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만제
뉴스나 드라마,쇼 같은 대부분의 방송 프로그램들이 방송국 내부에서 제작,방송되는 것과는 달리 잡지나 책은 주로 외부사람들이 쓴 원고로 만들어진다. 출판사형 방송국은 자체 제작 없이 외부제작 프로그램만을 편성하는 기존방송과 전혀 다른 방송국이다. 1992년 설립된 영국의 채널4, 1992년부터 프랑스와 독일이 공동운영하고 있는 문화전문채널 아르테(ARTE)가 대표적인 출판사형 방송국이다.
국내에서도 지난해부터 방송의 산업구조를 튼튼하게 하고 문화 다원성 확장을 목적으로 출판사형 방송국인 ‘외주문화채널’을 설립하자는 주장이 정부(문화관광부) 정책의 하나로 제시되었다. 그 동안 설립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열띤 논의가 있었지만 결말이 나지 않은 상황이다. 문화관광부는 지난달 채널 설립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방송위원회는 그 설립 취지는 공감하지만 방송산업진흥정책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에서 방송국 설립을 추진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최근 발표했다.
방송 현업인들은 새 방송국 설립 보다는 기존 방송국 운영을 개선하는 것이 대안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비해 외주 프로그램 제작 주체들은 현재의 방송국 조직구조 하에서는 불공정한 관계를 개선 할 수 없기 때문에 새 채널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방송국에 속한 제작자 중 일부도 거대 방송사 안에서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국내 성인의 하루 평균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3시간이 넘는다고 한다. 방송의 디지털 전환으로 고화질 텔레비전(HD TV)보급이 급속히 확장될 전망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방송물 제작이 쉬워졌을 뿐더러 문화 각 영역이 영상 쪽으로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 바보상자,시간보내기 수단의 오명을 벗고 새로운 문화적 기능 수행을 준비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 요구에도 불구하고 현재 산업사회 조직구조를 갖는 국내의 거대 지상파 방송국들은 조직 내 엘리트 구성원들의 시각과 관료조직의 관점에서 주로 경쟁력 있는 프로그램을 제작, 선택하여 편성한다. 물론 이들이 중요한 사회문화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평균적인 취향의 이런 편성 때문에 많은 시청자들은 편안하게 문화적 감수성을 확장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날 기회를 잃게 된다. 현란한 몸놀림과 이름난 출연자들의 소음 같은 말장난, 전국 시청자가 관심을 갖는 대형 드라마가 대부분이다. 소수자의 의견, 문화 또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들은 발붙이기가 어렵다. 이미 예술문화 전문 유료 채널들은 문을 닫은 지 오래이다. 다른 문화상품과 마찬가지로 방송시장에서도 팔리지 않는 프로그램들은 유통되지 않는 것이다.
KBS 방송국 종사자수는 지난해 기준으로 5127명이다. 이 인원의 50분에 1정도 되는 100 여명의 인력으로 방송국을 운영하고, 제작은 모두 외부에서 담당하는 출판사형 방송국이 가능하다. 공공의 재산인 전파를 이용해서 얻어지는 이익이 방송국 종사자들에게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방송국 밖의 창작자들에게 돌아가는 모델인 것이다. 이 모델은 다양한 제작주체들에 의해 다양한 관점의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방송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갈등을 미리 예방하고 그 사회의 비전을 준비하는 미래형 방송국이 될 수 있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에 머물려는 쪽보다는 변화를 꾀하는 쪽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이만제(연구센터 수석팀장·언론학박사)
[국민일보 기고 / 2004.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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