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게임산업 동향
게임산업은 오랫동안 장기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몸살을 앓아왔다. 이에 게임산업은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변화의 움직임을 보인다. 지난 10년간 업계 관계자들은 소셜미디어나 게임 개발자 회의 등을 통해 노동조합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해 왔다. 그 결과,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와 액티비전 블리자드(Activision Blizzard) 등의 대형 게임 회사를 시작으로 노동조합 설립이 증가하고 있다.
액티비전 블리자드는 2021년, 만연해 있던 성차별로 고소를 당하며 1,800만 달러(약 203억 원) 규모의 소송을 시작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내부 직원들 역시 이에 대응하여 1,000명 이상이 파업을 강행했다. 이후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으며, 노조 활동의 결과로 계약직 직원을 모두 정규직 직원으로 전환했다.
2023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자회사인 제니맥스 미디어(ZeniMax Media)의 품질보증 직원들이 투표를 통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를 반대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게임업계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유비소프트(Ubisoft Paris)의 노동조합이 2023년 1월, 불합리한 근로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강행했다. 노조는 주 4일 근무를 포함한 근무 시간 개선과 급여 인상을 요구하고 있으며, 인력 변경과 해고에 대한 투명한 운영을 요구하고 있다.
엔씨소프트 노동조합 '우주정복' 출처: SBS이런 전 세계적인 추세는 우리나라의 IT·게임업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구글 코리아(Google Korea)는 2023년 4월 고용 안정성과 근무 환경 개선 등을 위해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동월 국내 최대 게임 기업 중 하나인 엔씨소프트 역시 노조 '우주정복'을 출범하면서 근무 환경 개선에 나섰다. 업계에서는 넥슨과 스마일게이트, 엑스엘게임즈, 웹젠에 이어 다섯 번째로 설립된 것이다. 엔씨소프트의 노조 '우주정복'은 선언문을 통해 투명한 성과 평가와 보상체계 확립, 고용안정 보장, 행복한 조직문화 조성 등을 목표로 활동할 것을 밝혔다.
국내 게임업계는 이직이 잦고 성과주의가 강한 업계 특성상 타 업계에 비해 노조 설립 추세가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넥슨, 스마일게이트, 엑스엘게임즈, 웹젠 등 국내 대표 게임 회사들 노조가 잇따라 출범하며 게임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세계 최대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Game Developer Conference; GDC)에서는 매년 게임산업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게임 개발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2023년 1월 발표한 '2022년도 게임산업 현황 조사' 설문 결과에 따르면, 게임업계의 노동조합이 필요한지 묻는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개발자는 약 80%에 육박했다. 또한, 약 53%는 게임 회사에서 노조를 결성해야 한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특히, 개발자의 90% 이상이 사내 괴롭힘이 큰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노동조합 설립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결정 논의는 아직 활발하지 않은 걸로 나타났다. 사내에서 노동조합 결성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는지 묻는 말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약 60%가 논의한 적 없다고 응답하였으며, 약 22%만이 노조 결성과 관련된 실질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게임업계에 노동조합 설립이 필요한가? 출처: GDC게임 개발자들이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국제 게임 개발자 협회(International Game Developers Association)가 2021년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는 혹독한 근무 환경과 경력 개발 기회의 차별, 사내 불평등 등 다양한 불만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크런치 모드(Crunch Mode)'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는데, 크런치 모드는 개발 시한을 맞추기 위하여 수면과 영양 섭취, 위생, 기타 사회 생활 등을 포기하고 연장근무 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다수의 게임산업 노동자는 보상 없는 크런치 모드나 초과 근무가 지속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 관행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풍조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내 불평등 역시 주요 이유로 지적되었다. 무려 약 71%가 현재 성별이나 나이, 인종 등에 따른 불평등을 인식하고 있다고 응답하였으며 약 58%는 실제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에 따른 경력 발전 기회의 불공정성 역시 노동조합이 필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어하는 이유 출처: 국제 게임 개발자 협회(igda), Developer Satisfaction Survey 2021게임 개발자들이 희망하는 근로조건은 크게 합당한 보상과 사내문화, 일과 삶의 균형, 경력 개발 가능성 등으로 나눌 수 있다. GDC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직한 경험이 있거나 이직할 계획이 있는 개발자의 약 81%가 연봉 및 보상을 가장 중요한 근로조건으로 생각한다고 응답했다. 약 67%의 응답자는 사내 문화를 중요시 여긴다고 응답하였으며, 사내 복지를 중요시 한다고 응답한 비율도 약 54%를 기록했다.
게임 개발자가 다음 직장 선택 시 고려하는 사항 출처: GDC코로나19를 겪으며 게임 개발자의 재택근무가 증가하는 등 일과 삶의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지만, 신작 출시 전의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는 크런치 모드는 여전히 관행처럼 이어지고 있다. GDC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약 38%에 육박하는 응답자가 지난 12개월 간 주간 평균 노동 시간이 41시간을 넘겼다고 응답했다.
한편, 지난 12개월간 최대 노동 시간이 얼마였는지 물어본 질문에는 61시간 이상 근무한 적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26%에 달했으며, 이중 법정 근로시간인 40시간을 2배가량 초과해 81시간 이상 일했다고 응답한 극단적인 케이스도 약 7% 집계되었다. 한편, 타의에 의한 초과 근무 비율은 25%로 나타났는데 14%는 사내 압박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최근 12개월 간 주간 평균 노동 시간 출처: GDC 최근 12개월 간 주간 최대 노동 시간 출처: GDC게임 회사들 역시 크런치 모드에 대한 임직원들의 불만과 대중의 비판이 증가함에 따라 게임 출시에 따른 근무 시간 증가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Sony Interactive Entertainment) 산하 게임 스튜디오 너티 독(Naughty dog)은 개발이 거의 완료된 타이틀에 대해서만 출시 발표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게임 회사는 사전에 게임 출시일을 공표해 왔으며, 소비자와의 약속인 출시 기일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을 개발자들에게 지워왔다. 너티 독 역시 <언차티드 4(Uncharted 4)>와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The Last of Us Part 2)> 출시를 사전에 공표하는 바람에 개발자들이 크런치 모드에 들어가야 했으며, 이에 큰 반발을 겪은 바 있다. 따라서 너티 독은 개발 기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하여 일정 부분 개발이 완료된 타이틀에 대해서만 출시를 공표하고, 직원들의 부담을 줄인다는 방침이다.
TV 애니메이션과 게임 그래픽을 제작하는 미국의 카운터 펀치(Counter Punch) 역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카운터 펀치의 케이 아루튠얀(Kay Arutyunyan) 최고경영자는 "게임 개발자의 번아웃을 완화하는 방법의 하나는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비즈니스 관행을 만드는 것이다"라며 보다 나은 프로젝트 기획과 관리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특히 최근 컴퓨터 그래픽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외부 개발자에게 무리한 납품 일정을 제시하는 등의 관행을 막는 방법을 통해 번아웃과 크런치 모드를 없앨 수 있다고 언급했다.
크런치 모드의 완화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주 4일제를 시행하려는 방안도 시도되고 있다. 런던과 스코틀랜드 기반의 영국 모바일 게임업체 허치 게임즈(Hutch Games)는 2022년 6월, 주 5일 40시간 근무에서 주 4일 32시간 근무로 전환하는 실험을 시작했으며, 12월, 공식적으로 주 4일제를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게임업계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은 크런치 모드의 관행을 없애고, 나아가 일과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을지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장기간 노동과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부재한 것은 조직 문화를 해치는 요인으로 지적받고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개발자는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GDC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노동조합 설립을 찬성한다고 응답한 한 게임 개발자는 "노동조합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노동자의 권리를 더 지켜줄 것을 기대한다”라고 의견을 전했다. 또 다른 응답자는 "노동조합 설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운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한편 게임 개발자들은 악성 유저와 이들의 괴롭힘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같은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게임업계에서 악성 유저의 존재가 문제인지를 묻는 말에 '심각한 문제이다'라고 응답한 비율은 78%로 나타났다. 이에 대한 악성 유저에 대한 회사 차원에서의 적절한 대응도 처우 개선을 위한 중요한 해결과제이다.
게임업계에서 악성 유저의 존재는 문제인가? 출처: GDC게임업계의 다양성 부족은 오랫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가장 큰 문제는 인종 관련 문제이다. GDC의 조사에 따르면, 게임업계 종사자 약 65%는 백인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아시아인의 비율은 12%, 히스패닉의 비율은 9%로 나타났다. 흑인의 비율은 3%에 불과하며 다양성 부족을 방증하고 있다. 이런 인종의 불균형성은 게임업계의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해칠 뿐 아니라, 차별적인 생각이 게임에 드러나는 문제점을 일으키기도 한다.
성 불평등 문제도 존재한다. 같은 설문 결과에 따르면 현재 게임업계 종사자 중 여성의 비율은 23%에 불과하다. 게임산업 자체에 남성 이용자가 많다고는 하지만 성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반면, 라이엇 게임즈(Riot Games)는 다양성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대표적인 기업 중 하나이다. 이는 지난 2018년 성차별과 성희롱으로 고소당한 이후 1억 달러의 합의금을 지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라이엇 게임즈은 본격적으로 다양성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목적으로 다양성 및 포용을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현재 라이엇 게임즈의 여성 비율은 25.8%이며, 이 중 리더 비율은 21.5%까지 증가했다. 아직 낮은 비율이긴 하나 충분히 가치가 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게임업계의 가장 큰 장점을 게임을 만드는 대부분 사람이 게임을 좋아하고, 실제로 플레이한다는 점이다. 즉, 개발자 간 공통의 관심사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를 장점으로 활용하여 각 그룹 간 대화를 끌어내야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각 게임 회사 다양성과 포용성을 지원하기 위한 이니셔티브에 착수하는 등 타개책을 찾는 것이 촉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