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송종길
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집중호우와 홍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는 많은 인명 손실과 재산 피해를 일으킨다. 이제 또 다시 여름이 오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자연재해로 겪었던 아픔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일상 속에서 지내는 국민들은 반복되는 자연재해에 그리 민감하지 못하다. 게다가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너무도 많은 다른 유형의 재해를 접하다 보니 어느새 재해 불감증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여름이면 겪는 일이려니 하는 의식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올해도 평균적인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는 감당해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매년 지적되었듯이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재난방지체계의 구축이 필수적이다. 최근 정부가 국가재난방지체계를 더욱 정교화하기 위해 소방방재청을 신설(2004.6)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방재청의 신설이 국가재난방지체계를 갑자기 선진국 수준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국가재난체계의 정비는 시급하지만 시간이 필요한 국가적인 정책과제인 것이다.
다만 한가지, 이미 초여름에 들어선 시점이라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시간을 다투어 지금부터라도 당장 준비해야 할 과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국민들에게 자연재해가 발생했음을 알리고 재해에 대처할 수 있는 정보를 신속히 전달할 수 있는 재해방송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재해관련 정보는 3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우선, 사전에 피해 예상지역 주민들에게 재해관련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재해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둘째, 재해가 발생하고 있는 지역 주민들에게 재해 진행상황과 대처요령을 알려주고 안심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연재해가 물러간 이후, 지역 주민들이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피해 복구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지난 여름 태풍 매미 때 우리는 이 같은 정보를 제공 받지 못했다. 피해 지역의 주민들에게 목숨을 구해줄 정보란 존재치 않았던 셈이다.
자연재해의 피해를 사전에 예방하고 재해발생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방송이다. 많은 국가들은 방송사를 방재기관으로 취급하고 있고 몇몇 국가의 방송사들은 기상청이나 국가 방재기관보다 빠르게 자연재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국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공영방송 NHK는 국가기관보다 뛰어난 기상예보와 분석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재해발생시 방송사의 역할보다 재해 방제기관으로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미국의 지역 방송사들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마치 전쟁이 난 것처럼 재해방송을 실시한다. 모든 채널에서는 재해 발생을 알리는 경고음과 함께 재해방송이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방송법에 의하면 재해방송의 주관방송사로 공영방송 KBS가지정되어 있고 방송위원회는 재해방송을 각 방송사에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피해가 컸던 자연재해가 지나간 후에는 어김없이 방송이 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 비판과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 방송사들이 재해방송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방송사들도 적절한 시점에 기상 속보와 특보를 방송하고, 피해가 발생한 시점부터는 정규편성을 중단하고 재해방송을 실시한다. 그러나 어려운 기상조건 속에서 재해방송을 실시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피해가 발생되는 지역중심의 보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이들 지역주민들에게 필요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재해방송하면 떠오르는 것은 흔들리는 나뭇가지, 세찬 빗줄기, 그리고 몸을 어렵게 가누면서 기상상황을 설명하는 현지 기자의 중계장면 정도가 고작이다. 피해지역의 주민들에게 그런 장면으로 채워진 재해방송은 무의미하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태풍은 어떤 상황이며 그 속에서 어떤 대처를 해야 하며, 어떤 지역에 어떤 위험이 발생할 것인지와 같이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작년에 태풍 매미는 공공시설 2조 9,397억 원, 사유(私有)시설 1조 2,828억 원 등 4조 2,225억 원의 재산 피해와 131명(사망 119명, 실종 12명)의 인명 피해를 준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자연재해로부터 피해를 줄이는 것은 방송사만의 임무는 아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방재체계를 갖춰 자연재해를 대비하고 피해를 최소화 해야 한다. 다만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방송보다 효율적으로 재해관련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에 방송사가 국가 재해방재기관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작년에 있었던 태풍 매미 때와 같은 재해방송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 굳이 외국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지상파방송사는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통해 방송을 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지상파 방송의 당연한 의무다. 방송의 편성권만을 무조건 주장하거나 지역방송의 열악한 자체제작 능력을 내세워 재해방송의 어려움을 호소해서는 안된다.
가능한 부분부터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우선 중앙방송사에 의해 통제되는 지역방송 편성권에 일부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재해로 인한 피해가 예상될 때 지역방송사는 중앙방송사와 협의 없이 재해방송을 실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지역방송사의 제작능력 등도 고려해야겠지만 우선 가능한 것들부터 실시했으면 한다. 가장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새로운 재해방송 형태는 라디오를 통한 방송 3사 공동 재해방송이다. 자연재해 발생지역 내의 모든 라디오방송이 참여하는 재해방송은 방송사들이 합의하면 당장 가능하다. 텔레비전의 공동제작은 현실적으로 방송사간 합의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재해지역 내의 같은 네트워크 방송사간 공동제작은 가능할 것이다. 당장 올 여름부터라도 같은 권역의 방송사들이 참여하는 공동제작 형식의 재해방송을 준비해야 한다.
그동안 재해방송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고 해서 규제기구인 방송위원회가 강제적인 방식을 통해 재해방송을 실시하게 하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방송사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강제와 이에 대한 규제는 피할 수 없다. 올해도 지난해와 같은 재해방송을 한다면 국민들은 지상파 방송사들에게 냉혹한 평가를 내릴 것이다
비록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방송사 스스로 올 여름에는 이전과는 다른 재해방송을 보여줘야 한다. 국민들이 달라진 재해방송을 접하고 방송사의 노력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단 한 명이라도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기꺼이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재해방송을 실시하는 지상파 방송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결코 헛된 꿈이 아니길 바란다.
송종길(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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