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산업의 ‘굿 파트너’ 생성형 AI Vol. 32
콘진원은 ‘콘텐츠산업 2023 결산 2024 전망 세미나’를 통해 ‘2024년 콘텐츠산업 전망 키워드’ 8개를 발표했다. 그중 하나인 ‘챗 크리에이터’는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콘텐츠를 만드는 창의적인 인력을 뜻한다. 챗 크리에이터가 만들어가는 콘텐츠의 변화상과 미래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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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에 10명의 출연자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도 모른 채 서 있다. 개그맨부터 크리에이터, 성형외과 의사, 래퍼, 아이돌 가수, 수학 선생님, 운동선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이다. 보통의 방송 프로그램이라면 이렇게 스튜디오에 모이기 전부터 이들은 어느 정도 자신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구체적인 미션을 숨기는 프로그램이라 해도, 사전에 작가가 대략의 프로그램 성격을 이야기해 줄 것이고 스튜디오에 나오기 전 PD와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며 하다못해 출연료를 통해 프로그램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스튜디오에 모인 10명의 출연자는 프로그램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어 보인다. 사전에 그 누구도 만난 것 같지가 않다.
<PD가 사라졌다>에 등장한 AI PD, 엠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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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올 초에 방영된 MBC <PD가 사라졌다>라는 실험적인 예능이 보여준 풍경이다. 제목부터 수상한 이 프로그램은 어리둥절해하는 출연자들 앞에 드디어 화면에 등장한 한 인물이 자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의 성격을 드러낸다. “안녕하세요. 저는 세계 최초의 인공지능 PD 엠파고입니다.” 엠파고는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해야 할 일이 다양한 미션을 수행하는 거라는 걸 알려준 후, 왜 하필 이들이 여기 나오게 됐는지 알려준다. 그러더니 대뜸 출연자들에게 각자 하고 싶은 미션을 물어보고 그 몇 가지를 섞어서 미션을 제시한다. 그렇게 시작된 첫 미션은 노래 대결, 프리스타일 랩 대결 그리고 칭찬 게임을 섞어 만든 ‘칭찬과 음악의 페스티벌’이다. 출연자들이 서로에 대한 칭찬을 랩 배틀처럼 하는 것. 흥미로운 건 이들이 각자 랩을 한 이후, 순식간에 엠파고가 편집한 영상을 보여주더니 그 영상에 출연자들이 차지한 방송 분량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게 출연료가 화면 위에 띄워진다는 점이다.
<PD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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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들은 PD나 작가 같은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해왔던 상당한 분량의 일들이 AI를 통해 보다 쉽게 처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작가를 대신해 미션을 만들고, PD를 대신해 프로그램을 편집, 연출하며, 나아가 출연료 정산까지 엠파고가 처리하는 이 광경은 AI 시대가 만들어내고 있는 콘텐츠 제작의 새로운 변화를 징후적으로 보여주었다.
알파고가 등장해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대결을 벌였을 때, AI의 등장이 가져올 미래의 직업에 대한 여러 분석들이 등장한 바 있다. 하지만 그때도 창의적인 직업만은 큰 변화가 없을 거라 여겨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콘텐츠 업계에 들어온 AI 기술의 활용을 들여다보면 이 창의적인 작업들에도 커다란 변혁의 조짐들이 느껴진다. 물론 실제로 ‘PD가 사라지는’ 일은 생겨나지 않겠지만, 적어도 과거처럼 일하던 PD가 사라질 수는 있겠구나 싶은 일들이 이미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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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새로운 미디어 기술이 등장하면서 특정 직업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는 일은 미디어 발달사에서 늘 있던 일들이었다. 예를 들어 컴퓨터 인쇄가 등장하면서 과거 인쇄소에서 글자 틀 하나하나를 인쇄판에 끼워 넣던 ‘문선공’ 같은 직업은 사라졌지만 대신 컴퓨터를 조작해 인쇄를 하는 분야의 인력들이 생겨났다. AI 같은 신기술의 등장 역시 마찬가지다. 벌써부터 AI 모델에 효과적인 입력문(프롬프트)을 작성함으로써 보다 최적의 결과를 내게 해주는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유망 직업으로 떠오르고 있고, 인간이 하는 학습 능력 같은 기능을 데이터 분석 기술을 활용해 컴퓨터로 실현하는 머신 러닝 엔지니어도 미래의 직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 최근 리얼타임(Real-time) 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실시간으로 미션을 수행해 작업 결과물을 보여주는 VP(Virtual Prodution)이 많아지면서 이를 제어하는 VP 오퍼레이팅 분야도 유망 직종이 되고 있다. 즉 이 개념으로 보면 PD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AI라는 신기술을 활용한 PD가 생겨나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이것은 콘진원이 2024 콘텐츠산업 전망 키워드 중 하나로 소개한 ‘챗 크리에이터’의 등장을 예고하는 일이다. AI 같은 신기술과 결합해 변화하는 콘텐츠산업에 등장하고 있는 챗 크리에이터들은 ‘콘텐츠 기획 능력과 함께 새로운 기술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전문 인력’을 뜻한다. 즉 AI 같은 신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창의적인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라는 것이다.
‘AI 보이스 디에이징’으로 재현한 <카지노> 속 최민식의 젊은 시절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콘텐츠 분야는 특히 이러한 AI 신기술을 보다 가시적이고 대중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변혁의 시기에 더욱 시선을 끈다. 예를 들어 AI 디에이징 기술 같은 사례를 보면 이 기술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쉽게 실감할 수 있다.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카지노>에서 60대의 최민식 배우가 30대부터 50대까지의 다양한 나이대의 ‘차무식’이라는 인물을 연기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디에이징 기술 덕분이었다. 1차적으로 AI가 학습한 자료와 트래킹한 현재의 얼굴을 바꿔치기하는 디에이징 기술은 과거라면 배우의 얼굴을 3D로 풀 스캐닝해 수작업을 통해 했어야 할 일들을 대신 처리해줌으로써 시간과 인력, 나아가 비용을 아낄 수 있는 새로운 제작 방식으로 떠올랐다. 이 기술은 심지어 AI 음성 합성 기술을 통해 목소리 또한 젊어지게 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한 인물의 일대기 등을 다루는 콘텐츠에서 용이하게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플레이브는 리얼타임 기술의 역동성을 실감하게 해준다
©블래스트
또한 최근 VFX(시각특수효과) 기술에서 점점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는 리얼타임 기술은 가상의 공간을 실시간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버추얼 프로덕션’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제작 방식으로 자리하게 됐다. 과거에는 현실에서 찍어온 영상을 가상의 영상과 붙여 결과물을 확인하는 게 VFX의 방식이었다면 이 리얼타임 기술은 그걸 한자리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원하는 영상을 보다 빠르게 얻게 해주는 것이다. 이 리얼타임 기술을 활용해 탄생한 버추얼 아이돌 보이그룹 ‘플레이브’는 이 기술이 가진 역동성을 실감하게 해준다. 2D 캐릭터를 가진 보이그룹이지만, 이들이 콘서트를 통해 관객과 만나 소통할 수 있는 기반은 다름 아닌 이 리얼타임 기술 덕분이기 때문이다. 실제 인물들의 동작과 제스처가 버추얼 프로덕션을 통해 버추얼 아이돌에게 반영되기 때문에 영상을 통한 콘서트라도 실제 같은 몰입감을 준다.
AI의 등장으로 여러 직업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건 콘텐츠 업계에도 다르지 않지만, 그 새로운 변화를 수용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효과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른바 챗 크리에이터로 불리는 새로운 직업군은 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콘텐츠 업계가 새로운 전문 인력으로 양성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AI 기술이 접목된 콘텐츠 제작 방식은 미래에는 일반적인 콘텐츠 제작 방식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글. 정덕현(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