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강익희
최근 한류 열풍으로 인한 국내 드라마의 경제적 성과는 영화에 이어 방송도 21세기 우리 경제를 선도할 수 있는 문화상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콘텐츠가 왕’이라는 말이 영화에 이어 방송에서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너무나도 많은 관심과 지원이 방송 콘텐츠의 제작과 유통부문에 쏟아지고 있는 듯하다. 공공부문은 마케팅 지원이나 국제교류 지원 등으로, 민간부문은 새로운 장르와 스타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문화상품의 경제적 파급효과뿐만 아니라 문화적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요,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 염려스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방송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이다. 물론 스타 배우나 스타 작가, 아니면 스타 피디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방송콘텐츠 제작은 기획, 제작 그리고 사후제작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의 노력을 요구하는 협업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두 명의 스타는 마케팅을 위해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전체적인 프로그램의 질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더 나아가 한두 작품의 성공으로 한국 방송의 성공을 점칠 수는 없다. 물론 킬러 콘텐츠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더욱 요구되는 것은 지속적으로 경쟁력있는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는 기초 여건을 조성하는 일일 것이다.
방송 일은 창조적인 일이다. 방송인들도 의사와 변호사 수준은 아니지만 전문적 지식을 갖출 것을 요구받고 있으며, 변화하는 기술과 환경을 따라 잡을 수 있도록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방송인들 또한 자신이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현재 많은 젊은이들은 방송 일을 가장 선호하는 직업의 하나로 꼽고 있으며, 최근 대학생들의 직업선호도조사에서도 방송전문가는 교육전문가 다음으로 선호하는 직업으로 부상했다. 아마 이들은 소위 ‘언론고시’를 통해 진입할 수 있는 대규모 방송사의 일자리를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일자리는 고용안정도 어느 정도 보장되고 높은 임금과 직업적 위세를 제공하는 그야말로 국내 최고 일자리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규모 방송사의 인력만이 방송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방송환경은 외주제작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 추세이며, 방송사도 경영합리화 전략으로 고용의 유연화 및 비용절감을 위해 지금보다 비정규직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것이다. 향후 방송 인력의 구성에서 대규모 방송사의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과 외주제작을 맡은 독립제작사 제작인력의 비중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러한 방송인력 구성은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1970년대 까지 과거 정규직 중심이었던 영국, 일본, 독일 등의 방송제작인력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프로젝트 기반 제작체계로의 변화와 더불어 프리랜서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방송사의 비정규직은 흔히 프리랜서라고 불린다. 사람들은 프리랜서란 외래어에서 자유스러운, 경제적으로 안정된 전문인을 떠올린다. 하지만 방송 프리랜서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에 가깝다. 언론노조의 방송사 비정규직 실태조사에 따르면, 방송 비정규직의 일주일 평균 노동시간은 약 59시간이며, 약 8할이 월 150만이하의 임금을 받고 있다. 이러한 저임금과 고강도의 노동이 방송 비정규직의 실상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비정규직은 혹독한 수련기간을 거치고도 경력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사실이다. 평균적으로 프리랜서 PD나 작가의 정년은 30대 후반 아니면 40대 초반이라고들 한다. 이제 막 뭔가를 알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시기에 그만두어야 한다. 그 나이를 넘어 성공한 PD는 예외적인 경우이거나 대규모 방송사 출신들이다.
물론 해외의 경우에도 방송 프리랜서들의 처우는 정규직처럼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들 또한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음 프로젝트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마음 한 구석에는 늘 경력 형성에 대한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다. 경제적으로도 국내의 방송 프리랜서들은 정규직보다 임금의 차이가 심하다.
즉, 이들의 임금은 아주 높은 경우도 많지만 아주 낮은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외의 방송 프리랜서들에게는 최소한의 생계 유지와 경력 유지를 위한 장치가 마련되어있다. 미국의 작가협회는 최저기본계약(minimum basic agreement), 영국의 연출자협회는 연출자 권익안(director's right agreement)을 통해 제작사로 하여금 프리랜서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도 민방노련 산하에 방송스태프유니온이 프리랜서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직능단체나 노동조합의 노력 이외에 프랑스에서는 정부차원에서 배우들에게 다른 직업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실업수당을 지급하기도 한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외국에서는 40대 FD가 가능하고, 50대 프리랜서 카메라맨이 그보다 한참 젊은 PD와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비정규직에 대한 처우개선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최근까지도 방송 비정규직은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하겠다. 이들을 대변할 수 있는 변변한 직능단체도 노동조합도 아직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소위 지상파의 바우처 계약직으로 불리는 비정규직은 근로자성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바우처 작가들은 인건비가 아닌 원고료를 받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송은 창조적 예술이나 멋진 공동체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것이 못된다. 이전에는 많은 고학력의 유능한 청년들이 방송일을 꿈꾸고 도전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방송 비정규직이 진정한 프리랜서나 대기업 정규직으로의 가교가 아니라 2차 노동시장으로의 함정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되면서 방송 일은 더 이상 고학력의 유능한 청년들이 도전하는 곳이 아니다.
그럼 이제는 누가 TV 프로그램을 만들 것인가. 방송 콘텐츠는 사람이 만든다. 방송 노동시장은 창의적이고 재능있는 젊은 피들이 끊임없이 수혈되어야 하는 곳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나라 방송 콘텐츠의 미래는 없다. 어떤 사람은 비정규직의 저임금과 차별적인 근로조건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이 될 것이고, 현재 비정규직에 대한 처우도 시장원리의 작동 결과라고 말한다. 과연 우리나라 방송 노동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시장은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과점적 체제에 의해 왜곡된 시장은 아닐까? 많은 전문가들은 정말 시장원리가 작동하고 경쟁력 있는 방송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점적 체제나 규제된 광고시장에 의해 보호받는 시장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방송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말 능력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리랜서들이 많이 양성되어야 할 것이고, 이들의 경력이 40세의 문턱에서 주저앉게 되는 터무니없는 일 또한 없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한류의 열기에서 잠시 벗어나 한국 방송의 미래를 위해 방송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과 방송 프리랜서의 육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는 일이다.
강익희(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센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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