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정윤경
온 나라의 구석구석이 보수·수리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길거리의 파헤쳐진 도로들, 건물의 신축과 리모델링, 지자체 단위로 이루어지는 각종 사업과 공사들, 그리고 현 정권 최대의 공약사업인 신행정수도 건설도 설왕설래 속에서 서서히 일정을 따라 진행되고 있다. 과거부터 보수·수리하고 건설하는 일에 꽤 익숙해 온 우리이지만, 최근의 작업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지닌다. 최근의 작업은 70년대식의 양적 발전 보다는 환경과 웰빙을 고려하는 질적인 차원의 보수작업이라는 점에서 차별되기 때문이다.
물리적 대상의 수리·보수 이외에도 최근에는 또 한 가지 까다로운 분야의 보수· 수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른바 진보 세력의 보수 진영 수리 작업이다. 물론 작업의 대상이 보수 진영에 국한된다고 할 수는 없으나, 현 정권의 특성상 최근의 작업은 이 같은 모습으로 비추어 진다. 특히 최근의 정국을 보고 있노라면, 잘 사는 내일을 위해 이념적 성숙함과 견실함을 유보한 채 단선적 사고방식, 흑백 논리에 물들어 살아온 우리의 병이 얼마나 고질적인 것인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70년대를 모든 문제의 발단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니다.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던 이 시기가 우리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진보니 보수니 하는 논의는 사치스런 이념적 유희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결과론에 그치는 역사적 평가야 어찌 되었든, 우리 사회는 이제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는 21세기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새로운 세계에 우리가 동참하기 원한다면, 더 나아가 앞으로의 사회에서 선봉적 역할을 담당하기 원한다면, 발전에 가려 그동안 등한시해왔던 분야의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야만 할 것이다. 구태의연한 현상유지는 도태를 의미한다. 그야말로 변화와 개혁이라는 아픈 작업이 불가피한 시기에 봉착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중추적인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분야는 무엇보다도 문제를 직시하고 올바로 비판함으로써 통찰력을 제시하되, 사회적 결집이라는 핵심 과업을 잊지 않는 제4의 정부, 언론이라 하겠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이 같이 사려 깊은 언론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원하던 원치 않던, 혹은 의도적이던 비의도적이던, 현대사회의 언론은 편재성과 누적성에 힘입어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미디어 통폐합과 규제 완화를 거치면서 언론 기업은 그야말로 무적 파워를 누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언론이 지닌 힘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사회의 발전을 위해 정부 기능을 감시하고, 시장을 조정하며, 여론을 제대로 수렴한다면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는 오히려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민주사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언론은 이 같은 역사적 사명과 공익 정신은 상실한 지 오랜 듯하고, 목전의 이익과 세력 다툼에만 몰두하는 영락없는 시정 잡배의 모습으로 몰락해버린 듯하다.
신문은 신문대로 과거의 세력 복원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무기력하고 거대한 공룡이 되어버린 방송은 행여나 빙하기가 도래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특히 문자시대의 종말에도 불구하고 지상파 방송 진출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신문은 틈만 나면 신세대 경쟁자인 방송 헐뜯기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광고주 눈치보기와 정치적 기회 엿보기에 급급한 방송은 할 말, 못 할 말을 제대로 분별조차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방송심의규제기구인 방송위원회가 입주해 있는 건물의 입구는 항상 자기 분야의 이익을 주장하는 각종 방송업계의 시위로 시끄럽다. 방송계 내에서도 목소리가 제각각인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언론을 감시하며, 사회의 현상을 학문적으로 고찰해야하는 학계조차 최근에는 균형을 잃은 듯하다. 동일한 분석방법을 적용하여 동일한 시기의 방송을 분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는 해프닝은 사회과학이란 학문 자체의 한계 때문인지, 혹은 학문 이외의 변인(變因)이 개입한 탓인지 실로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은 바로 시민들이다. 매체 이기주의에 의한 아전인수격 보도로 도대체 어떤 것이 진실인지, 어떤 거울에 의지하여 현실을 들여다보아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신문과 방송이 비추어주는 세상이 양극단을 치닫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극단적인 예로 신문을 주로 구독하는 문자세대와 방송에 주로 의존하고 있는 영상세대는 현실에 대한 전혀 다른 상을 지니고, 전혀 다른 판단을 하며, 서로를 탓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지역주의를 제대로 청산하기도 전에 한반도 전체가 세대간 전쟁에 휘말리게 된 셈이다. 물론 언론이 공중을 올바로 계도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계몽주의 사관이나 엘리트주의 언론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언론은 시민을 혼란에 빠트리거나 양분시키지는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앞장서 분열을 유도하고 있는 느낌이다.
보도 장르가 아닌 방송의 여타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이다. 아시아를 휩쓸고 있다는 한국 드라마는 여전히 출생의 비밀, 신데렐라 신드롬 속에 침몰되어 있다. 게다가 현실에서 보지 못한 온갖 미려함으로 우리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키고, 지난한 현실을 타파할 한탕주의에 집착하게 만든다. 토크쇼, 오락물들에서는 드라마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한 그들만의 신변잡기가 이어진다. 물론 재치와 해학보다는 단세포적인 발상과 허무한 말장난이 난무한다. 어느 한 곳에서도 정치적, 문화적으로 성숙한 21세기의 시민을 잉태할만한 언론을 찾기 어렵다. 한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언론이 중요한 힘을 발휘하여 왔듯이, 21세기의 초입에서 맞이한 이 중요한 변혁의 기회에 깊고 넓은 균형감각을 통해 우리를 올바로 이끌어줄 언론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개개 언론이 저널리즘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언론의 잘잘못을 가리기에 앞서 언론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조성하는 일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무엇보다 새로운 서비스 도입에만 정책적 역량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존 매체들이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타 매체에 대한 교차 진입 기회가 좀 더 확실히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기존 매체들이 지닌 자본과 힘이 엉뚱한 세력 다툼에 소모되기 보다는 새로운 역량의 개발에 투자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또한 탈규제라는 테제에 대항하기보다는 가능한 분야는 최대한 상업화하고 시장에 맡기는 한편,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올바로 감시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의식 있는 시민과 중량감을 지닌 중립적인 심의기구의 몫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태산인데, 시간은 야속하게도 주저없이 흘러간다. 항상 뒤늦게 이 나라 저 나라 모방하기에 열 올리기보다는, 21세기에는 정보화사회에는 부단히 해결하고 남보다 먼저 실현하는 대한민국이 되기 원한다. 무엇보다도 여기저기 편가르고, 웅성거리는 이 수선스러움이 현명한 언론정책과 신중한 신문, 방송에 의해 곧 종료되기를 바라며, 오늘의 어지러움을 기꺼이 인내해 본다.
정윤경(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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