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편안히 둘러앉아 이런저런 ‘썰’을 풀듯, 출연진이 서로 이야기꾼과 이야기 친구가 되어 역사 속의 뒷이야기를 해주는 예능이 있다. 최근 스토리텔링 예능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꼬꼬무>) 제작기를 담당 PD의 목소리로 전해 들어본다.
“너 그거 진짜 몰라? 어떻게 그 사건을 모를 수가 있지?”
2019년 12월, 회사(SBS)에서 ‘현대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처음 의기투합한 뒤,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다. 내가 아는 건 당연히 그들도 알 거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나이 듦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고나 할까. 어느 날엔가 두 띠 동갑인 친구들이 팀에 합류하는가 싶더니, 지금은 부모님이 나와 동갑인 친구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모른다. 같이 회의를 하다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을 해줘야 한다. 나이든 자에게 익숙한 단어가 그들에겐 무척 낯설다. 우리는 거기서 시작하기로 했다. 모름을 당연하게 여기기로 했다.
“근데 선배. 부장이 그렇게 힘이 세요?”
“야, 중앙정보부잖아. 거긴 부장이 제일 높아. 너만 모르는 거 아냐?”
“아니오. 저도 사실… 이번에 공부하면서 처음 알았어요.”
“헐…. 그래? 그럼 여기에 중앙정보부 ‘꼬리’ 하나 넣을까?”
모름에서 이야기의 열차가 출발하니, 중간중간 서는 정거장도 예측 불가다. 한참 달리다가 갑자기 끼익 하고 서는 이 정거장을 우리는 ‘꼬리’라고 부르는데, 그날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곁가지 이야기를 뜻한다. 친구 이야기를 듣다보면 삼천포로 빠지는 일 한 번씩 있지 않은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예정에 없던 길로 들어서는 그런 여행이 훨씬 더 흥미롭다. 이야기는 사람을 움직이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단, 전제가 있다.
첫째 기승전결. 구성이 치밀하게 계산돼 있어야 한다. 특히나 요즘처럼 ‘방구석 홈즈’가 많은 시대에는, 궁금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미스터리 스토리텔링이 사람들을 몰입하게 한다.
또 하나는 이야기꾼이 있어야 한다. 술자리를 떠올려보면 답이 나온다. 어느 녀석의 얘기는 정말 들어줄 수가 없다. 고역이다. 오지도 않은 문자를 확인하고,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털어 넣어야 한다.
일상적인 공간에서 일대일로 대화하는 <꼬꼬무>의 콘셉트
출처 : SBS 교양 공식채널‘진짜? 대박! 그래서, 그래서?’ 어떤 녀석은 듣는 이로 하여금 이야기를 재촉하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 ‘그래서?’를 연발하게 한다. 적절하게 쪼다가 또 푼다. 듣는 이의 표정도 정확히 보고 있어서 지루해한다 싶으면 MSG를 확 뿌릴 줄도 알고, 어느 대목에선 듣는 이의 과거를 들먹이며 감정을 건드릴 줄도 안다. 한마디로 ‘꾼’이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절친들과 일대일로 이야기 한다’는 <꼬꼬무>의 콘셉트는 이런 술자리에서 나왔다. 꾼들을 불러내서 같은 이야기를 하게 하면 어떨까? 같은 듯 다른 이야기. 내용은 같지만 결이 다른 이야기. 결론은 같지만 느낌이 다른 이야기. 청자의 반응이 다 제각각일 터이니, 분명 같은 이야기라도 서로 다른 분위기가 나올 거란 확신이 들었다.
전문가가 지식은 물론 시청자가 직접 느껴야 할 감정까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기존의 방식은 배제하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가르치려 드는 프로그램을 ‘극혐’하고, 바로 꼰대란 낙인을 찍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문가가 보유하고 있는 지식과 통찰을 대체할 대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디테일이었다.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들이 침투하는 과정에서 나무꾼 삼형제를 만났고 투표를 통해 생사를 결정했다는 디테일을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지존파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지존파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14시간에 걸쳐 그들의 살인공장에서 탈출한 여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믿기로’ 했다. 설사 그 디테일까지 아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 하고픈 욕망으로 채널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악마가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은 곧 신(神) 또한 디테일 속에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찾은 또 하나의 답은 시점이다.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전지적’이다. 바로 눈앞에서 사건이 펼쳐지던 당시에는 분명 일인칭이었을 이야기가 시간이 흐른 뒤엔 철저히 제삼자의 관점으로 대상화 된다. 그 결과 사건 속 개인은 사라지고 의미 단위로 뭉뚱그려진다. 객관적인 몇몇 핵심 팩트만 점선으로 연결되고 그 끝에 남는 느낌 역시 시험 문제마냥 답이 정해져 있다. 그렇게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이야기로만 객관적으로 전승된다. 이래서는 모든 이야기가 천편일률적일 수밖에 없다. <꼬꼬무>만의 이야기라고 할 게 남아 있지 않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출처 : SBS 홈페이지하지만 시점에는 마법과도 같은 힘이 있다. 누구의 시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이라도 무척 달라 보인다. 중요 사실이야 다를 게 없지만, 사건에 연루된 개인이 누구냐에 따라, 그가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고 어떻게 그사건을 수용했느냐에 따라,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하늘과 땅 차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시점으로 보는 ‘DJ납치사건’과 중앙정보부 흑색공작원의 시점으로 보는 ‘KT공작사건’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시점을 발굴하기 위해, 감춰진 디테일을 채워 넣기 위해, 이런 것까지 뒤져야하나 싶을 정도로 자료를 모았고 그 자료 속에서 아직 가공된 적 없는 원석을 찾아 헤맸다. 그리하여 이미 그 사건을 알고 있는 엄마도 재밌고, 처음 그 사건을 접한 딸도 재밌는 이야기가 되기를 갈망했다.
“꼬꼬무 보다가 아빠랑 그 사건 얘기했어요. 아빠랑 대화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요즘 <꼬꼬무>의 SNS 계정에 많이 달리는 댓글 중 하나다. 깜짝 놀랐다. 나도 똑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평소엔 “나 때는 말이야”를 시작하면, 엉덩이 들썩이며 기회만 엿보다가 제 방으로 쏙 들어가던 아들 녀석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묻고 또 묻는 경험 말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배어나오는 그 경험을 시청자도 나와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제작자에게 이보다 기쁜 일이 있을까. 그 대화 속에서 아빠의 과거는 아들의 현재가 되고, 결국 부자의 미래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웃한 사람들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않고 받지도 않으며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인간이 없듯 사건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대의 어떤 사건은 이전의 어떤 사건으로 잉태되었고, 다음 시대의 어떤 사건에 필연적으로 개입한다. 씨앗이 된다. 그렇게 역사는 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리고 사건의 중심에는 여지없이 사람이 있다. 그가 어쩌다 그 사건의 복판으로 들어가게 됐는지, 시대적 상황과 어떻게 작용-반작용을 하면서 그러한 결말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래서 결국 어떤 성장을 하게 됐는지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객관적인 시점이 아니라 주관적 시점을 얻고자 했다. 시험을 보기 위한 역사 공부가 아니라면,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면, 개인의 주관적 이야기여야 비로소 오늘 다시 그 사건을 반추하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래야 오늘의 내가 한 뼘 더 성장하지 않을까.
지구상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파란만장했던 우리의 어제는 분명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엄마와 아빠, 아들과 딸들이 잠시라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꼬꼬무> 열차는 오늘도 닦고, 조이고, 기름 치고 있다. 쉽게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