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만제
케이블 텔레비전과 위성을 통해 150여개의 유료 채널을 볼 수 있고 DMB가 도입되면 또 20∼30개의 채널을 휴대 단말기를 통해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디지털 케이블 텔레비전, IP-TV, VOD, 무선 인터넷 그리고 인터넷 방송 등이 활성화된다면 채널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날 전망이다.
디지털 시대의 폭발적 채널 증가로 경쟁이 심화되고 공영성의 약화가 우려되는 가운데 공영방송이 어떻게 제 자리를 찾아 나가야 할지가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특히 정파, 이념, 지역 그리고 세대 간 갈등이 곳곳에서 표출되는 현실에서 공영방송은 더더욱 막중한 역할이 요구된다. 이미 탄핵보도에서 공정성 시비가 있었고 언론개혁이라는 화두가 던져진 가운데 국정감사에서는 지상파 방송의 독과점 구조의 문제점과 공영성에 대한 지적들이 있었다.
이런 관심을 반영한 듯 세계 공영방송의 사표이자 방송 공정성의 전범이라는 BBC의 전 사장 그렉 다이크의 방한은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고 13일 있은 방송과 정부의 관계를 주제로 한 강연회는 만원을 이루었다.
알려진 대로 그는 블레어 현 총리와 가까운 사이이며 집권당인 노동당에 1억원을 기부할 정도의 친여성향 인물이었다. 그러나 BBC 사장시절,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는 달리 공정성을 실현하기 위해 영국의 이라크 참전 명분이 되었던 대량살상무기(WMD) 관련된 정부 발표가 사실과 다르다는 보도를 하여 영국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화근이 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퇴임 전 200만명이 런던에서 반전시위를 벌일때, 전쟁 참여에 관한 찬반 양측의 입장을 공정하게 다루기 위해 반전시위에 참가한 제작자들은 관련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방송인은 개인의 성향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강연회에서 다이크는 디지털시대의 채널 증가에 따른 경영위협 때문에 방송이 정부와 유착될 위험이 커져간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공영방송의 공정성은 정부와의 유착의 결과로 얻어지는 제도적 지원 없이도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방송사의 경쟁력에서 나온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재직 시절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BBC 예산 64%가 프로그램 직접 제작비 이외의 간접 사용비로 사용되던 것을 12% 까지 혁명적으로 줄이면서 연간 5억달러를 절감하였다.
우리 공영방송은 이 시대 최고의 제작인력들이 모여 일부 세계시장에까지 수출하는 프로그램을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그 경쟁력과 공정성은 BBC 수준에 비할만한가. 우리 방송의 순수 제작비 지출 비율은 BBC에 비해 얼마나 경쟁력이 있는가. 따져보려 해도 세세한 내역은 공개조차 되지 않는다. 독립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방송의 성역화가 제도 또는 관습을 통해 명시적 묵시적으로 정당화되어 권력화되고 있는 것이다.
다이크의 지적대로 방송과 정부는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갈등적인 관계가 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상파 공영방송이 독과점 구조의 제도적 혜택과 시청료라는 안정적 재원에 안주하여 방송의 성역화와 권력화를 꿈꾼다면 디지털시대 방송의 공정성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BBC가 정부보다 더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제도 덕분이 아니라 BBC 구성원의 피나는 노력으로 쌓아온 문화의 결과라는 말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이만제(연구센터 수석팀장·언론학박사)
[국민일보 기고 / 200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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