앨범이 역주행하는 사례도 이에 해당한다. 자신의 취향과 선호에 잘 맞는다면 새롭건 오래되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대중은 이렇게 깊이 파고 들어간 콘텐츠에 대해 적극적으로 입소문을 내거나 공유하는 데도 열정적이다. 스마트 모바일 시대에는 이렇게 믿고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언제인가 빛을 볼 가능성이 커졌다.
오래된 음반이 꾸준히 사랑받는 건 그 안에 담긴 진정한 가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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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스낵컬처의 특징에 매몰된 콘텐츠는 외면받을 수 있다. 스낵은 주식이 될 수 없는 간식이다. 맵고 달고 기름진 간식을 지나치게 먹으면 쉽게 질리게 된다. 더구나 건강을 해칠 수 있다.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매우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콘텐츠에 노출되면 처음에는 반응이 뜨겁지만 곧 외면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어린 시절부터 스마트폰과 함께 성장해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불리는 Z세대에게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10대와 20대가 책과 독서에 관심을 보이는 ‘텍스트 힙’ 현상에서 우리는 젊은 세대가 텍스트에 주목하는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콘텐츠가 너무 많아져서 이에 대한 피로가 증가했다는 점이다.
물론 반드시 영상 콘텐츠에 대한 피로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독서로 옮겨가는 것만은 아니다. 같은 영상 콘텐츠 안에서도 변동이나 이동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본래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동영상 플랫폼은 장르적 속성이 강했다. 장르적 속성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개별 장르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콘텐츠라는 점이다. 또한 마니아들을 위한 콘텐츠이기 때문에 보통 이상의 자극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쉽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일 수 있었다. 그런데 세계 시장으로 확장할수록, 가입 회원 수가 늘어날수록, 이런 콘텐츠에서 변화가 생겼다. 마니아들이 좋아할 만한 자극적이고 폭력적이거나 나아가 선정적인 작품은 오히려 힘을 크게 쓰지 못하게 되었다.
변화한 드라마 소비 환경과 조화를 이뤄 성공을 거둔 드라마 <눈물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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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하지 않고 은은해도 우리의 공동체적인 국내 드라마가 오히려 비영어권을 중심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는 젠더 관점의 변화도 있었다. 넷플릭스의 경우 주로 남성 중심의 콘텐츠가 주류를 이뤘는데 이제는 여성 이용자의 증가로 인해 또 다른 콘텐츠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주인공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을 뿐 장르적 속성은 그대로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은 국내 토종 OTT나 지상파, 케이블 방송사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사례로 <눈물의 여왕>, <선재 업고 튀어>, <낮과 밤이 다른 그녀> 등의 드라마를 꼽을 수 있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바로 ‘워맨스(Womance)’다. 우먼(Woman)과 로맨스(Romance)의 합성어인 워맨스는 남성들 사이의 브로맨스와 비슷한, 여성들의 진한 우정을 뜻한다. 과거의 영상 콘텐츠에서 여성들은 경쟁과 시기 혹은 삼각관계 속에서 소비되었다. 특히 ‘국민 악녀’가 등장할수록 시청률이 늘어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제 여성 주인공들이 소통하고 연대하며 상호 구원하는 스토리라인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로 드라마 <굿 파트너>를 들 수 있다. 처음에는 여성들의 갈등과 긴장의 스토리를 보여주지만 갈수록 공감과 소통을 통한 신임 변호사와 선배 변호사의 워맨스 협업이 긍정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여성 간의 소통과 연대를 잘 묘사한 드라마 <굿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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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치를 보여주지 못하면 공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에 원천 IP를 제공하는 웹툰 산업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미국 주식 시장에 우리나라 웹툰 기업이 상장하기도 했고, 해외 여러 나라에 플랫폼 진출이 크게 늘었지만, 국내 웹툰 플랫폼의 이용자는 오히려 줄어드는 상황이다. 그 이유로 콘텐츠 다양성 결핍이 꼽히고 있다. 학원물, 액션, 로맨스물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큰 흥행을 위해 맞춤형으로 만들다 보니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버리는 사례가 많아졌다. 남의 눈치를 보는 창작 행위가 많아질수록 진정성은 사라지기 때문에 울림과 재미는 덜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 웹툰 플랫폼은 지속성을 갖기 힘들다.
K-팝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초동 판매량이나 포토카드에 대한 집착은 지속 가능성을 떨어트리는 대표적인 사례다. 앨범은 음악을 위해 소비해야 한다. 단지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나 팬 미팅 응모를 위해 앨범을 구매한다면 공신력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미국 그래미 어워즈에서 K-팝 그룹에 상을 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제음반산업협회에서는 K-팝에 고마움을 표시하지만, 권위 있는 시상식은 불신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견제하면서 시상식 공연 퍼포머로만 소비하는 배경이다. 더구나 K-팝 팬덤 내부에서도 앨범 과소비가 낳는 심각한 환경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굿즈 등의 상품 판매에서 지나치게 높은 가격 책정으로 원성까지 사고 있다. 다이내믹 프라이싱을 통한 티켓 가격 상승은 더욱 신뢰를 잃게 한다. 이런 일련의 사례들은 K-팝의 지속 가능성을 떨어트린다.
BTS의 ‘너를 사랑하라’라는 메시지는 전 세계 청년에게 울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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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브레이커’ 관점에서 우리나라 게임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청소년들이 아이템 구매에 돈을 많이 쓰게 하는 확률형 아이템이 문제가 되어 왔다. 열어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확률형 아이템 때문에 게임사는 많은 수익을 올렸지만 청소년과 학부모는 많은 돈을 허비해야 했다. 이에 문체부가 올해 초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해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정보 공개를 규정했는데, 게임업계는 다소 수동적으로 임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게임의 사행성을 지적하며 더 적극적인 규제를 하는데도 말이다. 게임 업계가 지속 가능한 게임 콘텐츠 소비를 확보하려면 자발적인 정보 공개에 나서는 방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K-콘텐츠는 자랑스럽게 현시할 수 있는 브랜드 가치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BTS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은 청춘의 고민과 꿈, 미래를 반영하는 음악 콘텐츠가 갖는 가치 때문이었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 등 세계인이 공감한 K-드라마나 영화도 세상의 본질과 지향점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대안을 모색하려 했다. 이런 맥락의 연장선에서 무엇보다 세계인들이 디깅할 수 있도록 가치 소비를 통한 콘텐츠 브랜드 가치를 구축하고 진화시키는 노력이 중요하다.
글. 김헌식(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