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관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는 K-콘텐츠 IP 영향력 Vol. 31
한국 배우나 감독, 스태프 등이 해외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참여나 합작의 수준을 넘어 국내 제작사가 직접 현지의 작품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K-드라마의 현지화 전략, 어디까지 왔을까?
<플레이, 플리>
Ⓒ티빙
지난 4월 16일 글로벌 OTT 애플TV 플러스에서 미국 드라마 <운명을 읽는 기계> 시즌 2가 공개됐다. 원제는 <더 빅 도어 프라이즈(The Big Door Prize)>. 미국의 한 작은 마을 잡화점에 사람들의 운명을 예측하는 기계가 등장한다. 작은 오락실 부스처럼 생긴 이 기계에 동전을 넣고 개인 정보를 입력하면 ‘오늘의 운세’처럼 단어가 적힌 카드가 나오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삶에 특별한 변화가 생긴다. 이 드라마는 미국 제작사 스카이댄스와 또 다른 제작사가 함께 만들었다. 바로 국내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이다.
국내 제작사들이 해외에서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해외 로케이션이 아니라 현지에서 만들어 현지 오리지널 드라마로 방영한다. 일본의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디즈니 플러스의 한국 드라마 <커넥트>(2022년)를 연출하고, 한국의 이재한 감독이 일본 프라임 비디오 영화 <시 히어 러브(SEE HEAR LOVE>(2023년)를 연출하는 등 인력 교류와 합작은 잦았지만, 국내 제작사가 현지 드라마를 만드는 시도는 2021년 이후 본격화됐다. 2021년 <운명을 읽는 기계> 시즌 1은 국내 제작사가 만든 첫 미국 드라마다.
<운명을 읽는 기계>
Ⓒ애플TV
국내 제작사의 현지화 전략은 주로 외국에 법인을 설립하고 현지 제작사와 공동 제작하거나 현지 제작사를 인수·합병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씨제이이엔엠은 미국 유명 제작사 엔데버콘텐트를 인수한 뒤 사명을 피프스시즌으로 바꾸고 지금껏 <도쿄 바이스>(HBO 맥스)와 <시: 어둠의 나날>(애플TV 플러스) 등 미국 드라마를 제작해 현지 플랫폼에서 선보였다. 국내 제작사 SLL도 미국 유명 제작사 윕을 인수한 뒤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보드킨>과 프라임 비디오 미국 드라마 <내가 예뻐진 그 여름> 시즌 3 등을 제작하고 있다. <운명을 읽는 기계>는 스튜디오드래곤의 모회사인 씨제이이엔엠이 스카이댄스에 지분을 투자하며 파트너십을 맺은 게 시작이었다. 스카이댄스가 스튜디오드래곤에 협업을 제안해 함께 기획했고, 2021년 시즌 1을 공개했다. 스튜디오드래곤은 일본 드라마 <아수라처럼>도 제작하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하고, 아오이 유우 등이 출연한다. 또 유니버설스튜디오와 <설계자들>, CBS스튜디오와 <마스터 마인드>도 제작 중이다.
<내가 예뻐진 그 여름>
Ⓒ프라임비디오
<도쿄 바이스>
ⒸHBO맥스
한발 더 나아가 해외 플랫폼에서 국내 제작사에 한국 드라마 제작을 직접 의뢰하기도 한다. 지난해 제작사 플레이리스트에서 만든 <플레이, 플리>는 한국 제작사가 만든 한국 드라마인데, 일본 OTT 훌루 재팬의 오리지널 드라마로 방영됐다. 플레이리스트에 따르면 훌루 재팬에서 한국 드라마를 원했다고 한다. 국내 제작사가 전 세계 방송사에서 작품을 의뢰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특정 장르에 특화된 현지화 전략도 시도되고 있다. 한양제작소는 BL(Boy’s Love) 드라마(남성 주연들 간의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 시장이 큰 태국에서 현지 제작사와 함께 BL 드라마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BL 드라마는 일본이 최대 생산국이고 태국이 종주국으로 불린다. 한국 BL 드라마는 두 나라에 견줘 살인 사건 등 다양한 소재를 접목해 스토리를 살리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 BL 드라마 제작 노하우에 현지 배우와 한국 배우를 함께 내세우면 두 나라를 모두 공략할 수 있다.
<플레이, 플리>
Ⓒ티빙
국내 드라마 제작사들의 현지화 전략은 국내 드라마 시장의 성장과 위기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변화다. 넷플릭스가 2016년 한국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2019년 <킹덤>, 2020년 <스위트홈>, 2021년 <오징어 게임>이 연이어 성공하면서 국내 드라마 시장은 OTT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좀비물, 크리처물, 공상과학물 등 지금껏 제작비가 많이 들어 TV 방송사에서는 도전하지 못했던 장르가 글로벌 OTT에서 자유롭게 시도됐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영화 <기생충>이 미국 유명 시상식에서 성과도 내면서 전 세계에서 한국의 콘텐츠 제작 능력에 주목했다.
그러나 기회는 곧 위기를 초래했다. 글로벌 OTT 줄서기가 시작되고 너도나도 일단 새롭고 스케일 큰 작품을 시도하면서 결국 OTT 안에서도 차별화가 줄었고, 품질이 저하되는 등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글로벌 OTT의 거대 자본이 유입되면서 그게 표준이 됐고, 내수 시장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드라마 제작비가 치솟았다. 현재 만들어놓고 창고에 갇혀 있는 드라마는 약 30편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 촬영을 접는 사례도 등장했다. 감수하고 추진하는 것보다 중단이 이득이라는 계산에서다. 2022년 토종 OTT 웨이브에서 만들어 화제를 모았던 <약한 영웅: 클래스 1>의 시즌 2를 넷플릭스에서 만드는 것도 제작 비용 때문이다. 제작사는 시즌 1보다 더 잘 만들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만, 웨이브는 감당할 상황이 아니다.
©Shutterstock
여러 경험으로 노하우가 쌓이면서 제작사의 기량은 좋아졌는데 능력을 마음껏 펼칠 무대가 줄어든 한국 드라마 시장에서 현지화 전략은 탈출구이자 해법, 새로운 시작이다. 한국 제작사들은 미국과 일본을 거점으로 전 세계로 뻗어 나가려고 한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보다 방송 시장 규모가 월등히 크다. 2021년 기준으로 미국 방송 시장 규모는 1,896억 달러로 한국의 12배 이상이다. 일본은 2.5배 이상으로 알려진다. 일본은 규모에서는 큰 차이는 없지만 충성 팬이 많아 IP를 다양하게 활용해 수익을 내기 용이하다고 한다. 드라마를 영화 등 여러 장르로 만들고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일본에서는 자연스러운 흐름이기 때문이다.
국내 제작사가 현지화 전략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IP를 확보하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넷플릭스 이전에는 제작사들이 방송사에서 제작비를 지원받고 IP를 넘겼지만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다. 넷플릭스가 막대한 제작비를 지원하는 대신 모든 권한을 가져가면서 IP 문제가 업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킹덤>과 <오징어 게임>이 성공했는데도 해당 제작사가 그만큼의 이익을 얻지 못하면서 당장의 제작비보다 IP 확보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킹덤>을 만들었던 제작사 에이스토리는 2022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넷플릭스가 아닌 신생 채널 ENA에서 방영하면서 IP를 확보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성공하면서 뮤지컬 등 장르 다변화, 해외 리메이크 등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ENA
제작사들은 현지화 전략에서 한국 드라마 IP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스튜디오드래곤은 <사랑의 불시착>, <호텔 델루나> 등의 작품을 미국 드라마로 선보이는 작업도 기획 중이다. 그러나 수년 전 중국 방송 시장이 열렸을 때 한국 창작자들이 현지로 건너가 중국 제작사와 계약을 맺고 드라마와 예능을 만들었지만 사드 문제가 터지자 문이 닫혔던 것처럼, 이제는 당장의 이익보다 길게 내다보며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드라마 시장의 어려움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제작사들의 현지화 전략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미디어콘텐츠산업융합발전위원회는 지난 3월 발표한 ‘미디어 콘텐츠 산업 융합 발전 방안’에서 ‘영상 콘텐츠 제작비 세액 공제율 최대 30%까지 확대’, ‘1조 원대 K-콘텐츠 미디어 전략 펀드 신설’ 등의 개선 방안을 내놨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나와야 할 필요성이 있다.
글. 남지은(한겨레 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