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영덕
‘한류’ 듣기만 해도 반갑고 가슴 뿌듯한 단어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문화 민족주의적 감성에 쏘옥 들어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5천년 이상의 한반도 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우리 대중문화가 오늘날처럼 광범위하게 해외 각국으로 확장된 적은 있었던가?
우리는 근대 이전에는 중국으로부터 근대 이후에는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선진문화의 대량유입이 이루어졌고 이렇게 외부로부터 이식된 문화를 바탕으로 우리 나름의 문화를 축적해왔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놓고 볼 때 지금의 한류는 그 간의 일방적 외래문화의 수용에서 벗어나 문화수출국으로의 입지 전환을 의미하는 일대사건에 비견된다. 더욱이 일부 국가의 지엽적인 현상이 아니라 아시아 각국을 횡단하는 문화현상으로까지 파급되고 있어 현지 주류문화에의 편입까지도 은근히 기대하게 한다. 다만 이처럼 방송한류의 화려한 외형은 입증되었음에도 실제로 상대국민의 일상 레벨까지 별다른 저항 없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는 의아스럽다. 일부 국가에서 방송한류에 대한 역풍이 끊이질 않는 것을 보면, 한류는 단순히 남의 문지방을 넘어선 정도에 불과한지 모른다. 먼저 까다로운 국내 시청자의 눈높이를 넘어야
자본의 운동성과 문화의 생명력으로 작동하고 있는 방송산업이 테크놀로지와 결합하면서 이의 해외 확장은 어느 정도 예정 조화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기류에 힘입어 일각에서는 해외 시청자를 겨냥한 이른바 한류용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는 섣부른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콘텐츠제작보다 해외유통의 파워가 세지면서 나오는 발상으로 일견 그럴 듯 해보이지만, 국내 시청자를 무시하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전파주권 또는 문화주권론의 도움을 빌지 않더라도 방송콘텐츠의 존재의의 자체가 국내시청자에 있고 산업적으로도 국내시장에서의 수요규모나 창출이 가장 크며 안정적이라는 점에서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안정적인 국내시장과 시청자를 놓아두고 불투명한 해외시장 수요를 위해 기꺼이 고위험(High Risk)을 감수하려는 제작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외시장은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거의 안중에 없었고 방송한류 이후에도 1차시장이 아닌 후속시장의 범주에 머물러있다. 그런 의미에서 방송콘텐츠는 먼저 국내 시청자의 까다로운 눈높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해외에서의 방송한류도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후속시장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창작이나 제작단계에서 국내 시청자와 해외 시청자의 정서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공통항을 찾아내고 이를 담아내려는 치밀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꾸준한 작업의 연장선상 속에 ‘방송한류의 또 다른 의미’는 물론 아시아적 가치와의 조우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방송한류의 해답은 멀리 보는 ‘우직함’에 있다
한류가 일시적인 붐으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일찍이 아시아에서 미국 방송콘텐츠 등의 퇴조를 통해 일정부분 확인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 방송은 이미 지상파방송의 프라임 타임에서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이웃나라 일본도 그 사정은 매 한가지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편성권이 상대국의 방송사업자에게 있고 상대국에게 국내시장은 제1차 시장이며 진출국에게는 어디까지나 후속시장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국이 작정하거나 트렌드가 바뀌면 외국콘텐츠는 쉽게 국내콘텐츠로 교체되고 퇴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렵사리 거머쥔 한류를 그냥 그렇게 수수방관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한류의 지속을 위해서는 상대국의 유통망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또 다른 진출방식을 적극 고려해야 할 것이다. 현행과 같은 단순한 패키지 판매에 의한 진출방식으로는 방송한류의 퇴조는 불을 보듯 뻔하다. 상대국에 양질의 콘텐츠가 계속적으로 공급되지 않고 방송한류에 대한 수요가 단절되거나 상대국의 콘텐츠 제작수준이 높아지기라도 한다면 손을 쓰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기존의 패키지 수출에 대한 노력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지만, 물오른 방송한류 예비수요를 튼튼하게 묶어둘 수 있는 고정적 유통채널 기반에의 투자, 직접적인 채널운영사업 전개처럼 진출 방식을 다양화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런 방법론은 미디어 제왕이라고 불리는 루퍼트 머독이 즐겨 구사하는 진출방식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와 민간의 협력 속에서 국내의 콘텐츠제작능력을 끌어올리려는 꾸준하고 다각적이며 장기적인 노력이다.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제작기반과 환경을 개선하려는 ‘우직한’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이제는 한류의 품격을 갖추어야 할 때
2004년에 방송콘텐츠 수출은 7천 만 불을 넘어섰고 이런 기세라면 대망의 1억불 수출도 멀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방송콘텐츠 수출의 내실을 들여다보면 이의 일방향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문화관광부의 통계에 따르면, 아시아에 전체 수출의 94%이상을 수출했으면서도 수입은 12%로 인색하기 짝이 없다. 시장 작동원리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웅변한다면, 이는 방송한류의 얄팍한 수준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시종일관 산업논리로 치달아온 한류의 본색에 새 단장을 입히려는 다양한 시도가 전개되고 있다. 한류를 ‘아시아적 가치’ 발견의 계기나 문화소통의 장으로 승화시키려는 작지만 의미 있는 학문적 노력도 엿보이고 있다. 정부와 민간에서도 한류의 반작용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쌍방향’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있다. 다만 한류의 퇴조가 여실해질 때도 그러한 화두가 여전히 살아있을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어쨌든 일방적 진출만이 강조되는 아날로그식 접근으로는 한류 수용자의 환심을 사기 어렵다. 서로가 주고받는 캐치볼 속에서 방송한류의 생명력은 더욱더 빛나고 길어질 것이다. 방송한류가 이제는 품격의 날개를 달고 비상해야 할 때이다.
김영덕 (연구정보센터 연구원 kimyd@kb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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