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웅진
흔히 방송은 ‘세상을 향한 창(窓)’이라고 말한다. 우리 주변의 광범위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식을 직접 경험을 통해 개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만큼 텔레비전을 포함한 매스미디어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세상을 알게 해주는 학습장(場)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창이라고 다 같은 창이 아니다.
그 사람이 속한 계층에 따라 창의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은 큰 창을 통해 세상과 빠른 속도로 폭넓게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지만, 가지지 못한 자들은 힘 있는 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한되고 가려진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세상을 인식함에 있어서도 미디어를 통해 재현된 창 크기만큼의 불평등이 강요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사회적인 불평등을 강요받는 계층은 존재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불평등은 그 계층에 속한 구성원의 수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적은 수로 구성된 계층, 즉 소수계층(minority group)이란 용어는 본래 인종적인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는데, 미국과 같이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구 비중이 낮은 황색인과 흑인은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계층으로 분류되어 왔다. 이들은 다수계층의 횡포로 인해 차별과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왔지만, 민주주의의 발달이 가져온 인권 신장과 함께 이들 소수계층의 ‘소외문제’가 사회문제로 인식되고 이의 개선을 위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득권으로부터 소외된 소수계층을 구분하는 기준이 더 이상 수의 많고 적음이 아닌 그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이 획득한 지위의 개념으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즉 소수계층의 의미가 수적 열세에 놓여있는 특정 계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 다른 어느 계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의미로 변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한 사회의 엘리트 집단을 소수자라 부르지 않는 까닭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우리 시대의 장애인 집단은 분명 소수계층이다. 장애로 인해 주류 사회의 각종 권리들로부터 상당한 수준에서 ‘격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구통계학적으로도 장애인들은 분명 소수계층에 속한다. 장애인 헌장에서는 장애인이 비록 사회적 약자이지만 모든 인간이 누리는 기본 인권을 당연히 누려야 하며, 그 인격의 존엄성도 존중되어야 하고, 또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시대, 같은 사회의 다른 사람이 누리는 권리, 명예, 특전 등이 거부되거나 제한되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언적 의미일 뿐 우리의 현실 속 장애인들은 단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회의 다양한 혜택들로부터 소외된 채 고단한 삶을 살아가도록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공공의 배려가 충분하지 않을 때 신체적 장애는 사회적 장애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공중(公衆)의 이익, 즉 공익성의 제고라는 막중한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고 있는 방송도 장애인 등 소수계층의 소외화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부족하였다는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시청률 제고’를 최선의 가치로 삼은 채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want)’을 빌미로 정작 ‘필요한 것(need)’을 희생시키는, 그래서 결국 수익우선 논리가 방송의 공익성을 구축(驅逐)하는 악순환을 거듭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공·민영을 막론하고 천박한 상업주의가 득세하게 될 때 시청자를 유인하는 힘에 의해 자원(편성시간, 예산 등)의 할당이 이루어지게 되고, 결국 소수계층을 배려하는 프로그램은 관심의 영역밖에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역사적으로 소수계층의 개념은 사회의 변화와 함께 변화되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 예로 여성은 과거에는 남성에 비해 열등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소수계층에 속했지만 그동안 여러 방면에서 꾸준하게 전개된 여권신장운동으로 인해 지금은 어느 누구도 여성을 사회적으로부터 소외된 집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의 개선을 위한 방송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장애인은 우리 사회 내에서 아직까지 분명 소수계층에 속해있지만 여론 형성에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방송 매체가 어느 만큼의 노력을 해주느냐에 따라서 텔레비전 속의 장애인이 더 이상 소외받는 집단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장애인들은 특별한 대접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비장애인들과 똑같이 방송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수계층에 속하는 장애인을 위한 방송 프로그램의 확충은 긴요하다.
또한 장애인들의 방송 접근권에 대한 다양한 정책적 배려 또한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에게 서로를 이해하는 안목의 지평을 확대시켜주고, 방송을 통한 두 계층간의 교류를 가능케 함으로써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놓인 두터운 장벽을 허무는 의미있는 결과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 방송 시간의 확대, 시각 장애인을 위한 화면 해설 방송의 도입 등 장애인 시청자들의 복리 증진을 위한 과제는 산적해 있다. 이와 함께 방송 현업에 장애인들이 진출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적 지원도 제공되어야 한다.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텔레비전 메시지 생산과정에 장애인들이 참여하여 ‘보는’ 입장이 아닌 ‘만드는’ 입장에서 그들의 의견이 반영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국회에 여성 의원이 다수 진출해야 하는 이유와도 맥을 같이 한다. 산업사회의 발달과 함께 선․후천적 장애인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이유는 장애의 원인을 개인보다는 사회적 차원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 장애인을 위한 방송은 국가 시책으로 마련되어 있을 만큼 장애인의 정보 접근 통로는 열려있다.
많은 장애인들이 다양한 장애인 대상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재활의지를 다지고, 결국 사회로 복귀할 수 있게 희망과 용기를 얻고 있는 것은 많은 장애인들의 입을 통해 확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장애인을 위한 방송의 배려는 곧 우리 모두가 잠재적 장애인임을 인정하고, 장애인을 보는 왜곡된 시각을 근본적으로 교정하고자 하는 목적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장애인을 위한 방송 프로그램을 늘리고, 그들의 방송 접근권을 확보해주며, 장애인 방송인들이 다수 배출되도록 지원하는 것은 장애인의 복지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일반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유도하고, 매스미디어의 궁극적 지향점인 사회 통합을 완성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나가는데 힘과 용기를 주게 될 뿐만 아니라, 장애인이 차별을 당하거나 소외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어 놓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박웅진(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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