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만제
2004년도 몇 일 남지 않았다. 한 해 동안 방송계에도 굵직한 일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 지난 7월 정책책임자와 이해당사자가 참여하여 디지털 텔레비전(DTV) 전송방식 논란을 종식시킨 ‘4자 합의’는 고화질(HD) 텔레비전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전송방식 문제는 겉으로는 주파수 효율과 이동수신이 우수한 방식을 선택하는 문제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 핵심은 미래 우리 지상파 방송을 HD로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그 보다는 화질이 다소 떨어지는 표준화질급(SD)으로 하더라도 여러 개의 채널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2000년 미국방식에서 유럽방식으로 전송방식표준을 바꾼 대만은 미래의 지상파 텔레비전으로 고화질 보다 다채널을 택한 경우이고, 우리의 ‘4자합의’는 다채널보다 고화질 선택을 재확인한 것이다.
전송방식 논란 종식을 계기로 HD텔레비전 활성화를 준비하고 가전업계도 내수와 수출확대를 통해 경기회복에 기여하자는 제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8월에 열린 올림픽을 HD프로그램을 홍보하는 기회로 삼고, 주당 13시간씩 방송하던 HD프로그램 의무 편성시간을 20시간으로 늘리겠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 ‘DTV 제대로’ 보기 캠페인을 한 달 동안 벌리면서 보급 확대를 꾀하기도 하였다.
6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 HD텔레비전 보급이 얼마나 늘어났고 볼만한 HD프로그램은 얼마나 많아졌나를 따져볼 때 그 성과는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는 상태이다. HD텔레비전에 관심을 갖는 시청자가 많지 않고 실제 HD프로그램을 수신하는 시청자 수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HD텔레비전 확산이 이처럼 지지부진한데는 무엇보다 HD 수준으로 볼만한 프로그램들을 제대로 만들지 않고 있는 지상파 방송사의 책임이 크다. 방송사들이 HD라는 이름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들은 아침시간 토크쇼 프로그램이나 가요 프로그램 같이 제작비가 싼, 무늬만 HD 프로그램들이 대부분이다. HD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프로그램 제작시도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현장감 넘치는 스포츠 프로그램 조차도 제작되지 않고 있다.
물론 HD프로그램은 아날로그 프로그램에 비해 제작비가 많이 들고 지상파 방송사들의 광고 판매율이 지난해에 비해 크게 줄어든 가운데 보는 사람도 거의 없는 HD 프로그램 제작에 많은 제작비를 투입하기 어려운 방송사의 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화질로도 큰 불만이 없는 시청자들이 특별히 고화질로 볼만한 프로그램도 없는 상태에서 HD텔레비전 수신 장치를 마련하는 데 비용을 지불하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의무편성시간에 연연하면서 소극적으로 기회를 엿볼 것이 아니라 시청자들이 고화질로 볼만한 프로그램, 새로운 영상문화시대를 여는 미래형 프로그램을 하나 둘 적극적으로 개발함으로써 시청자들의 관심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DTV 전송방식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당시나 ‘4자 합의’라는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생각해 볼 때 현재 HD 프로그램은 너무나 볼품이 없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고화질 시대로 가는 본류는 멈춰서 있고 고화질 전송방식을 보완을 위해 도입키로 했던 서비스를 위해서 모두들 분주하다.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다. 새해에는 경기가 회복되어 광고시장도 정상화되고 좋은 HD프로그램들이 많아져서 시청자들 사이에서 우리 방송이 달라졌다는 평가들이 늘어나게 되길 희망한다.
이만제(연구센터 수석팀장·언론학박사)
[국민일보 기고 / 2004-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