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만제
드라마에도 거대한 제작비가 투입되는 대형화 시대가 열렸다. 일본 고베에서 촬영한 ‘유리화’는 46억원, 미국 뉴욕에서 상당부분 촬영중이고 내달부터 방영되는 ‘슬픈연가’는 6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등 많은 대형 드라마가 제작되고 있다. 드라마 수익성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국내외 투자자금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 이런 변화는 드라마 발전의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지만 드라마 제작이 투기성으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성을 동시에 지닌다.
우선 그 동안 자금난에 허덕이던 외주 드라마 제작업계가 숨통이 트였다는 점은 다행한 일이다. 전작제를 통해 제작사가 저작권을 갖게 된다면 대형 제작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산업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우수한 대본과 제작인력을 유치하고 새로운 제작기법을 도입하여 드라마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다. 한류 지속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아는 바대로 대형 제작비 투입이 자동적으로 좋은 드라마 제작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작비의 대부분이 해외촬영 경비나 대형스타 출연료로 지불되는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오랜 문제점은 대형드라마에서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수요 예측이 어려운 드라마는 높은 시청률을 담보하기 위해 대형스타, 특정 장르 및 이야기 구조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대형 드라마의 경우는 회수비용 부담이 크기 때문에 보다 강력한 시청률 확보 장치를 필요로 한다. 시청자들에게 눈요기 거리를 제공하는 해외촬영이 늘고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쉬워진다. 실제로 근래의 대형 드라마들은 한결같이 해외촬영과 이미 바닥이 드러난 드라마 소재인 복잡한 가족관계, 삼각관계, 부유층, 불치병 등과 같은 흥행코드를 되풀이 하고 있다. 대형 제작비가 새로운 포맷이나 대본 개발, 제작시스템 개선에 투입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사실 오래 전부터 우리 생활의 일부를 차지하는 중요한 오락 또는 문화수단이 되었다. 단순한 휴식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고 눈물을 훔치는 문화 감수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과 아름다움 자체를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드라마가 대형화로 인해 투기대상으로만 머물게 된다면 투자자, 제작자, 시청자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한류의 주류를 이루는 드라마들이 대형 블럭버스터 급이 아니라 ‘겨울연가’ ‘가을동화’ ‘아름다운 날들’ ‘천국의 계단’처럼 아기자기하고 한국적인 멜로 드라마들이라는 전문가의 지적도 있다. 모처럼 찾아 온 아시아지역에서의 드라마 교류 기회가 투기자본의 한탕주의식 각축장으로 전락할 경우 한국적 문화 향수를 기대하는 해외 수용자들이 금방 식상할 것이라는 우려도 뒤따른다. 할리우드에서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기 위해 1만개의 대본이 검토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200여개의 영화 중 한 두 편만이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한다는 사실은 한류의 지속, 확장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를 보여준다.
드라마 대형화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기회인 것은 분명하다. 이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제작비는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어 외형의 화려함만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우수한 작가 와 신인 연기자들을 발굴 육성하는 등 드라마 제작의 구조적 취약점을 보완하는 장기적 안목에서 쓰여져야 한다. 조급하게 시청률에 연연하는 경박한 드라마가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내외 시청자들이 가슴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말 그대로 ‘대작(大作)’ 드라마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만제(방송진흥원 연구센터 수석팀장·언론학박사)
[국민일보 기고 / 200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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