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만제
이만제 책임연구원(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산업연구팀장) 지난 2004년 7월 우리는 본격 HD 텔레비전 시대를 열었다. 정책책임자와 이해당사자가 참여하여 7년간이나 끌어온 디지털 텔레비전(DTV) 전송방식 논란을 종식시킨 ‘4자합의’는 고화질(HD) 텔레비전 시대를 선언한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미래 지상파를 SD급 다채널로 가기보다는 채널 활용성은 떨어져도 고화질 HD급으로 가기로 선택한 것이다.
HD 텔레비전은 200만 화소급 화면, 1080개 내지 720개의 주사선 그리고 16:9 화면비율로 35mm 영화급 고화질을 제공한다. 현재의 아날로그 텔레비전에 비해 5~6배 선명한 영상과 CD급 음향을 바탕으로 영화같은 현장감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제작비가 2배에서 많게는 4배까지 더 든다는 것이 제작현장의 목소리이다.
HD 시대를 맞아 주당 의무편성 시간을 20시간으로 늘리고 텔레비전 수상기를 만드는 가전업계도 보급확대를 계기로 경기회복을 꾀하자는 시도가 있었지만 프로그램 질향상과 이용자 확대면에서 성과는 그리 크지 않은 실정이다. 정보통신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까지 HD 텔레비전 수상기는 250만대가 보급되었고 올해도 100만대(2조 7천억원대)가 더 팔릴 예정 이라고 한다. 그러나 HD 텔레비전 수상기를 갖춘 가구 중에서도 HD 텔레비전을 제대로 보는 가구는 위성방송의 HD 서비스를 이용하는 2만5천가구 정도라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조선일보. 2005. 4. 21). 심지어 고가의 HD텔레비전 수상기를 구매한 시청자들 중에는 기존 채널에서 HD 표시로 방송되는 아날로그 방송을 HD 텔레비전으로 오해하는 시청자들도 있는 지경이다.
HD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는 우선 종합유선방송이나 위성방송에 가입하여 매월 이용료를 내야하고, HD 텔레비전 수상기 외에 수십 만원에서 백 만원 가량하는 별도의 셋톱박스를 설치해야 한다. 복잡한 시내의 경우 아날로그에 비해 정보량이 훨씬 많고 UHF전파로 전송되는 HD 프로그램 직접수신은 기대조차 하기 어렵다. 대만에서는 공영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 전파를 전송하는 위성망을 구축하였고, 영국에서는 케이블을 이용해서 무료로 지상파 방송을 볼 수 있는 프리뷰 시스템 구축하여 디지털 방송을 무료 볼수 있게 하였다. 전체 시청자중 20%는 유료방송에 가입하지 않고 있는 우리도 HD시대 디지털 전송망의 정비가 필요한데 별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는 상태이다.
주당 20시간씩 편성하는 HD라는 이름의 프로그램들은 아침시간 토크쇼 프로그램이나 가요 프로그램 같이 제작비가 싼 무늬만 HD 프로그램들이 대부분이다. HD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프로그램 제작 시도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현장감 넘치는 스포츠 프로그램 조차도 고화질로 제작되지 않고 있다.
HD텔레비전 확산이 이처럼 지지부진한데는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시청자들의 불만과 무관심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의 보는 사람도 없는 HD 프로그램 제작에 많은 제작비를 투입하기 어려운 방송사의 사정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화질로도 큰 불만이 없는 시청자들이 특별히 고화질로 볼만한 프로그램도 없는 상태에서 HD텔레비전 수신 장치를 마련하는 데 비용을 지불하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 방송사들이 의무편성시간 때문에 억지로 이름만 HD프로그램을 만들 것이 아니라 시청자들이 고화질로 볼만한 프로그램을 하나 둘 적극적으로 개발함으로써 시청자들의 관심을 확대해 나가면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본 NHK는 이미 전체 프로그램의 80% 이상을 HD프로그램으로 제작하고 있고 민방도 HD제작이 40%를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HD 프로그램은 제작현장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먼지까지 담아내는 정도의 선명도와 와이드 화면으로 인해 제작기법의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세트, 의상, 분장, 소도구 같은 미술파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와이드 화면과 고화질에 적합한 정교한 작업을 위해서는 기존 제작일정이 2~3배 길어지고 이에 따라 필요인력이 늘어나고 제작비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현재, HD 프로그램이 새로운 수입을 보장하지 않는 초기단계에 방송국 스스로 막대한 제작비를 모두 충당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가능하다면 HD텔레비전 수상기나 셋톱박스 보급이 크게 늘면 많은 이득을 얻게 되는 가전업계에서 제작비 일부를 스폰서 하는 방법도 마련해 볼수 있다. 광고제도 쪽에서도 HD 프로그램에 한해 PPL를 허용하는 등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늘어난 제작일정을 소화하고 와이드 화면에 맞는 더 넓은 세트를 갖추기 위해서는 현재보다 훨씬 넓은 세트장이 필요하다. 허술한 세트장은 작품의 완성도를 크게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이제 매일 해체됐던 세트를 새로 세우고 드라마를 제작하는 방식은 개선되어야 한다. 일본처럼 제작기간 내내 세트를 철수하지 않고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현장에서 나오고 있다. 이 기회에 전작제 정착 같은 제작관행의 개선도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드라마전용 대형 실내 세트장’이 필요하다. 방송산업을 지원하는 문화관광부에서 이런 대형 세트장을 건립,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시급히 추진되어야할 과제이다. 이외에도 고화질 화면에서 출연자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전문 분장처리와 출연자 피부의 땀구멍까지 처리할 수 있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드라마 제작에 사용되는 소도구 역시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흠집없는 온전한 상태의 보존과 관리가 필요한 부분이다.
HD 텔레비전 초기단계에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벅찬 숙제이다. 시청자들이 쉽게 HD 텔레비전을 접할수 있도록하고 전송망을 정비하여 보는 사람수를 늘리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와 함께 방송사에서는 높아진 제작비, 새로운 인프라 그리고 달라진 제작기법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제작자들에게 충분한 제작시간을 할애하고 실험제작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전문적인 직무교육을 확대하여야 한다. 제작 인프라 조성에 필요한 대형제작시설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요구된다. HD 프로그램은 단순한 기술 변화를 너머서 디지털 시대, 새롭고 창의적인 미래의 영상문화 시대를 준비하는 의미를 갖는다.
*본 칼럼은 [MBC아트센터 사보 <美.工.所> - 2005년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