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KBI칼럼] 방송프로그램의 사회 문화적 역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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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방송 | 등록일 | 03.03.31 | ||||
출처 |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 조회수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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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최용준
지난해 4월 미국에서는 전국적으로 '텔레비전 끄기 운동'이 벌어졌다. TV가 대량 생산해내는 대중문화의 천국으로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라는 조어까지 만들어낸 미국에서 시청자들이 TV끄기 운동을 벌인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일 수도 있다. 'TV끄기 네트워크'(TV Turn-off Network)라는 시민단체가 매년 주도하는 이 캠페인은 미국 사회에서 TV가 주도하는 대중문화의 폐해가 사회 문화적으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얼마 전에는 미국 발달심리학회지 3월호에 발표된 논문 한 편이 장기간 누적된 TV폭력이 주는 영향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함으로써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미국 언론의 저널리즘 가운데 한 유형으로 자리잡은 시민저널리즘의 출발 동기도 TV뉴스가 시민사회의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양산해내 사회적 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이었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방송을 산업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미국에서도 방송의 사회 문화적 역할에 대한 공공의 요구가 증대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TV뉴스
무소불위한 TV의 위력은 미국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무게 중심을 잃은 TV가 얼마나 자극적이고 선정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최근 있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에 대한 TV뉴스의 초기보도는 재난보도에 대한 기본적 고민조차 없는 듯한 양태를 보였다. 참사현장을 중계하는 앵커와 기자의 감정적 보도언어, 영상부터 현장수습에 대해 무비판적 보도를 하고도 며칠 후 시신 일부와 유품이 수습과정에서 유실된 것을 비판보도하면서 선진국의 재난현장 수습방식을 사례로 곁들이는 모순까지 나타났었다.
TV프로그램은 사회 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다른 방송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TV뉴스가 그 영향력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만들어진다면, TV는 공익성 실현이라는 존립의 정당성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셈이다. 미디어의 기술적 발달로 전파의 희소성을 근거로 한 방송의 공공성에 산업적 논리가 결합되어 가는 지금도 TV는 막강한 문화적, 교육적 영향력을 갖기에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전의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보도부터 지금의 이라크전 TV뉴스보도를 보면서 이러한 고민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라크전은 MBC와 함께'라는 전황 중심의 스포츠중계식 보도는 전쟁참사와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숙의적 보도가 필요함에도 시청률 경쟁 속에 매몰되어 이를 외면한 사례이다.
시청자들의 일상을 왜곡하는 오락프로그램들
TV프로그램이 사회 문화적 영향에 대한 고민 없이 만들어지는 사례는 오락프로그램에서도 나타난다. 현재 각 방송사의 대표적인 오락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은 동물소재 프로그램들이 그 예이다. 이 프로그램들에서는 동물들을 인간과 공존해야할 자연 환경의 일부가 아니라, 신기하고 재미있는 눈요기 거리로 전락시키고 있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연예인 짝짓기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상대방의 마음에 들려고 온갖 일들을 벌이는 연예인들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에게 관음주의적 즐거움(?)까지 주고 있다. 남녀간의 만남 자체를 지나치게 오락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인간관계를 상당히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드라마와 재연프로그램에서 나타나는 선정성과 폭력성, 희화성은 더 이상 새로운 논쟁거리가 아니다. 여론의 혹평을 받으면서도 계속 시청자들을 붙잡고 있는 재연프로그램과 폭력적인 드라마들은 TV 속의 일상생활을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있다. 굳이 오래 전 미국의 언론학자 거브너(G. Gerbner)의 배양효과이론을 꺼내지 않아도 여러 오락프로그램에서 나타나는 일상에 대한 왜곡된 표현들은 시청자들의 현실 인식을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주체적으로 즐기고 향유해야할 대중문화를 저급화하게 만들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봄 정기개편에는 내실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아지길 기대
이제 각 방송사의 봄철 프로그램 정기개편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부 방송사는 조금씩 프로그램을 신설하면서 개편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해마다 정기 개편 시즌이 되면 방송사들은 공영성 강화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건강한 오락프로그램을 늘리고 가족 중심의 건전한 채널을 만들겠다고 밝힌다. 분명 올해도 그러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봄철 정기 개편에 즈음해 방송프로그램의 사회 문화적 역할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개편 프로그램에 대해 장르별 구분을 떠나 TV가 갖는 문화적 역할에 대한 심사숙고를 바탕으로 제작이 이뤄져야 한다. 오락프로그램은 품위와 건전성을 의식해 지나치게 무거울 필요는 없지만, 시청자들의 삶에 대해 고민해 보고 그들의 일상에 정직하게 다가 설 수 있어야 한다. 제작진 스스로가 자신의 가족에게 권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편성되어야 한다.
둘째, 장르간의 산술적인 균형보다는 내실 있는 프로그램이 편성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프로그램 개편을 보면 장르별로 외형적인 수치상의 안배만 있을 뿐 실질적으로 오락적 성향이 크게 강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기획과 내용이 부실한 교양프로그램 몇 편을 형식적으로 신설했다가 두세 달 이후에 폐지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만든 건강한 오락프로그램 한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개편을 통해 편성되는 모든 프로그램들이 높은 완성도를 가진 내실 있는 프로그램이 되길 기대한다. 어느 장르의 프로그램이든 그것이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분명 사회 문화적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회 문화적으로 비주류에 속하는 계층을 배려한 프로그램들의 강화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연령별로 유아나 어린이, 노인층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전문 프로그램의 편성은 프로그램의 산술적인 다양성보다 더 필요한 작업이다. 지금처럼 평일 이른 아침 변두리 시간대에 배치하기보다는 이 연령대의 사람들이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시간대에 편성하는 것이 좋다.
최용준(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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