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김영덕
이국의 드라마가 방송되기 위해서는 상당 수준의 제작력과 함께 각종 문화적 할인을 극복해야하는 높은 허들이 요구된다. 게다가 그 당사자가 이전에 우리가 문화적 모방을 일삼아왔던 문화선진국 일본이라고 한다면..... .
그런 일본 땅에서 우리 드라마가 연착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처럼 여겨졌었다. 그런데<겨울연가>(일본명‘겨울소나타’)는 해냈다. <겨울연가>가 누구도 감히 예상치 못한 일보(一報)를 전해준 것이다.
일본에서 겨울연가의 인기는 일종의 사회적 현상에 가깝다. 굳이 시청률의 높음(NHK에서의 시청률은 4월 3일 9.2%, 4월 10일 10.9%, 4월 17일 11.4%, 4월 24일 12.3%, 5월 1일 9.2%로 이전의 동시간대 평균시청률 보다 2〜3배 높다-출전 : Video Research Ltd, 關東지구)을 빗대지 않더라도, ‘겨울연가 신드롬’이라는 용어가 회자되고 있고 ‘겨울연가 이혼’(주부들이 갑자기 ‘겨울소나타’에 열광해 팬클럽을 만들고 책·CD·DVD등 관련 물품을 사들이다가 부부 싸움으로 이혼하는 것. 출처 : 조선일보 4월 20일자)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대중이면 현상의 강도를 능히 짐작할 만하다. 심지어 언론에서 <겨울연가>의 남자주인공 배용준을 ‘용 사마’(‘사마’는 존경과 공경을 나타내는 접미어로 배용준의 ‘용’에 ‘사마’를 붙였다)라는 극존칭으로 치켜세우고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한국의 드라마와 한국인 스타에 열광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이 합치되면서 겨울연가 신드롬이라는 화학반응이 만들어졌겠지만, 무엇보다도 일본 드라마에서 좀처럼 다루지 않는 틈새를 파고든 신선감이 대중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데 주효하지 않았나 싶다.
일본 방송관계자들은 대체로 한국 드라마가 감성적 소구를 축으로 진부하게 갈등과 반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일본 트렌디 드라마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감을 주고 중장년층에게는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같은 한국드라마의 틈새시장 공략이 일본 방송에서 가능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월드컵 축구 한일 공동개최에 힘입은 바 크다는 점이다. 월드컵 축구대회는 일본인에게 이웃나라 한국이 일본과 등신대(等身大)로 ‘인류 최대의 이벤트’를 공동 개최를 할 만큼 성장했음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 전만하더라도 한국은 주로 하드 뉴스에서 다루어져 왔으며 최루탄에 얼룩져 있고 ‘과거사로 귀찮게 구는 한국’이라는 경직된 이미지가 앞서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월드컵 축구를 계기로 공동개최 당사자인 한국에 대한 ‘소프트’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면서 한국의 스포츠 소식뿐만 아니라 영화, 방송, 게임 등의 한국산 대중문화가 대량으로 일본에 소개되었다. 월드컵 축구 공동개최라는 세계적 이벤트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우리 대중문화의 일본 진출과 성공은 당분간 요원했을지 모른다.
이러한 월드컵 축구 공동개최라는 후광 속에서 영화 ‘쉬리’가 약 120만 명의 관객동원에 성공함으로써 그 동안 경험적으로 무지에 가까웠던 한국 대중문화의 수준을 깊이 각인하게 되었다. 또한 월드컵 축구 공동개최 기념 한일 최초의 공동제작 드라마 <프렌즈>가 일본의 전국 네트워크인 TBS에서 방송된 점도 우회적이나마 한국 대중문화의 수용 저변을 확대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프렌즈>에 대한 일본인의 커다란 반향과 ‘원빈’이라는 한국인 스타의 탄생은 그 이후의 한국 드라마 붐을 견인하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빈이 출연했던 <가을동화>가 지역방송과 위성방송을 중심으로 인기리에 방송되었으며, <이브의 모든 것>은 최초로 일본 전국네트워크에 정규 편성되기도 했다.
작지만 꾸준한 한국 드라마 붐이 지속되는 가운데 공영방송인 NHK의 위성방송에서 <겨울연가>가 인기리에 소개되었으며, 위성방송발(發) 겨울연가 신드롬은 금년 4월부터 NHK 지상파에서 다시금 뜨겁게 재현되고 있다. <겨울연가>의 성공적인 안착의 이면에는 일본의 대표방송 NHK가 일정부분 보증수표가 되어주었다는 점 외에도 <쉬리>,<프렌즈>,<가을동화>,<이브의 모든 것>으로 이어지는 적지 않은 주춧돌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일본에 방송구조적인 틈새시장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시청률 여하에 따라 방송국 직원의 인사가 좌우되는 시스템이다. 그러다보니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스타급 탤런트를 기용한 드라마가 다반사이고 가장 소비력이 왕성한 젊은 층 대상의 트렌디 드라마 제작이 빈번한 것이 사실이다.
광고수익이 시청률과 직결되어 있는 구조 속에서 광고주를 의식해야 하는 방송사로서는 대중소비문화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층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런 가치 사슬이 순환되면서 중장년층이 문화적 효용을 느낄 수 있는 드라마가 자연스레 감소하게 된 것이다.
젊은 청춘남녀의 ‘쿨’한 트렌디 드라마 만이 양산되는 방송구조적인 한계 속에서는 세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폭넓은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겨울연가 팬에는 트렌디 드라마로부터 소외당한 중장년층이 유독 많다.
이들이 젊었던 시절에는 <겨울연가>와 같은 순애보나 지고지순한 드라마가 숱했고 그래서 지금의 드라마로부터는 감성적 소외감을 거듭 느껴왔던 것이다. 그런 일본인들에게 <겨울연가>는 언제나 그리운 노스탈지어를 확인시켜 주었고 그들은 < 겨울연가> 속에서 오랜만에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겨울연가>는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히트한 최초의 드라마로 기록될 것이다. 양국간에서 히트한 시점은 차이가 있지만, 두 나라 국민에게 커다란 반향과 공감을 불러일으킨 점만은 동일하다. 우리나라는 젊은 층, 일본은 중장년층 중심으로 반응 연령층은 달라도 겨울연가적인 정서는 두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관통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문화적 가치가 곧바로 산업적 바로미터가 되는 것이 요즘 세태이다. 산업적 측면에서 바라보더라도 <겨울연가>의 성공은 전도유망한 새로운 시장의 발견임에 틀림없다. <겨울연가>의 히트로 인해 DVD 15만 세트, 서적 86만부, 가이드북 28만부 등 일본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 시장 규모만 약 500억 원대로 추산되고 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겨울연가> 시청자들의 대(對)한국관련행동 증가, 예를 들면 한국 방문, 한국관련 행사 참가, 한국관련 서적 구입, 한국식 식사, 한국어 학습 등이 갖는 파급효과가 더 부가가치가 높은 부분이다. 어쨌든 방송콘텐츠가 문화적 수용에서 생명력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더욱이 <겨울연가>에 출연했던 배용준, 최지우도 몇 안 되는 일본내 한국인 스타 대열에 동참했다. 이들의 가세는, <겨울연가>자체의 인기는 비교적 생명력의 주기가 짧거나 수동적일 수 있으나 여기에서 파생되는 스타의 인기는 방송 프로그램이 종영된 이후에도 전이되어 연장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마케팅적인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스타의 탄생은 경제적 가치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문화성과 국적성 등에도 연관되는 만큼 전방위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귀중한 인적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겨울연가의 히트는 비유하자면 일시적인 고지 점령에 불과하다. 단명으로 끝나버린 무수한 대중문화 상품과 유행을 경험해온 우리로서는 지금이야말로 일본내 교두보 확보를 위한 진지 구축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겨울연가>,<가을동화>,<이브의 모든 것> 등으로 확인된 잠재 고객은 또 다른 문화적 효용을 쫓아 언제든지 환승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월드컵 축구로 부상한 잠재 수요들은 또 다른 스포츠 이벤트, 가령 베이징 올림픽 등으로 대체되거나 이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들을 한 곳으로 모아 고정적으로 붙들어 놓을 수 있는 유통기반 등이 필요하다. 더욱이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 방송의 전면 개방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일본 진출이 최선의 방어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겨울연가>에 취해있을 때가 아닌 것 같다.
김영덕(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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