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관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는 K-콘텐츠 IP 영향력 Vol. 31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콘텐츠들이 경쟁하는 시대. 콘텐츠들은 그만큼 독해졌다. 살아남기 위해 도파민을 분출시키는 콘텐츠들이 점점 늘어나는 와중에 정반대의 흐름도 생겨났다. 오히려 순한 맛 콘텐츠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넷플릭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가 콘텐츠의 새로운 소비 방식으로 등장하면서 그간 지상파, 케이블, 종편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소재나 수위의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청소년이 등장하는 콘텐츠들이다. 레거시 미디어들은 보편적인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청소년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들 대부분 학업 문제나 연애 같은 ‘순한’ 소재에 머물러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OTT는 과감하게도 레거시 미디어들이 다루지 않던 청소년들의 어두운 지대들을 소재로 끌어왔다. 청소년 성매매(<인간 수업>)는 물론이고 심각한 학교 폭력(<약한 영웅>, <돼지의 왕>) 나아가 마약(<소년 비행>) 이야기까지 담아냈다. 청소년들의 이야기 역시 18세 이상 시청이 가능한 자극성 높은 성인 콘텐츠의 소재로 등장한 것이다.
또 국내에서는 워낙 자극성이 높아 지상파 등에서 도저히 제작 방영될 수 없었던 좀비물, 크리처물이 봇물을 이뤘다(<킹덤>, <지금 우리 학교는>, <스위트홈>, <경성크리처>). 물론 좀비라는 괴물의 탈을 씌웠지만 이제 OTT에서는 목이 날아가고 팔다리가 잘리는 장면들이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닐 정도로 익숙해졌다.
<인간수업> ©넷플릭스
<스위트홈> ©넷플릭스
한 번 경험된 콘텐츠의 자극은 이전의 것들을 둔감하게 만든다. 지상파, 케이블, 종편도 이 자극의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개연성과 공감보다는 끝없는 도파민 자극을 추구하는 막장 드라마들(<펜트하우스>, <7인의 탈출>)이 나왔고, 그간 레거시 미디어에서는 잘 시도되지 않았던 19금 콘텐츠(<부부의 세계>)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성공을 거뒀다. 물론 역사 왜곡 논란으로 2회 만에 폐지됐지만 <조선구마사> 같은 사극에서도 19금 등급에 첫 회 시작부터 생시의 목이 날아가는 장면이 방송을 탔다.
예능 프로그램도 예외는 아니었다. 치열한 경쟁을 보여주는 ‘마라 맛’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들(<극한 데뷔 야생돌>, <방과 후 설렘>)이 계속됐고, 몸과 몸이 부딪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강철부대>)이나 관찰 카메라를 이용한 갖가지 이혼 예능(<우리 이혼했어요>, <한 번쯤 이혼할 결심>)도 우리의 도파민을 분출시켰다. 이제 OTT만이 아니라 레거시 미디어들도 마라 맛 도파민 콘텐츠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부부의 세계> ©JTBC
<우리 이혼했어요> ©TV조선
이제 바야흐로 콘텐츠 세상은 도파민이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콘텐츠를 표현하는 데 있어 ‘고구마’, ‘사이다’라는 표현이 일상화된 건 그 때문이다. 조금만 갈등이 길어지거나 답답한 전개가 이어지면 ‘고구마 콘텐츠’라 말하고, 심지어 개연성이 없어도 빠르게 갈등을 해결해주면 ‘사이다 콘텐츠’라 말한다. 자극에 익숙해지다 보니 고구마는 피하고 사이다만 원하는 경향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자극으로 지끈해진 머리가 요구하는 정반대의 흐름도 생겨났다. 이제 좀 ‘불멍’, ‘물멍’하듯이 ‘콘텐츠멍’ 할 수 있는 시간을 원하는 욕망이 생겨난 것이다. 이른바 ‘순한 맛’ 콘텐츠들이 ‘마라 맛’ 콘텐츠들 사이에서 의외로 선전하는 새로운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Shutterstock
넷플릭스의 마라 맛 콘텐츠들 사이에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작품이 뜻밖의 힐링을 선사하며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역시 잔잔한 힐링 드라마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닥터 차정숙>, <나쁜 엄마>, <웰컴 투 삼달리>, <닥터슬럼프> 등등 JTBC 드라마들은 아예 힐링과 위로를 키워드로 내세운 일련의 드라마들을 통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tvN 드라마들 역시 <눈물의 여왕>, <선재 업고 튀어>, <졸업> 같은 순한 맛 드라마들을 내놔 연타석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자극적인 오디션 프로그램들 대신 <싱어게인> 같은 순한 감동을 주는 오디션이 성공을 거뒀고, 독한 이혼을 소재로 하는 관찰 카메라 대신 유사 가족 콘셉트를 연애 리얼리티와 연결해 잔잔한 감동까지 선사하는 <연애 남매>가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콘텐츠들이 자극으로 치달을수록 그 반대급부로서의 순한 맛 콘텐츠들이 주목받는 흐름이 생겼다는 것. 이른바 자극과 힐링 콘텐츠의 등락이 반복되는 새로운 흐름이 생기고 있다.
<선재 업고 튀어> ©tvN
<연애남매> ©jtbc
그런데 이런 흐름은 방송 콘텐츠에서만 나타나는 경향은 아니다. 최근 K-팝에서 뉴진스 이후 라이즈, 아일릿 등 거의 모든 아이돌 그룹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이지 리스닝 경향 또한 이 순한 맛 콘텐츠의 한 흐름으로 보인다. 이들의 이지 리스닝 계열 음악을 듣다 보면, 한때 중독적인 후크의 반복적인 자극에 집중하던 K-팝들과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굳이 집중해서 듣지 않고 그저 틀어 놓고 반복적으로 들어도 계속 들을 수 있는 편안한 음악들이다. 이지 리스닝은 최근 팝의 트렌드로도 자리 잡았는데, 이것은 다분히 음악을 듣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생겨난 변화라고도 볼 수 있다. 최근 음원 사이트를 구독해 듣는 음악의 경우, 과거처럼 집중해서 듣기보다는 귀에 리시버를 꽂고 자기만의 영역에서 반복해 듣는 방식을 요구한다. 따라서 너무 자극적인 음악보다 편안한 음악들이 선호되는 것이다.
이렇게 도파민의 피로를 벗어나고픈 욕구는 게임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인 게임의 성공 신화라 불리는 <스타듀 밸리>는 단적인 사례다. 농장을 경영하는 다소 목가적인 느낌의 이 게임은 2022년 누적 판매량이 2천만 장을 돌파했고, 스팀(디지털 게임 판매 플랫폼) 유저 평가에서 98%가 ‘압도적으로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로 호평받았다. 쏘고, 베고, 부수며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 경쟁 강박을 일으키는 게임들 속에서 일종의 탈출구 같은 힐링을 제공하는 게임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둔 것이다. 네오위즈의 모바일 게임 <고양이와 스프>도 이런 계열의 힐링 게임으로, 일단 그림책을 연상케 하는 그래픽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준다. 글로벌 누적 다운로드 수가 5천8백만 건을 돌파했고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정식 출시됐다.
<스타듀 밸리> ©네이버게임
<고양이와 스프> ©네이버게임
매운맛을 느끼면 얼얼해진 혓바닥이 순한 맛을 그리워하듯 콘텐츠의 경향 역시 짜릿한 도파민과 휴식을 주는 힐링 사이를 오고 간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시청자들이 지금껏 잘 경험해보지 못했던 도파민을 분출시키는 매운 콘텐츠들에 대책 없이 빠져들었다면, 최근에는 그 반대급부로서 레거시 미디어들 중심의 익숙하면서도 다소 순한 콘텐츠들이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매운맛과 순한 맛이 반복 교차되는 이러한 경향은 긴장과 이완, 자극과 휴식이라는 우리의 수용 감각이 취하는 욕구의 순환이 변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글. 정덕현(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