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동훈
방송 프로그램은 하나의 문화로 시청자들이 누려야할 향유의 대상이다. 장르에 따라 오락 프로그램은 재미있고 즐거워야 하며, 교양 프로그램은 성찰적 지식과 사유의 시간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방송 프로그램의 공익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방송은 향유의 다양한 계기를 주고 이를 통해 사회, 문화적 치유의 힘을 회복시키는데 그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송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원하고, 보고 싶고, 알고 싶어 하는 것만을 전해서는 안 된다. 시청자가 알아야 할 것, 보아야 할 것 역시 제대로 알리고 보여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
흔히 방송 프로그램, 특히 오락 프로그램에 대한 여론의 비판에 대해 프로그램 제작자(PD)들은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뭐가 잘못인가하고 되묻는다. 그들은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과연 시청자들이 보고 싶고, 알고 싶어 하는 것만을 전하는 것이 오락 프로그램의 전부일까? 주말 오락프로그램에서 몇 안 되는 취업자리를 놓고 수영복 차림으로 영어테스트를 받는 여성들의 모습은 과연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했던 것일까? 온통 불륜과 외도로 가득 찬 아침드라마는 과연 모든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고 원하는 것일까? 아마 이것은 시청률을 의식한 프로그램 제작진이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지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얼마 전, 봄 개편을 준비하는 모방송사 옴부즈맨 프로그램 PD와의 대화 중에 들은 말은 그들(PD)의 고민을 보여준다. “(오락 프로그램 만드는 것이)힘든 거 알면서 우리(옴부즈맨 프로그램 PD)도 불러다 놓고 뭐라고 말하는 게 많이 힘들고 걸린다.” 그는 지난 가을 개편 이후, 방송진흥원 뉴스워치팀이 프로그램 분석을 통해 지적했던 몇몇 오락 프로그램이 앞으로 있을 봄 개편에서 폐지될 예정이라는 말을 들려주며, 프로그램 제작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고충을 말했다.
그의 지적처럼 모든 방송 프로그램이 교양적일 필요는 없다. 교양 프로그램과 오락 프로그램은 결코 같은 이야기를 보여줄 수 없다. 장르적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 장르의 특성에 가장 충실한 것이다. 교양 프로그램은 유익하면 좋고, 오락 프로그램은 재미있고 즐거우면 된다. 굳이 사회적 비판과 여론을 의식해 오락과 교양을 이종 교배한 비정상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고 공익성 강화라고 말하는 것은 제작 역량의 낭비일 수도 있다.
‘에듀테인먼트’,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이 건강한 오락 프로그램이라는 이름 하에 양산해 낸 일회적 오락성 정보가 주는 즐거움이 일반 오락 프로그램의 재미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국 에듀테인먼트,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은 오락 프로그램의 하위 장르의 하나일 뿐 그것이 오락 프로그램이 지향해야 하는 전형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있을 방송사의 봄 프로그램 개편에 대해 몇 가지 바램을 전하고 싶다.
첫째, 관행적 편성방식을 벗어난 과감한 편성시도가 필요하다. 항상 시청률 때문에 순수 교양 프로그램은 시청 사각지대에 집중 배치하는 편성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영방송의 입장에서는 다소 이상론적인 이야기일 수 있어 논외로 한다고 해도, 공영방송인 KBS는 시청자의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기존의 순수 교양프로그램 편성시간대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순수예술 프로그램이나 교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주 시청시간대에 배치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둘째, 오락 프로그램은 항상 건전하고 유익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의 탈피이다. 시청자들은 에듀테인먼트나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처럼 정보와 지식을 주는 품격 높은 오락 프로그램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소일거리용 오락 프로그램이라도 존중받는 가운데 즐거움과 재미를 얻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흔히 지적되어 온 오락 프로그램의 선정성이나 가학성, 폭력성의 말초적 자극 요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무조건 배제될 수는 없는 것 역시 현실임을 감안할 때, 오락 소구 형식의 다양화와 수준의 문제인 것이다.
셋째, 많은 사람들이 본다는 이유로 주류 프로그램에서 다양한 연령층을 배려하지 못하는 관행은 이제 벗어나야 한다. 미국의 네트워크 방송사들이 주 타깃 시청자들을 시즌마다 달리함으로써 프로그램의 다양성이 제한적이나마 시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국내 방송사들도 시청자 계층별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개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넷째, 어린이와 청소년 대상의 프로그램에 대한 과감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다매체 환경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들이 있지만, 이들의 문화 향유 능력을 계발해주는 프로그램은 적은 것이 사실이다. 선택의 다양성만큼 중요한 것이 개별 선택 대상의 질적 수준임을 생각할 때, 지상파TV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대상 전문 프로그램 하나를 편성하더라도 이들의 눈높이 수준에 맞춘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한 즐거움과 재미 또는 성찰적 지식과 사유를 통한 치유의 힘, 그것이 방송 프로그램이 가진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다. 방송 프로그램이 중독성 쾌락과 즐거움만을 주기보다는 시청자가 자율적인 대중문화 향유 능력을 통해 회복과 치유의 과정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그런 프로그램을 기대해 본다.
이동훈(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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