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윤호진
윤호진 / 방송영상산업진흥원 책임연구원
마침내 한국과 미국의 FTA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해당 분야별로 손익계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방송을 포함한 시청각서비스 분야 역시 부분적인 개방이 이루어지면서 그로 인한 파급효과와 향후 대응방안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케이블TV와 기간통신사업에 대한 외국인 간접투자가 100% 허용되어, 미국의 거대 미디어기업이 콘텐츠와 네트워크를 함께 장악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현재 케이블TV와 온라인 VOD에서는 미국과 일본에서 제작한 드라마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광대역 네트워크를 통해 초고속으로 고화질 영상 콘텐츠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됐지만, 정작 디지털 뉴미디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미드와 일드 그리고 저급한 이종격투기와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다. 국내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신규 플랫폼 중심으로 네트워크 시장만 집중적으로 육성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미국의 거대 미디어기업들이 간접투자 방식으로 한국의 미디어 시장에 진입한다면, 이제 우리 거실에는 외국 자본으로 무장한 다양한 장르의 채널과 콘텐츠가 물밀듯이 쏟아지게 된다. 문화적 정체성과 민족 동질감을 상실한 채, 어설픈 글로벌리스트가 되어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프로그램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상황이 야기될 수도 있다.
이처럼 한미 FTA가 초래할 수 있는 방송영상 부문의 부작용을 최소화해야하는 시점에서, 또 하나의 신규 서비스가 등장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바로 대표적인 방송통신 융합형 서비스라고 할 수 있는 IPTV이다. 수백 개의 채널을 고화질로 전송할 수 있고 다양한 방식의 양방향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IPTV는 멀티미디어 방송으로 할 것인지, 광대역융합서비스로 할 것인지의 부처간 입장 차이만 정리된다면, 금년 하반기 중에라도 얼마든지 서비스가 가능하다.
그러나 케이블TV와 인터넷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콘텐츠에 신경을 쓰지 않고 네트워크를 통한 전송방식에만 관심을 집중한다면 이 역시 외국 콘텐츠의 손쉬운 유통을 위해 들러리를 선 것밖에 되지 않는다. 값싼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폭력적인 이종격투기로 악명 높은 유료방송 시장에 단지 또 하나의 저급한 외국 콘텐츠용 출구가 만들어지게 된다.
따라서 한미 FTA의 타결로 인한 방송영상시장 개방과 IPTV 도입을 목전에 둔 현 시점에서, 콘텐츠 산업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 필요성을 새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콘텐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향후 수요와 성장 가능성 등을 주도면밀하게 예측해야 한다. 섣부른 낙관론이나 기술결정론적 시각에서 탈피하여, 콘텐츠가 지닌 문화적 파급효과와 경제적 부가가치를 다각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를 기반으로 하여, 창의적인 콘텐츠 개발을 위한 제작 인프라 구축과 디지털 시대의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지원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또한 콘텐츠 유통시장을 공정하게 관리하고, 온라인 환경에 걸맞은 저작권 보호체계를 구비하여 콘텐츠 제작시장을 더욱 활성화시켜야 한다.
IPTV가 시민들의 여가를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문화적 비타민이자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IPTV의 매체 특성에 부합하는 차별화된 콘텐츠를 적극 개발할 필요가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콘텐츠 제작 및 유통 인프라를 강화한다면, 개별기업 차원에서는 창의적인 콘텐츠 제작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 IT를 토대로 세계 최고 수준의 네트워크 인프라를 구축했다면, 향후 10년 동안은 전통과 창의성을 겸비한 콘텐츠를 바탕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고 한류의 지속적인 확산에 힘을 모아야 한다. 네트워크 중심에서 콘텐츠 중심으로 사고와 발상을 전환하는 것만이 한미 FTA 시대의 디지털 뉴미디어 환경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첩경인 것이다.
* 본 칼럼은 <중앙일보> 2007년 4월 10일자 오피니언 란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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