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권호영
최근 몇 년간 디지털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방송ㆍ통신융합이 급진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규제기구의 위상과 직무에 관한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갈등만 계속되고 법제도 정비가 지체되는 이유를 방송과 통신 정책의 정치성, 관련 부처간의 주도권 다툼에서 찾는 시각이 많다. 관련 부처간의 논의가 계속될수록 갈등이 해소되기 보다 오히려 심화하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일부에서는 방통융합에 따른 규제기구 개편 논의의 결론은 결국 국가 최고 통치자가 내릴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00년에 발효된 현재의 방송법은 1994년부터 준비됐지만 결과적으로 매우 엉성하게 만들어졌다. 비교적 최근인 1999년에 제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방통융합 현상에 부응하는 체제를 전혀 갖추지 않은 점, 방송과 방송시장에 대한 부정확한 정의, 지상파방송의 지배력 전이를 방지하는 장치의 부재, 방송위원회의 운영경비에 대한 규정 미비 등 허술한 점이 매우 많다. 그 이유는 방송법의 통합을 논의하면서 방송 정책의 이념과 목적을 설정하고 이에 적합한 규제 체제를 그려나가기 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1994년 이후 방송법을 통합하기 위한 논의의 대부분은 `방송위원회의 위원구성 및 위상 문제'와 `위성방송에 대기업의 진입 허용 문제'에 할애됐다.
방통융합과 관련한 법제 마련도 이같은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우려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융합에 부응해 법제를 정비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문제는 법제의 정비가 마치 규제기구의 위상과 직무의 정비인 것처럼 논의된다는 데 있다.
법제도의 개편이 바로 규제기관의 개편을 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규제기관 개편 논의 이전에 다뤄지고 합의돼야 할 여러 쟁점들이 있다. 현재 논의 수준은 방통 융합에 따른 법제 정비에 필요한 전체의 3분의 1도 다뤄지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앞으로 논의해야 할 쟁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방통융합에 대응해 서비스, 네트워크, 사업자를 1대 1로 대응시키는 기존의 수직적 체계를 네트워크, 서비스, 콘텐츠의 수평적 체계로 바꾸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국내에서도 이런 방향으로의 개편이 필요하다. 수평적 체계로의 개편을 결정해도 다른 쟁점들이 줄지어 있다. 네트워크, 서비스, 콘텐츠 그리고 방송, 통신 및 융합형 서비스와 콘텐츠 등을 정의해야 한다. 정의에 토대를 두고 규제의 수준과 구조를 정해야 한다. 그 다음 규제 완화와 경쟁의 도입이라는 세계적인 추세를 어느 수준에서 수용할 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송과 통신의 정의, 규제 구조, 규제 수준을 결정하는데 있어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 이념에 대한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 이런 수순의 논의와 합의가 이뤄진 다음에야 방통융합에 적합한 법제가 마련될 수 있다.
방통융합의 논의가 어려운 이유는 방송이 강조하는 `공익'과 통신이 강조하는 `시장원리'와 같은 기본적인 시각 차가 있기 때문이다(방송부문에서 공익이 실현되고 있는지, 통신산업이 시장원리로 움직이는지 의문이지만). 방송계가 공익과 문화의 우위를 강조하고, 통신계가 시장 원리의 우위를 강조하면 소모적인 논쟁이 지속될 것이다. 유럽연합은 방통융합에 대응해 네트워크와 서비스에 대해서는 회원국들에게 지침을 따를 것을 강제하지만, 콘텐츠 규제에 대해서는 회원국들의 자율에 맡겼다. 콘텐츠의 공익성과 문화적 측면을 인정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EU 회원국이지만 영국은 기술과 경쟁을 중시했고, 프랑스는 방송의 문화 사회적 측면을 우선시하고 있다. 한국에 적합한 법제를 갖추기 위해 규제기구 외에도 의제가 많으므로, 이러한 의제의 선정에 좀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권호영 (연구정보센터 수석팀장 hykwon@kbi.re.kr) [디지털타임즈 기고 / 2005.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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