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웅진
몇 해전 보스턴 레드삭스의 김병헌 선수가 잠시 귀국했을 당시 그를 취재하려던 모 스포츠신문사의 사진기자를 폭행한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폭행사건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취재를 당하는 자와 취재를 하는 자 사이의 이러한 긴장관계는 일상적인 일이 된지 이미 오래다. 취재가 아니라 취조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 기자들의 ‘특종’을 향한 프로정신(?)은 정말 알아줄 만하다. 그러나 정도를 넘어선 과잉취재는 분명 비난받아 마땅하다. 공인이라고 해서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치원생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에 사는 어느 누구도 언론사의 과잉취재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파파라치들의 집중 공략 대상이 되는 이들은 단연 연예인 집단이다. 사소한 연애담부터 이혼, 각종 사건·사고에 이르기까지 스타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어디든지 카메라가 따라붙고 마이크가 들이 밀어진다. 취재를 거부하기라도 하면 그 자체가 큰 잘못인 양 부풀려질 수 있기 때문에 연예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약점을 연예저널리즘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놓칠 리 없고 애꿎은 리포터들만 집 앞 현관에서, 경찰서 정문 앞에서 밤샘을 하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연예저널리즘 프로그램 자체가 대중의 파파라치적 근성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제작진은 항변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안하무인식의 과잉취재 행위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론의 뭇매 속에서도 연예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충족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오늘도 연예저널리즘 프로그램의 ‘돌격대 정신’은 계속되고 있다.
과잉취재가 흔히 발견되는 또 하나의 사례는 재해 혹은 재난보도이다. 아이템 자체가 갖고 있는 영향력이나 국민적 관심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론사간의 취재경쟁이 ‘오버’를 양산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2003년 추석명절 즈음에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매미는 재산손실 4조5천억원 등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물적(物的) 피해를 유발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것은 바로 인적(人的) 피해였다. 120여명의 소중한 생명이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을 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방송뉴스에서는 장례식장과 병원, 그리고 참사현장들을 찾아다니며 유가족들의 슬픔을 시청자들에게 전했지만 이 과정에서 무리한 취재가 이루어지는 장면이 적잖이 발견됐었다. 중상을 당해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을 찾아가 마이크를 들이댄다든지 하얀 시트에 덮여있는 사망자의 시신을 반복해서 내보내거나 한창 구조에 열심을 내야할 소방관들을 붙잡고 복구상황설명을 강요한다든지 하는 것 등은 과잉취재의 대표적인 사례들로 지적될 만하다. 이런 장면들은 시청자들에게 현장의 생생함을 전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칫 지나치게 기자중심적 보도구성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의 언론보도가 재해 혹은 재난보도시 지나치게 흥분해서 보도윤리를 망각한 경우는 이외에도 더 있다. 몇해 전 베이징을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중국국제항공사 소속 보잉-767 민항기가 악천후 속에 착륙을 위한 선회비행을 하던 중 공항 인근 야산에 충돌, 120명 이상의 승객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을 때에도 일부 기자가 지나치게 흥분하여 생존자가 구조되는 상황에서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거나 처참하게 일그러진 채 병원으로 후송되는 탑승객들의 모습을 자주 내보내는 등 과잉취재의 고질(痼疾)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심지어 어느 방송사에서는 경찰기동대원에 의해 촬영된 사고 직후의 참혹한 장면을 메인뉴스 앞머리에 내보냈는데 방송사 입장에서야 단독입수한 ‘생생한’ 화면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겠지만, 보도하기에 앞서 불에 타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랑하는 가족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비통해 할 유족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보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1993년 목포행 아시아나 항공기가 공항 인근 야산에 추락한 사고를 보도하면서도 우리 언론은 푸른색 원피스차림의 여성이 외줄 로프에 매달린 채 헬기로 구조되는 급박한 상황에서 부상자의 속옷이 그대로 노출된 장면을 반복해서 내보냈고, 이 화면이 ‘특종’이라는 이름을 타고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된 후에 뉴스 제작자들은 국내외로부터 저널리즘의 수준과 품격을 떨어뜨렸다는 비난을 사야만 했다.
저널리스트의 속성상 속보경쟁이 생겨나는 것은 사실 필연적이며, 타사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기사를 1초라도 빨리 내보내고 싶은 기자들의 열의 그 자체를 두고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보다 더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바로 보도윤리다. 언론이 그 직업적 이익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지존(至尊)의 가치를 쉽게 훼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조 및 입원환자들과의 긴급 인터뷰가 다소 늦어진다 해서 과연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 몇 초 사이에 부상자는 생사의 갈림길에 놓일 수도 있다.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을 담보로 한 무모한 과잉취재가 사고 당사자의 ‘살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도진들은 명심해야 한다.
과잉취재 문제를 논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몰래카메라의 남용과 관련된 문제점이다. 아무리 정당한 목적을 지닌 취재라 할지라도 몰래카메라의 사용에는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있다면 이는 결코 유쾌한 경험일 수 없으며 더욱이 그것이 은밀하게 녹화되어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었을 경우에 당사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몰래카메라를 이용한 취재는 용납되어선 안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취재관행을 보면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일선 기자들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가진 영상을 얻기 위해 몰래카메라의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며 이른바 ‘몰카 저널리즘’에 대한 옹호론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목적 자체가 선하다 할지라도 불법적인 과정에 의해 그곳에 이른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선택이라고 강변할 수 없다.
이웃나라 일본의 ‘과잉취재 규제 법안’은 언론에 의한 프라이버시 침해사례와 이에 대한 규제방안을 명시하고 있는데 집, 근무지, 학교 등의 장소를 쫓아다니며 취재하거나 전화, 팩스 등을 지속 또는 반복적으로 시도해 당사자의 생활의 평온을 현저하게 해치는 것 등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일본보다 과잉취재로 인한 피해사례가 적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이를 규제하는 발상이 나오기 전에 언론인 스스로 취재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박웅진(연구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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