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강만석
이제는 상투적인 관용어가 되다시피 한 ‘방송통신 융합’이 현 정권 후반기에 들어 실종의 위기에 몰렸다. 위기의 원인은 무엇보다 방통융합을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던 국정 운영자들의 무관심 혹은 우유부단, 국익보다는 밥그릇 다툼과 감정을 앞세우는 이해 당사자들의 행태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실체에 대한 이해는 미흡했더라도 2002년 당시만 해도 방통융합은 신선하고 선도적인 미디어 정책 공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우리가 방통융합을 위한 제도정비에서 세계무대의 후발주자로 실추되었다. 이해기관들 간의 논쟁 역시 대화와 타협의 궤도에서 벗어나 심판 없이 치러지는 난투극으로 변질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정보통신부와 방송위원회의 대립이다. 실제로는 방송의 눈치를 보고 방통융합을 선거와 연결짓는 정치권, 청와대의 처분을 기다리는 정부, 그리고 언론노조와 시민단체를 후광으로 둔 방송위원회간의 정치적 신경전 양상을 띠고 있다. 국익과 국민에 대한 서비스 제공에는 뒷전이다. 한국 사회의 정치 이데올로기 과잉이 새로운 미디어 정책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셈이다.
21세기 방통융합이 갖는 사회경제적, 문화적 의미를 일부 전문가들만의 관심거리로 폄하하고 있는 우리와 달리 세계 각국은 범정부차원에서 미디어 산업구조의 총체적 재편을 착실히 추진하고 있다. 가장 모범적인 방통융합 사례로 평가받고 있는 영국은 2003년 새로운 커뮤니케이션법의 제정과 통합규제기구의 설립을 통해 디지털-브로드밴드-모바일로 이어지는 미디어 산업 르네상스의 기틀을 다잡아 가고 있다. 사업자에게는 디지털 포트폴리오(digital portfolio)를 구사할 수 있는 인터미디어(intermedia) 전략 공간을 열어주고, 소비자에게는 더 싼 가격으로 보다 많은 미디어 선택의 폭과 통제권을 부여하는 것이 미디어 융합정책의 핵심이다. 통합규제기구인 오프컴(Ofcom)이 펴낸 ‘커뮤니케이션 마켓 2005’ 보고서에 따르면 제도정비 이후인 2004년 한 해에 방송면허 진입시장이 개방되면서 156개의 방송면허권이 새롭게 부여되었다고 한다. 철밥통 시장으로 여겨지던 방송시장에 경쟁을 도입한 것이다. 물론 경쟁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에서 경쟁만큼 소비자의 복지를 나아지게 하는 도구를 찾기도 힘들다.
디지털 기술 진화에 따른 방통융합은 미디어 고립주의의 벽을 허물고 있다. 미디어 산업이 단지 국내 시장만을 대상으로 생존할 수 있는 환경에서 글로벌 산업으로 급속히 전환되고 있다.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뒷걸음치거나 머뭇거리면서 남보다 앞서기를 바랄 수는 없다. IT강국이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우쭐해 있거나 방송 권력의 기득권에 집착하고 있는 사이, 우리 모두가 미디어 빅뱅시대의 낙오자로 전락할지 모른다. 초심으로 돌아가 국익을 위해 대승적으로 위기를 풀어나가자.
강만석 (연구정보센터 책임연구원) [중앙일보 기고 / 2005.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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